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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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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휴스턴, 옌스 치머만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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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의 기록 에 의하면, 점차 세를 더해 가던 기독교 운동의 추종자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 혹은 그리스도-사람들이라고 부른 것은 안디옥에서였다(행 11:26).1) 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와 완전히 동일시한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예수님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크리 스토스’(Christos,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가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학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지고 씨름하지만, 예수님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 그분과 동일시하고자 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평생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연결 고리는 종종 놓친다. 자신들의 연구 자체가 그 그리스도인들이 남긴 증언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름으로도 많이 불렸다. 제자, 따로 부름 받은 자, 사도, 신자, 성도, 형제, 그 길의 사람들 등. 그러나 안디옥에서 이들을 지켜본 외부인들은 앞으로 이들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단순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동일시될 것인지를 미리 알아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을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라는 별명으로 부른 것 아닐까? 


그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아마도 박해의 위협 앞에서 그리스도의 이름과의 동일시는 더 단순하고 근본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처음 흩어져 안디옥 방향으로 간 이유도 바로 박해 때문이었다. “불같은 고난”을 견디며 적대적인 사회 환경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디아스포라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순교와 더 근본적으로 동일시되라고 신자들에게 촉구하는데, 여기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사도행전 11:26과 베드로전서 4:16 이외에 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신약성경의 구절은 사도 행전 26:28에서 바울의 증언에 대해 아그립바왕이 한 말이다.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약간의 아이러니를 담아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 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했다. 이 경우에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그 용어를 사용했고, 상황 또한 재판과 박해라는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때문에 삶과 죽음을 오가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비두니아에 갓 탄생한 교회가 박해를 받았을 때 신자들은 황제 숭배에 강력하게 도전했다. 플리니우스(Pliny) 총독과 트라야누스(Trajan) 황제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가가 강조한 것처럼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이심을 주장했다. 이 상황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보다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그저 그 이름을 고백하는 것과 가장 기본적으로 연관이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 준다. 이제 순교자들의 역할이 분명해졌다. 순교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의 완전한 일치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동일시된 것이 순교라는 번제(holocaust offering)를 통해 순교자들의 육체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안디옥의 이그나 티우스(Ignatius of Antioch)는 로마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순교의 신학을 가장 분명하고도 열정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기독교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와 단순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아가서 이그나티우스의 편지가 분명히 보여 주듯,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는 내적 혹은 도덕적 변화를 넘어 한 인간의 정체성 전체로 확장된다. 이그나티우스는 회중에게 자신의 순교를 막지 말라고 부탁하는 말로 편지를 맺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으로써 자신은 “인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는 “하나님의 수난을 모방하는 자” 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제자가 되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순수한 빛을 받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진정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라고 그는 썼다.2) 이 놀라운 구절은, 기독교 정체성은 일찍부터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또한 보편적이거나 세계적인 문제였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에게 회복해 놓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미래의 약속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를 지나오면서 이 말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것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게 바로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소명은 “그 이름”과 전적으로 그리고 단순하게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자기 삶의 가장 본질적인 사실이 되도록 말이다. 그러나 각 세대의 신자들은 특수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 소명을 받으며 그 문화적 상황은 변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이 책은 그러한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역사 구성의 시작이자 그 작업에 대한 소박한 기여로서, 서로 매우 다른 상황에 처했던 여자와 남자들이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의 박해 상황에서, 콘스탄티 누스(Constantine)의 특혜를 받은 니케아 공의회 시대에, 비잔틴제국의 동방 경계에서,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몰락 등등의 상황에서, 동과 서의 문화사 속 여러 사건들을 지나는 동안 각자의 고유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가 주라고 고백하는, 즉 “나는 크리스티아노스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성령 께서 모으신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어떠한 역사적 작업보다, 정체성을 기록하는 전기적 서사(biographical narratives)에 해석학적 인식이 더 많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글들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더라도) 제법 분명한 이론적 틀을 가지고 쓴 것 들이다. 이 책의 원제인 ‘Sources of the Christian Self’는 지금은 고전이 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자아의 원천들: 현대적 정체성의 형성』 (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새물결)을 연상케 한다. 테일러의 작업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의미의 틀을 구성할 때 정체성이 가지는 중요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또한 현대가 이상적으로 삼는 자기 됨(selfhood)에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이 책은 그의 선구적 작업을 채택하는 동시에 적용한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는 맥락인 (위로부터 주어지는) 지적 조건과 (아래로부터 주어지는) 사회적 조건을 다 포함하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테일러의 역사화 작업과 서사의 예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테일러의 개괄적인 지성사가 너무 일반적이고, 중요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처했던 구체적인 사회 상황과 교회의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정체성의 문화사를 제대로 쓰려면 인물 중심적으로 접근 해야 한다. 즉 신자 개인이 속한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회적·역사적 상황을 살펴보고 이를 다른 시공 속의 상황들과도 비교하면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이야기를 구체적인 삶의 현실의 맥락에서 들려주고자 한다. 순교가 몸을 바쳐 그리스도의 이름을 최종적으로 고백하며 말과 행동의 연합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었듯,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화사는 추상적인 관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남자와 여자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서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가장 좋은 연구 방법이다. 중요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남긴 현존 하는 자전적 자료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형성에 참고가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들을 제시한다. 이 책의 글들은 그렇게 종종 무시되는 정체성 형성의 문화적·실천적 자료들, 곧 이름 바꿈, 특별한 기도 습관, 성경의 형태와 사용 방법, 시편의 역할, 성경 인물과의 동일시, 고백의 형태, 편지, 회고록과 일기, (예를 들어 찬송가와 같은) 음악 형식, 예배 형식 등을 포함시키려 노력했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기독교의 일반적인 가정(assumption)과 관습과 교리들, 그리고 그것들이 개인적으로 실천되는 방식이 서로 복잡하게 얽힌 양상들을 고려했다. 예를 들어, 정체성 형성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주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근본적이고 반문화적인 패러다임 전환 곧 ‘메타노이아’(metanoia, 근본 적 전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보편적 차원은 서로 다른 사회 상황 속에서 실현되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도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에게 ‘메타노이아’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다. 스데반의 경우는 순교하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바울의 경우는 더 이상 “바리새인 중의 한 바리새인”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에게는 이제 “기독교”라고 불리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유대교 및 로마 문화와 단절하는 것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에게는 기독교의 거룩을 추구하기 위해서 고대 그리스 문화와 더 확고하게 단절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 누스(Augustine)에게는 카시키아쿰의 정원에서 “그가 집어 들어 읽었을 때” 시작된 고백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에게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기사도”에 참여함을 의미했다. ‘메타노이아’는 또한 종교재판 시대의 사람들이 알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신비한 환상을 경험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에게도 새로운 시작을 촉발했다. 동일한 종교 전통 안에서 나열되는 정체 성의 서사에서는 근본적인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제도 기독교 안에서도 새로운 전환들은 일어났고, 베다, 안셀무 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에게서, 특히 개신교 복음주의 전통의 웨슬리, 본 회퍼 등의 회심 서사에서도 그러한 전환을 볼 수 있다. 


