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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이라는 여행의 이유(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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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혁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로저 올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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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 해,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꽁꽁 얼리며 산업 전반이 급작스레 위축됐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의 이동과 만남을 기반으로 삼는 여행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여행을 다니기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대리 만족이라도 하려는 듯 유명 작가들이 쓴 여행 에세이를 스테디셀러 목록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인간에게는 익숙한 세계를 떠나고픈 욕망과 낯섦이 풍기는 설렘에 대한 동경이 함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모든 여행 경험이 유쾌하고 보람차지는 않다. 에세이 작가로 유명한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 여행에서 반복되는 문제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그 현실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1)


기독교 출판계에서도 '신학은 고리타분하고 난해하다'는 불명예스러운 평판에서 벗어나고자 여행의 매력과 상품성을 활용하곤 한다. 그런데 미끼용으로 여행 이미지가 남용되는 만큼, 책을 펼칠 때의 기대와 책을 읽으며 느끼는 현실 사이의 괴리도 자주 경험한다.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IVP)라는 다소 뻣뻣한 제목으로 출간된 미국 신학자 로저 올슨(Roger E. Olson, 1952~)의 책 원제목도 <현대 신학의 여행 The Journey of Modern Theology>(2013)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국내 출판사가 말랑말랑하고 매력적인 원제목 대신 건조하고 평범한 제목을 붙여 놓다니.) 


이 책은 수많은 신학자와 신학 사조를 다양한 1차 문헌과 참고 자료를 활용해 967쪽에 걸쳐 소개·분석한 알찬 신학서다. 책의 가독성이 높은 것은 문고판이든 두꺼운 신학사 책이든 상관없이 어려운 교리를 맛깔나고 명료한 현대어로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꾼 올슨이 저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원제목에 나오는 '여행'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 책이 '쉬운 척, 친절한 척'하는 출판계 유행에 편승하려 한다는 선입견을 조심해야 한다. 그 대신 이 방대한 책이 어떤 의미에서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여행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2) 이와 유사하게 올슨도 현대 신학이라는 난해하고 논란 많은 대상을 이해하는 핵심 메타포로 '여행'을 선택한 것 같다.3) 실제 이 책은 여행이라는 메타포 덕분인지 현대 신학에 달라붙곤 하는 보수와 진보, 해석과 변혁, 심지어 정통과 이단이라는 논쟁적 맥락에 저자와 독자가 갇히지 않게 해 준다.


현대 신학의 종착지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고, 길을 가는 방식이 걷는 이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기에 신학자들이 가는 길이라도 그 여정은 모호함과 긴장으로 차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행이 일상적 경험에 가려진 삶의 참모습을 맛보게 해 주듯, 여행으로서 현대 신학은 근대 과학기술이나 옛 교리의 권위로만 세계를 해석할 때 접하지 못한 그 무엇에 접속하게 도와준다. 교리의 속성인 규범성·명료성의 관점으로 보자면 두리뭉실하다 하겠지만, 현대 신학에 이같이 접근할 때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가 그 좋은 머리와 글솜씨를 가지고 왜 그런 사상을 전개했는지 더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러한 공감과 여백의 시선으로 이전 세대 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그들의 성취와 실수를 통해 오늘의 현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그 속에 참여하는 지혜와 자세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정작 현대 신학이라는 여행을 떠날 때 당면하는 현실적 문제는, 그 주제가 너무 복잡하고 다루는 범위가 몹시 포괄적이라는 데 있다. 올슨은 그 쉽지 않은 여정의 안내자가 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19세기부터 21세기 초까지 아우르는 신학의 역사, 달리 말하면 책의 부제처럼 "자유주의신학의 재구성에서 포스트모던 해체까지" 과정을 차례차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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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명분 찾기: '현대성'이라는 화두


