그들의 ‘천로역정들’: 역사적 그리스도인 42인의 ‘다채롭고 포괄적인’ 문화적 전기 모음집(이재근)
관련링크
본문
글 이재근
책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제임스 휴스턴, 옌스 치머만 지음
처음 이 책의 서평을 의뢰받았을 때에는 이토록 마음에 짐이 될지 알지 못했다. 일정이 겹치거나 할 일이 많아서, 약속된 다른 원고들의 마감일이 촉박해서 서평이나 추천사, 감수, 논문, 강연, 설교 등의 요청을 고사할 수밖에 없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IVP에서 서평 요청을 받았을 때, 마감 날짜를 조금 연장해 달라는 부탁 외에는, 딱히 거절하지 않고 요청에 응했다. 내 신앙과 신학, 지성의 ‘기독교적 자아’와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IVP 책들이 끼친 영향이 가히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학계에 종사하게 된 후에는 번역자와 서평자, 강연자, 친우 등으로서 한국 IVP 및 거기 속한 구성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과정은 정말 어려웠다. 우선,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꼼꼼히 읽어야 했는데, 책의 분량이 엄청나게 방대했고, 내용도 최근 읽었던 다른 어떤 책보다도 심오했다. 우선 분량이다. 원서로도 약 700쪽(정확히는 694쪽)이나 되는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더 가독성 있게 편집되고 난 후에는 무려 1,054쪽이 되었다.
분량도 문제지만, 내용은 더 문제였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한국어 번역판의 부제는 “성경과 역사 속에 나타난 기독교적 자아의 원천들”이며, SOURCES OF THE CHRISTIAN SELF라는 제목을 가진 영어 원서의 부제는 “A CULTURAL HISTORY OF CHRISTIAN IDENTITY”이다. 두 언어로 된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성과 영성, 행동으로 특별하게 보여 준 42인을 선정한 후, 이들의 생애와 기독교적 정체성을 신학과 역사학, 철학, 문학 등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이 각각 자신들의 학문 전공의 틀로 해석해서 전기 형태로 집필한 학술 에세이(소논문) 모음집이다. 신학자나 역사가의 글은 교회사 전공자인 내게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관심사가 같은 만큼 흥미도 유발했다. 그러나 철학이나 해석학, 문학적 인간론에서 사용하는 학술 용어와 논쟁 주제들을 가져와 인물들의 정신세계와 신앙, 행동을 해석한 철학자, 해석학자, 문학자의 글은 그들이 다루는 대상 인물의 생애에 대한 나의 익숙함과는 별개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 책은 쉬운 책이 아니다. 방대한 분량에서나, 내용의 깊이에서나, 저자들과 대상 인물군의 다채로움에서나, 활용된 학문 분과의 다양성에서나, 여러모로 도전이 어려운 책임에 틀림없다. 이런 난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에세이 하나하나를 밑줄 쳐 가며 꼼꼼히 읽은 후 얻은 유익이 내게는 너무도 컸다.
보편교회의 전통을 따른 그리스도인 역사 기술
첫째, 시공간의 포괄성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역사의 시작은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사도행전의 교회 탄생 이후부터로 여겨진다. 그러나 구약성경(히브리어성경)이 신약성경(그리스어성경)과 언약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구약을 폐기한 이들은 교회사 속에서 모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본서는 두 언약의 통일성을 인정하는 보편교회의 전통을 따라,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예비한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 예레미야를 그리스도인의 범주에 두고, 이들에 대한 에세이도 전문 성서학자들에게 맡겼다.
이어서 그리스도를 육체적으로 직접 만난 시몬 베드로, 예수의 형제들인 야고보와 유다에 이어, 그리스도를 영적으로(혹은 신비적으로) 만난 사도 바울을 신약의 대표로 삼아 이들의 정체성을 들려준다. 그다음부터는 교회사 시기 분류법의 전형에 따라, 초기 교회, 중세 시대, 종교개혁 시대, 근대 세계, 20세기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을 시기별로 각각 6~9명씩 꼽아서 그들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해설한다.