이 에세이 모음집의 순서와 일관성은 유기적인 동시에 이론적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시작해서 교부 시대, 중세 시대, 초기 근대를 지나 계몽주의 시대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순서로 서사를 구성했기 때문에 시간적 질서가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이론적 가정들도 이 책의 일관성에 기여한다. 모든 저자는 역사를 쓴다는 것은 이론에 의지해서 역사적 자료를 해석하는 것이라는 해석학의 원칙을 잘 알고 있다. 독일의 해석철학자 한스게오르 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가르쳐 주었듯,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 은 “지평의 혼합”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다. 즉, 과거는 우리의 현재 관심사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과거의 전유는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적용을 일정 정도 담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법적 판결의 역사적 선례도 판사가 오직 특정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해석할 때에야 비로소 현실적 의미를 가지듯, 기독교 서사의 사례 연구도 우리 자신의 문화적 지평을 매개로 이루어지며, 그 문화적 지평은 또한 그 서사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따라서 사회사와 지성사를 다루는 역사가들은 자신이 가진 자료의 해석을 암묵적으로 인도하는 이론적 가정들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명시해야 할 과제가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다음의 이론적 가정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첫째, 저자들은 우리의 인식론이,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가 개진한 진리의 환원주의적 모델에서 인간의 앎의 방식은 좀더 복잡하다는 개념을 발전시킨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으로 근본적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고려하면서 글을 썼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알래스 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폴 리쾨르(Paul Ricoeur)와 같은 철학자들은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자원을 인식의 합법적 방식에 포함시킴으로써 인간 이성의 좀더 넓은 스펙트럼을 회복했다. 이 책에 선별된 각 사람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공감적 이해는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역사의 배경들을 다룰 수 있게 해 준다. 장 라드리에르(Jean Ladrière) 가 『과학적 담론과 신앙의 언어』(Discours scientifique et parole de foi)에서 주장했듯, “설명”이라는 단어는 객관적 관찰에 기반한 단순한 묘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3) 라드리에르에 의하면, 설명은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네 가지 설명 방식을 포함할 수 있다. 우선, 종교적 정체성에 적용하여,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지도적 원칙에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포섭하는 역동적 과정을 설명해야 한다. 그에 더해, 기독교 정체성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 정체성과 교리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이 에세이 모음집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이전에 이미 세워진 기독교 정체성이 그 이후에 오는 정체성들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주어진 서사 전통 안에서 어떻게 고유한 혹은 반문화 적인 기독교 정체성들이 부상하는지 독자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과 묘사의 더 넓은 방식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표현한 그 정체성의 고유한 근원에서 작용하는 “신앙의 합리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둘째로, 이 책의 글들은 전근대에서 근대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인간성과 정체성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적 변화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쓰였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이러한 변화의 부 정적인 면과 긍정적인면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님의 성육신에 초점을 맞춘 교부 신학은 인간 자체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이 커지면서 그 논의의 바탕이 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서 있는 서구 기독교는 개인의 구원에 집착하게 되었다.”4)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속죄를 강조한 중세의 경건주의는 이와 같은 개인주의적 성향을 더 강화했으며, 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종교개혁 때 특히 루터파의 영성을 결정지었고, 그로 인해 개인의 양심을 강조하게 되었다.5) 따라서 신학 자체가 전반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는 근대의 경향에 기여했고, 이는 철학과 사회사에도 반영되었다. 물론 개인의 인간됨이라는 개념 자체는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히브리 전통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다.6)  그러나 특히 헤르더(Herder)에서 피히테(Fichte), 셸링(Schelling), 슐레겔(Schlegel) 등의 낭만주의 철학자들에서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특히 에릭 에릭슨(Erik Erikson)과 같은 현대의 심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기”(self)와 “정체성”(identity)이라는 개념을 현대 용어에 도입했다.7) 이 책에서 다루는 기독교 정체성이라는 주제와 특별히 관련이 있는 문제는 이미 칸트, 피히테, 미드(G. H. Mead) 등의 근대 사상가들이 논쟁했었다. 그 문제란, 고정된 핵심적 정체성으로서 에고(ego) 그리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존재 혹은 주체로서 자기(self)와의 관계다. 폴 리쾨르는 이 논쟁에 철학적으로 가장 미묘하고도 심오한 기여를 했는데, 서사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인 『시간과 이 야기』(Time and Narratvie)8 에서 시작된 이 논의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 (Oneself as Another)9 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리쾨르는 자기 됨(selfhood)의 해석학을 제시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리쾨르는 자기 정체성(self-identity, ipseity) 을 변화하는 역사적-사회적 요인들 간의 변증법으로 설명했는데, 거기에는 성격 형성(character formation, idem)도 포함된다. 그 변증법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과 궁극적 자기(ipse)를 동일시하고, 그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부과되는 윤리적 책임에 의해 결정된다. 이 윤리적 책임에 대한 강조는 리쾨르가 레비나스(Levinas)의 영향을 받았음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리쾨르의 자기 됨의 해석학은 데카르트와 관념주의 철학자들의 주관론적이고 에고 중심적인 틀을 없애 버린 레비나스와 하이데거가 제시한 두 극단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리쾨르는 레비나스가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윤리적 요구로서 타자를 너무나도 편파적으로 강조한 것에 반대하는데, 그는 레비나스가 제시한 자아와 타자의 대립을 두 가지 이유에서 거부한다. 첫째, 이와 같은 불균등한 관계는 타자의 말을 수용하는 자아를 설명하지 못한다. 수용을 하려면 공통된 반성의 구조에 기초한 수용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리쾨르는 주장한다. 둘째로 그는 레비나스가 오직 한 종류의 “타자”, 가르치는 주인으로서의 타자만 알고 있다고 우려한다. 만약 타자가 “노예를 필요로 하는 주인”이거나 “사형 집행인”이면 어떻게 되는가? 말하자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통한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비판적 분별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10) 