올슨의 저작은 한국어로 여러 권 번역됐지만, 한국 독자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은 오랜 벗 스탠리 그렌츠(Stanley Grenz, 1950~2005)와 공저한 <20세기 신학>(IVP)일 것이다.4) 북미의 두 젊은 신학자가 1992년에 선보인 이 책은 '초월과 내재'라는 틀로 현대 신학을 개관한다. 중세 신학까지 잘 지켜지던 초월과 내재의 조화가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파괴된 채 19세기까지 이어졌다면, 20세기 신학은 초월을 재건하거나 초월과 내재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비판이 뒤따랐지만 이 책은 대중적 사랑을 받았고, 특히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확고부동한 현대 신학 교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20년간 변화도 많았다. 굵직굵직한 저서를 연달아 내면서 올슨의 신학과 글쓰기는 원숙해졌고, 복음주의 신학계의 학문적 내공은 단단해졌으며, 21세기의 변화된 시대상은 이전 세기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그렌츠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상황들과 맞물리며 <20세기 신학>을 개정하려던 소박한 의도는 훨씬 복합적인 작업으로 확장됐다. 노련한 신학자 올슨은 몇몇 신학자를 추가하는 수준에서는 현대 신학의 '여행'이라 불릴 새로운 기획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이처럼 여행은 떠나려는데 막상 이를 현실화하기 녹록하지 않다면 박재영의 말에 귀 기울여 볼 만하다. "여행 준비의 기술 중 매우 중요한(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여행의 명분'을 만드는 일이다."5) <20세기 신학>과 차별화된 명분 찾기, 어쩌면 여기에 올슨의 새 작품의 운명이 달려 있었던 셈이다.


새 책의 서두에서 올슨은 '초월과 내재'라는 옛 명분이 현대 신학의 다양한 면모를 단순화하는 '끼워 맞추기식' 서술로 이어졌다고 인정한다. 그는 "현대 신학은 현대성이라는 문화적 정신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신학"6)이라고 재정의한 후, 현대성에 대한 신학적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19세기에서 21세기 초반에 이르는 기독교 사상사를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현대성이 전통적 신학에 던진 도전의 파장이 큰 만큼, 지성사적 맥락을 분석하는 올슨의 펜 끝도 더욱 날카롭고 정밀해져 있다.


올슨은 근대 유럽의 과학과 철학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현대성이 지금껏 전 세계 기독교에 다양한 방식과 강도로 영향을 끼쳐 온 만큼, '초월과 내재'라는 경직된 구도보다는 '여행'이라는 유동적이고 탄력적인 메타포를 가지고 현대 신학의 역동성과 다채로움을 충실히 담아내려 한다. 그 결과 <20세기 신학>에서 단 2개 장에 구겨 넣었던 19세기에 대한 소개가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4개 장으로 확대됐다. 이전에는 내재와 초월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는 현대 복음주의신학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면, 새 작품에서는 현대성에 반기를 든 포스트모던신학의 다채로운 모습과 함께 올슨이 인도하는 여행이 마무리된다.



예리하게 이야기 꾸미기: 선택과 집중을 통한 신학사 구성


여러 여행담을 듣고 또 들어서, 여행 이야기에 신물이 난 사람에게 어떻게 방금 다녀온 여행을 맛깔나게 소개할 수 있을까? 유명 잡지 편집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들려주는 팁. "예리해야 한다. 하나의 도시를 단 3개의 이미지로 단번에 요약해 내는 훈련을 하라."7) 그렇다면 현대 신학에 둔감해진 사람에게 그 매력을 맛보여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구절절 역사를 읊지 않기, 독자의 관심에 맞게 주제를 예리하게 선별하기, 현 시대의 고민에 맞게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꾸미기 등은 기본이 아닐까. 실제 좋은 평가를 받는 현대 신학사 책에는 한편으로는 '중요성'과 '적절성' 사이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의 흐름 전체를 조망하면서도 학계와 현장의 필요에 민감히 반응하는 저자의 지식과 직관이 빛나고 있다.