역사 속 다채롭고 흥미로운 그리스도인들을 고루 조명하는 책
둘째, 선정된 인물들의 다양성이다. 성경 및 교회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친밀감의 정도는 각 독자의 신학 교육 경험, 신앙 연수, 독서 습관, 속한 공동체의 지향성 등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선정된 인물들에 대한 독자의 인지도 수준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우르는 전통별, 성별, 국적별, 시기별 포괄성은 아주 인상적이다. 누구를 넣고 누구를 뺄 것인지를 놓고 편집인들이 상당히 깊은 고심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3부 초기 교회의 정체성”에 등장한 9인 중 7인은 그리스계 교부 4인, 라틴계 교부 3인으로, 지리와 언어에 따른 고대교회사의 전형적인 구분 기준을 반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도 시대부터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등 동방으로 이동하여 ‘핍박받는 소수자’라는 그리스도인의 자아 정체성을 일찍부터 구현했던 이들의 사례도 둘이나 다룬다. 여기에는 ‘바그다드의 티모테오스 1세’라는 개인을 다룬 글도 있지만, 심지어 ‘후기 고대의 포로들’이라는 불특정 그리스도인들을 선정하여 이들에 대한 집단적 전기를 작성한 경우도 있다.
중세 시대에도 안셀무스, 베르나르, 아퀴나스, 단테처럼,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고 모두가 동의할 만한 유명한 남성 그리스도인이 있는 반면, 노리치의 줄리언 같은 여성 수도자, 칼레루에가의 도미니쿠스와 작센의 요르단같이 중세 전공자가 아니고는 깊이 알기 어려운 이들, 즉 연구자와 독자들의 관심 밖에 있는 소외된 이들도 포함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할당된 인물군도 흥미롭다. 루터와 칼뱅 같은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외에, 오히려 종교개혁 운동에 반기를 들고 국가와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대의에 충성했던 토머스 모어, 당시에는 유명했으나 오늘날은 거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대중 경건 작가 토머스 베컨도 등장한다. 아빌라의 테레사와 루이스 데 레온 수사 같은 가톨릭 신비주의자도 분석의 대상인데, 이는 16-17세기 종교개혁기 서유럽 전역을 개신교가 휩쓸었다는 개신교인 다수의 오해를 교정하는 효과가 있다. 당시 서유럽의 약 60퍼센트는 여전히 로마가톨릭을 떠나지 않았고, 내부 개혁을 통해 수도원 전통 등의 오래된 유산이 더 강화되었다는 것도 진실의 일부다.
근대 시기를 다루는 6부에서도 안나 마리아 판 스휘르만, 잔느 귀용 부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같은 여성들의 이름이 전체 대상자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영미 배경의 편집인들과 저자들이 협력해서 탄생시킨 책인 만큼, 존 버니언, 조너선 에드워즈, 찰스 웨슬리, 크리스티나 로세티(이탈리아계 영국인) 같은 영어권 인물이 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체코인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네덜란드인 판 스휘르만, 프랑스인 잔느 귀용과 블레즈 파스칼도 소개되었다.
7부의 제목처럼 “격동의 20세기”에 기독교적 자아 정체성을 독특하게 형성한 인물들을 선정하는 것이 편집인들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지난 2천 년간 인류의 생활환경의 변화보다 더 급진적이고 다양한 기술, 사고, 문화, 정치, 사회의 격변들이 지난 100년 사이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철학과 신학을 통해 이 변화된 근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 쇠렌 키르케고르, 카를 바르트, C. S. 루이스, 디트리히 본회퍼, 자크 엘륄 같은 인물이 소개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 남부 특유의 ‘유사 개신교 국교’ 문화 속에서 자라나면서도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을 유지했던, 이 문화의 거주민인 동시에 외지인이라는 이중 정체성을 바탕으로 이 세계를 독특한 필체로 문학화한 여성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가 포함된 것은 특별하다.
책 전체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42장의 주인공이 “아프리카 그리스도인, 혹은 기독교 아프리카인”이라는 것도 상당히 의미가 크다. 이 책의 편집인들이 21세기 이후 기독교의 미래가 더 이상 서양의 백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비서양 지역 그리스도인에게 달려 있다는 현실, 즉 ‘세계 기독교’의 지형도와 동향을 인지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저자들의 참신한 그리스도인 연구서
셋째, 저자들의 학문 배경과 연구방법론의 다채로움도 눈에 띈다. 책의 끝부분에는 두 편집인을 포함한 저자 42명의 명단과 간략한 프로필이 소개된다.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영어로 글을 썼다는 것,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양 유수의 종합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라는 것, 복음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전통의 그리스도교 배경에서 성장했거나 그리스도교 관련 주제를 연구한다는 것 등이다.