반면에 하이데거는 타자의 윤리적 요구를 통해 정체성을 과도하게 부담하게 한 레비나스의 관점을 피하려 하지만, 리쾨르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자아를 비인격화한다는 레비나스의 비판을 받아들인다. 하이데거는 개인의 세계 내 존재(being-in-the-world)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주체의 의식 이라는 잘못된 출발점으로부터 자기 됨에 대한 반성을 해방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가 곧 진정한 자기 됨—나중에 그는 이것을 자기 존재와의 결정적 관계라고 정의했다—으로의 부름이라고 “너무 성급하게 존재론적 용어로 표현한다.” 그럼으로써 하이데거는 정체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역인 인격-윤리의 영역을 잃어버렸다.11) 하이데거에게 자기 증명(self-attestation)은 더 이상 윤리적 명령과 상관이 없다.12) 반면에 리쾨르의 요점은, 관계적으로 남아 있으려면 (따라서 인간적이려면) 자기 됨은 이 윤리 영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윤리 영역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과 타자 모두를 초월하는 인격 영역, 신학을 향하게 하는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철학적 사고의 한계를 지키려 했던 리쾨르는 이 영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철학자는 철학자로서 명령의 근원인 이 타자가 내가 바라볼 수 있거나 나를 쳐다볼 수 있는 다른 사람인지, 아무런 재현도 남아 있지 않은 내 선조인지…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부재하시는 하나님인지, 혹은 빈 공간인지 알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다고 인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타자에 대한 이 아포리아 앞에서 철학적 담론은 끝이 난다.”13) 그러나 당연히 신학적 담론은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할 수 없고, 이 책에 소개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쓴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라이언 올슨(Ryan Olson)과 옌스 치머만(Jens Zimmermann)의 글은 리쾨르의 자기 됨의 해석학이 기독교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적절한지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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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역사 속에 나타난 기독교적 자아의 원천들