올슨은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기획하며 현대성에 대한 반응이란 관점에서 북미와 유럽의 여러 신학자와 신학 사조를 모으고 배치한다. 보통 신학사를 서술할 때 저자 자신의 배경이나 성향을 반영하듯 진보나 보수 중 특정 입장을 대변하거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자료를 선택하기가 쉽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편향된 신학사 서술을 지양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일례로 많은 신학 교재가 19세기 신학이라면 현대성에 대한 순응으로서 자유주의를 소개하는 데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올슨은 기독교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를 다루면서 곧이어 현대성에 대한 반발로서 19세기 미국 근본주의도 비중 있게 소개하고, 더 나아가 두 극단적 입장 사이에 서고자 했던 중재신학도 대서양 양쪽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를 현대성에 대한 신학적 대응의 양 측면으로 보는 지성사적 시야를 갖게 해 주는 점은 이 책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현대 신학사를 서술하는 올슨의 빼어난 안목은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두드러진다. 현대성에 대한 반발로서 21세기 포스트모던신학을 소개할 때 그는 기독교 전통의 특수성에 집중한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 )와, 기독교 전통마저 현대성과 함께 해체하려던 존 카푸토(John Caputo, 1940~ )라는 같은 해에 출생한 두 사상가를 연달아 배치한다. 또한, 신학에서 아름다움의 범주를 재발견했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나, 복음주의의 탈보수주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스탠리 그렌츠를 이 책에 새로 포함한 것은 보수적인 성향의 신학에서도 현대성에 반응하는 특징 있는 시도를 발굴하고 그 업적을 보다 큰 신학사적 맥락 속에서 공정히 평가하려는 의미 있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힘들어도 여행의 이유는 분명 있다


200년이 넘는 현대 신학의 역사를 책 한 권으로 둘러보는 여행 코스를 짜다 보니 내용이 선별적이고 때로는 설명이 불충분한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올슨이 소개하는 신학자들이 지나치게 미국과 독일어 사용권에 한정돼 있다든지, 현대 신학에 끼친 정교회 전통의 영향력은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영성과 예전과 신학의 재통합을 시도하거나, 고대와 중세의 신학적 존재론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현대성에 맞대응하는 신학자들(특별히 성공회 배경의 신학자들)이 지금 왕성하게 활동 중인데, 왜 굳이 해체에 집중했던 철학자 카푸토로 현대 신학의 여정을 마무리하는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이 책과 <20세기 신학>에 나오는 신학자와 자료가 상당히 겹친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복된 부분마저 올슨의 스토리 텔링 능력 덕분에 가독성 높게 변화했고, 각론과 각주에서 지난 20년 동안 있었던 신학계의 논의를 업데이트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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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는 지금껏 한국어로 출간된 현대 신학사 중 19세기를 가장 충실히 분석하면서, 20세기 신학 사조를 폭넓게 소개하고, 21세기 신학이 어떤 방향을 향하는지 가늠하게 해 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현대 신학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면서도, 그러한 사상이 형성된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넓은 시야로 관찰하기에, 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하거나 교양으로 신학을 공부할 때 이 책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물론 올슨이 취하는 신학사적 접근은 조직신학 책이나 교리서처럼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딱 부러지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행이 익숙함에 대한 집착과 선입견을 깨 주듯, 우리 믿음을 제약하던 시대적·문화적·지역적·교리주의적 틀은 여러 신학자가 걸어온 신학 여정에 동참함으로써 상대화할 수 있다.


김영하 작가가 잘 표현했듯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 가게 된다."8) 마찬가지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멋진 말이 허무해지지 않으려면,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라는 구호만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의 모험을 받아들일 용기와 개방성도 필요하다. 이러한 소중한 지혜를 배우는 것이 올슨과 함께 걷는 '여행의 이유'가 아닐까.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부교수




*이 글은 뉴스앤조이(2021년 2월 4일)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IVP 202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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