이외에는 오히려 다양성이 더 두드러진다. 이미 언급한 대로, 구약과 신약의 인물들을 분석한 저자들은 모두 성서학자이다. 이어서 주로 교회사의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글을 쓴 저자들 가운데 역사가가 많으리라 예측하겠지만, 실제로 이들 중 교회사나 서양사 등 역사학 분야에서 교수나 학자로 활동하는 저자는 폭넓게 계산해도 채 10명이 되지 않는다. 더 많은 학자들이 조직신학이나 종교철학 등 사상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실제로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역사학보다는 신학적 해석학, 철학적 해석학, 문화철학, 종교철학, 하이데거나 리쾨르, 레비나스, 그리고 찰스 테일러 같은 철학자들의 현대철학 등의 최신 연구방법론을 활용하여 논지를 전개한다. 일반 독자가 읽기에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방법론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 로세티를 다룬 엘리자베스 러들로, 존 버니언을 다룬 스티븐 네이, 루이스 데 레온 수사를 다룬 콜린 톰슨 등 언어와 문학을 전공한 어문학자들의 글도 몇 편 있는데, 이들은 이 책에 실린 42편의 에세이 중 접근법이 가장 참신한 사례에 속한다. 연구 대상 인물이 남긴 기록에서 신학자나 교회사가가 보지 못하는 당대의 관용표현을 찾아내어 그 의미를 부각시킨다거나, 그 표현에 담긴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기도 하며, 이 인물들이 쓴 글이 서양 문학과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독자에게 알려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법학자 로버트 보크가 쓴 토머스 모어에 대한 에세이는 거의 전적으로 법조인으로서 모어의 정체성에 집중한다는 점도 특이하다.
여성 저자들과 비서양권 저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다양성과 포괄성에 대한 편집인들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42명의 저자 중 여성 저자는 8명인데, 이들은 여성 인물에 대한 글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 후기 고대의 포로들, 장 칼뱅, C. S. 루이스 같은 남성 인물들에 대한 에세이도 썼다. 대개 여성 학자들이 여성 관련 주제나 여성 인물에 대한 연구에서만 여전히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는 세계 학계, 특히 오늘날 기독교계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 책의 여성 기고자들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인물들을 다룬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서양인이나 백인이 아닌 저자들의 분포도 눈에 띈다. 아프리카 기독교인을 분석한 빅터 에지그보는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박사 학위를 하고 미국 미네소타에서 가르친다. 중국인 용화 게는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인데,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와 북경사범대학에서 가르친다. 박와 라이는 잉글랜드 더럼에서 공부하고, 싱가포르에서 가르치는 교회사 학자다. 역시 중국계인 조너선 싱청 리는 토론토에서 박사 과정을 진행하면서, 캐나다와 미국의 여러 중국인 대상 신학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는 학자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 책의 저자 42인 중 성서학과 신학계에 종사하는 일부 유명한 시니어 학자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부분은 한국 독자들에게 한국어 번역으로는 처음 소개되는 낯선 학자들이다. 이 책을 통해 21세기 학계의 주역이 되어 이름을 떨칠 이들이 한국에서 데뷔하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기독교 전통 너머 폭넓고 지적인 사회와의 성공적 만남
마지막으로, 이 책은 리젠트 칼리지 비전 실현의 한 사례이다. 편집인 옌스 치머만은 이 책이 동료 편집인으로서 캐나다 밴쿠버 소재 리젠트 칼리지의 설립자이자 초대 학장, 교수였던 “제임스 휴스턴의 지칠 줄 모르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지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힌다. 리젠트 칼리지는 주로 영국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단의 그리스도인 학자들이 평신도에게 양질의 신학 및 인문학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캐나다에 설립한 복음주의 기독교 대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책의 ‘편집인 서문’과 ‘감사의 글’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모두 옌스 치머만이 쓴 것으로 보인다. 치머만은 이 책이 휴스턴의 비전을 실현해 준 “리젠트 동문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므로, 이 책을 동문들과 후원자들에게 헌정한다고 말한다(27).
그러나 한편으로 두 글을 읽다 보면, 책은 마치 리젠트의 설립자이자 영혼 그 자체인 휴스턴에게 바치는 헌정 논문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치머만은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모든 학위를 받은 후, 밴쿠버 근교 랭리에 소재한 트리니티웨스턴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2016년 이후 리젠트 칼리지의 신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의 에세이들을 집필한 이들 가운데 리젠트 칼리지와 직접 연결고리를 가진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치머만에 따르면, “신학에 관심이 있고, 폭넓은 교육을 받은 학제 간 연구와 관계가 있는 독자”, “자신의 기독교 전통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보다 넓은 지적이고 종종 세속적인 사회와 관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리젠트 칼리지와 제임스 휴스턴이 배출하고 싶어 했던 자아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책은 그런 리젠트 전통의 비전이 성공적으로 구현된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추신: 한국어 번역판의 표지 삽화를 ‘단테의 신곡’을 다루는 작품으로 꾸민 것은 신의 한수였다. 단테는 실제로 이 책에도 한 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원서 표지를 보았다면, 누구나 한국어판 표지가 압승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