마지막으로, 고대 사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교 서사를 통해서 자기 됨의 기독교적 원천을 살펴보는 이 문화사 작업이 얼마나 시의적절 한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을 제시하며 이 서문을 마치고자 한다. 서구와 북미의 배경에서 살고 생각하는 우리는 현재 세속주의가 쇠퇴하고 그로 인해 인간 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있어서 종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상황이 도래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테일러 같은 문화철학자들뿐 아니라, 피터 버거(Peter Berger), 한스 요아스(Hans Joas), 호세 카사노바(José Casanova) 같은 사회학자들도 세속주의의 중심에 있는 “빼기 서사”—인간이 진보하면 종교는 죽는다—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상식도 아님을 보여 주었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세속 논리에 도덕적 영역이 빠져 있다는 인식을 표명하면서, 세속적·다원적 사회에서의 소통 윤리에 종교적 자원의 기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지하고, 비인간화의 가능성이 있는 유전공학의 발전과 인간 본성의 영적 영역을 전면 부인하는 자연주의적 환원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예컨대 유대-기독교의 신의 형상(imago Dei) 개념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종교적 개념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들은 이 책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종교 정체성 서사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한다. 이 책에서 논의하는 여러 인물들의 삶의 정체성에 소망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 준 초월적 근원이 “비합리적”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더 이상 쉽지도 타당하 지도 않다. 


진리 선언에 있어서 서사의 중요성을 회복한 포스트모던 이론은 일반적으로 초월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말을 아꼈고, 따라서 정체성을 지엽적 서사들에 국한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문화적 역할이나 습관으로 축소했다. 그러나 정체성 형성의 논리 자체가 초월성을 요구하는데, 정체성 형성에는 사회적 역할과 개인적 정체성이 어느 정도 극과 극에 설 필요가 있기 때문 이다. 마지막으로 판넨베르크를 다시 한번 인용하자면, “개인이 자기 정체화를 통해서 자기 존재가 사회적 정체성과 같거나 다르다고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순간은 단지 사회적 영향의 요인으로 축소될 수 없다.” 물론 개인이 더 이상 개인적 자기 됨을 전혀 원하지 않고, 따라서 그러한 인간됨을 포기 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권리를 확립한 서구 문화의 큰 업적 중 하나도 포기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하로부터의 수기』(Notes from the Underground)에서 인상 깊게 표현했듯, 개인의 정체성을 향한 씨름은(이것은 개인주의를 지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생물학으로 축소되는 것을 거부하고 유사 기계와 같이 예측 가능한 존재로 축소되는 것을 거부하는,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특징이다.14) 


나아가서, 정체성이 초월적 근원에서 비롯된다는 믿음과 기본적이고 의미 있는 초월적 실재의 영역이 있다는 믿음은 (비록 그 질서가 자연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이 역경을 극복하고 그럼으로써 지혜가 자라고 성숙해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과 세계가 제대로 매개되기 위해 서는 “기본적 신뢰”가 필요하다는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이 기본적 신뢰는 먼저 부모와 가족이 형성해 주는데, 개인적 성숙의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가족으로부터의 분리가 일어난 후에도 유지되어야 한다.15) 그리스도인의 경우, 주권적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적 돌봄에 대한 믿음은 이 기본적 신뢰가 역경과 고난 중에도 유지되게 해 준다. 이 신뢰는 무의미한 고난이 고귀한 의미로 변화되고 모든 것이 “고상하고 신성한 조화”를 이루는 차원으로 초월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도 도스토옙스키는 악의 구체적 실재를 부인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반 카라마조프를 통해 그와 같은 비기독교적 관점을 탁월하게 반박했다.16) 의미 있는 세계에서 개인의 기본적 신뢰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러한 지적 회피주의가 결코 아니며, 따라서 어떤 종교적 환상 속으로 유아적 퇴보를 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정의, 인류를 향한 사랑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환상의 세계로 도망치는 대신 실재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게 해 주는 비판적 현실주의를 가질 수 있고, 두려움이 아닌 현실적 소망과 확신으로 그 실재를 직면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들을 통해 이와 같은 현실을 대면하고픈 마음이 독자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문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가질 것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생애사 상황 속에서 종교를 통해 형성되는 정체성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도 흥미를 가질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관심 있는 평신도에서부터 문화사학자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누군가가 “나는 크리스티아노스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정체성에 대한 이와 같은 학제 간 연구는 리젠트 칼리지 (Regent College)의 정신으로 가장 잘 대변되는 독자들을 위해서 구상되었다. 그들은 바로 신학에 관심이 있고 폭넓은 교육을 받은 학제 간 연구와 관계가 있는 독자들이며, 자신의 기독교 전통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보다 넓은 지적이고 종종 세속적인 사회와 관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 책 혹은 이 책의 일부는 기독교와 문화 강좌, 정체성과 문화라는 학 제 간 연구의 모험에 나서는 모든 강좌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Chreˉmatisai te proˉtoˉs en Antiocheia tous matheˉtas Christianous.14 

2 헬라어로는 간단하게 “내가 그곳에 도달하면 나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Ignatius of Antioch: The Letters, Popular Patristics Series (Yonkers,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2013), pp. 70-71를 보라. 16 볼 만한 일이다. 

3 Jean Ladrière, Discours scientifique et parole de foi (Paris: Le Cerf, 1970).20 

4 Wolfhart Pannenberg, 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3), p. 12. 『인간학』(분도출판사). 5 같은 책, p. 13. 

6 이러한 영향의 철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Robert Spaemann, Personen: Versuche über den Unterschied zwischen “etwas” und “jemand” (Stuttgart: Klett-Cotta, 1996)를 보라. 신학적 (개신교) 설명에 대해서는 Helmut Thielicke, Being Human-Becoming Human: An Essay  에서 피히테(Fichte), 셸링(Schelling), 슐레겔(Schlegel) 등의 낭만주의 철학 자들에서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특히 에릭 에릭슨(Erik Erikson)in Christian Anthropology (Garden City, NT: Doubleday, 1984), 그리고 특히 에밀 브루너의 기포드 강연, Christianity and Civilization, 2 vols. (New York: Scriber’s Sons, 1948-1949) 를 보라. 가톨릭 관점에서 인간적 가치에 대한 유대-기독교의 영향을 좀더 일반적인 역사 평가로 풀어낸 작업은 Christopher Dawson, Religion and the Rise of Western Culture (New York: Doubldday, 1991)를 보라. 『서구 문화와 종교』(현대사상사). 

7 Pannenberg, Anthropologie, pp. 194-217를 보라. 

8 Paul Ricoeur, Time and Narrative, 3 vol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시 간과 이야기』(문학과지성사). 

9 Paul Ricoeur, Oneself as Another, trans. Kathleen Blame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타자로서 자기 자신』(동문선).22

10 같은 책, pp. 339-349. 

11 같은 책, p. 351. 

12 같은 책, p. 355. 

13 같은 책, p. 355.24 

14 Fyodor Dostoyevsky, Notes from the Underground, trans. Richard Pevear and Larissa Volohkonsky (New York: Vintage Classics, 1994), pp. 27-28. 『지하로부터의 수기』(민음사). 

15 Erik H. Erikson, Identity and the Life Cycle (New York: Norton, 1980), pp. 71-73. 

16 알료샤와의 대화에서 이반은 위대한 심문관 비유를 말하기에 앞서 “모든 고상한 조화”를 더 이 상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만약 아이들의 고난이 그 진리를 사기 위해 필요한 고난 의 합을 이루는 데 들어간다면, 나는 일찌감치 그 진리 전체가 그만한 값어치가 없다고 주장합니 다.” Fyodor Dostoyevsky, The Brothers Karamazov: A Novel in Four Parts with Epilogue, trans. Richard Pevear and Larissa Volokhonsky (New York: Farrar, Strauss & Giroux, 2002), p. 24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민음사) 





제임스 휴스턴(James M. Houston)

리젠트 칼리지의 초대 학장이자 영성신학 명예교수다. 영국 에든버러에서 선교사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지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옥스퍼드 하트퍼드 칼리지에서 개별 지도교수로 가르쳤다. 60년이 넘도록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수천에 이르는 이들의 멘토가 되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따뜻한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돋보이는 경력을 쌓아 성공을 꾀하기보다는 믿음의 길을 따랐고, 직업적 전망을 추구하기보다는 도덕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사유하고 존재하는 것을 중시한 그는,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기독교 영성을 되살린 학문적 성취, 리젠트 칼리지 설립에 정신적 기초를 마련한 업적, 방대한 학식과 빛나는 통찰력, 삶이 뒷받침된 철학적 사유로도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는 즐거운 망명자』 『멘토링 받는 삶』 『기도: 하나님과의 우정(이상 IVP) 등이 있다.


옌스 치머만(Jens Zimmermann)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있는 리젠트 칼리지의 J. I. 패커 석좌교수다. ‘캐나다 연구 위원’(Canada Research Chair, 2006-2016)이었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학술 연구 장학금을 받았으며, 현재는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 및 현대 유럽 사상 센터’(Center for Theology and Modern European Thought)의 객원 연구원이자 남아프리카 프리스테이트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기독교 전통의 신학적 인간론과 인격 개념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Incarnational Humanism: A Philosophy of Culture for the Church in the World 등이 있다.



IVP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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