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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과학기술 그리고 기독교 신앙(정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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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대경 

『영생을 주는 소녀 1』김민석(지은이), 안정혜(그림)



*이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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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폭력과 과학 기술이 만나 상상도 못했던 판타지가 펼쳐진다



언제부터인지 스릴러 영화나 소설을 즐겨 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스릴러물을 보는 입맛이 까다로워져서 웬만한 수준의 작품은 성에 차지 않는다. <영생을 주는 소녀>(IVP) 서평을 써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정직하게 말하면 큰 기대가 없었다. 기독교적 내용을 모티브 삼아 만든 작품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탄탄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교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신학 내용,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지만 현재 논의되는 미래 과학기술의 바탕이 되는 장치 등은 몰입도를 높여 주기에 충분했다.


만화는 윤민후 목사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뒤에서 밝혀지지만, 이는 죽음이라기보다는 일시적 사회 격리다. 윤 목사는 한국인 목회자 중 내면이 뒤틀린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일 혹은 소명이라는 허울 아래, 그의 가정은 목회자의 야망과 열심을 위해 희생당한다. 희생양은 그의 아내와 딸 윤다라. 윤 목사의 아내는 작품 안에서 "정 사모"라고 언급될 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엄마와 나에겐 개인의 삶이란 게 없었다. 아빠의 바람이 곧 엄마와 나의 바람이었고, 아빠의 길이 곧 엄마와 나의 길이어야 했다.(33쪽

유학 시절 수강했던 '하나님과 인간의 고통'(God and Human Suffering)이라는 수업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악의 기원과 신의 존재를 다루는 일반적인 신정론 수업이었지만, 한 권의 책이 그 수업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재의 잠언들 Proverbs of Ashes>(Beacon Press)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두 명의 여성신학자, 리타 나카시마 브록(Rita Nakashima Brock)과 레베카 앤 파커(Rebecca Ann Parker)가 썼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성차별과 성폭력 사례들을 폭로하고, 그 이면에 깔린 신학적 이해를 다룬다.

충격적인 사례 중 하나는 미국 내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가정 폭력에 대처하는 모습이었다. 가정 폭력 피해 여성 중 그리스도인들은 가정 폭력을 받아 내기만 할 뿐, 가해자인 남편에게 저항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유가 무엇일까? 브록과 파커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 피해자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와 동일시하면서, 자신들이 당하는 폭력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의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의 폭력적인 남편을 구원할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가정 폭력을 묵묵히 받아 내게끔 했다는 것이다.

<영생을 주는 소녀> 속 정 사모 또한 그러한 인물이다. 남편인 윤 목사의 끊임없는 폭력과 도박 빚, 원로목사의 괴상한 정죄에도 그녀는 변명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그녀의 모습 속에 자기를 끊임없이 희생해야만 하는 게 소명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불편한 신학적 이해가 보인다.
 

'토브'라고 불러요. 인간이 변할 수 있게 해 주는 제품으로 개발 중이죠.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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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앞에 기술로 맞선 여성들, 그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대조적으로 정 사모의 딸, 작품의 주인공인 윤다라는 엄마와 다르다. 윤다라 또한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정의 피해자지만,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윤다라는 어머니와 다르게 자신만의 삶을 설계한다. 그녀는 아버지 윤 목사의 반대에도 IT/의료 기업 '에붐'에 입사한다.

흥미로운 점은 생전에 윤 목사가 기독교 신앙을 이유로 이 기업을 반기독교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을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했다는 데 있다. 과학기술과 기독교 신앙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았기에 윤 목사는 이 기업을 악마적이라고 규정했을까?

'에붐'의 대표이사 이도연은 과학기술을 통한 인간 변화를 꿈꾼다. 그녀는 대학 시절 윤 목사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윤다라를 직접 채용한다. 왜 그랬을까? 이도연과 윤다라 모두 각각 성폭력과 가정 폭력의 피해자다. 사회는 피해자들을 대변해 주지 않고, 도리어 가해자들 편에 서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보호했다. 이런 사회 안에서 그들이 꿈꾸는 것은 단 하나,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으며, 자신들의 행동을 뉘우치고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 당연한 바람이고,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처사임에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이들은 과학기술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도연과 윤다라가 구현하고자 하는 기술은 마인드 업로딩과 다운로딩이다. 폭력의 가해자들은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자신들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아픔과 슬픔, 두려움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들의 두뇌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공감하는 뉴런을 활성화시켜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의 두려움을 공감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행동의 변화를 꾀한다. 상상에 의한 내용 전개지만, 이 안에는 현재 심리철학과 트랜스휴머니즘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내용이 녹아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까지 담아냈다.

만화를 보면서 독자들은 질문하게 된다. 인간은 창세기 1장이 기록하듯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이 보여 주듯 악한 존재인가? 그도 아니면,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모호한 존재인가? 과학기술은 그것 자체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하나의 도구로 이해될 수 있는가?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작업은 신앙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

이도연과 윤다라는 비록 실존적 인간에 악한 요소들이 내재해 있지만, 과학기술을 통해 해당 부분들을 조정한다면, 인간 속의 선한 요소들만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 '토브'를 그들의 프로젝트명으로 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 한다. (자세한 여정은 책에서 확인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과학기술을 좀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인간 스스로 대신할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겁니다. (210쪽)

이 작품에는 또 다른 주인공 장지오 목사가 등장한다. 그녀는 기독교의 타락 교리가 묘사하는 인간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선함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인물이다. 장 목사에게 이도연과 윤다라의 시도는 그것 자체로 하나님 섭리에 반하며, 신성모독적 행위다. "인간의 힘으로 선한 세상을 만들려는 시도",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향상시키려는 시도는 악마적이고 "바벨탑을 쌓는" 행위다. 장 목사는 이러한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촉구한다.

만화 속 장지오, 이도연, 윤다라의 대립은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트랜스-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을 연상케 한다. 트랜스-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한계, 곧 노화, 질병을 과학기술을 통해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다. 이와 더불어, 신체적‧도덕적 능력을 향상시켜 인간 사회에 이상적인 상태를 구현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가능한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적어도 이러한 담론이 오가는 상황에서 <영생을 주는 소녀>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과학기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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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장지오의 편에서 모든 과학기술을 반대할 것인가, 아니면 이도연과 윤다라의 편에서 과학기술을 하나님 섭리로 받아들이고, 추구할 것인가? 시즌2는 이에 대해 어떤 답을 줄까? 독자인 우리의 생각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좋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좋은 만화다.



정대경 

숭실대학교 조교수, 교목. 어린 시절 접했던 진화 과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잃어버렸다가, 회심 체험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을 거쳐,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조직신학과 과학신학을 전공하면서 신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해 왔다. 현재 숭실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양과목과 교목 사역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과 실재성을 변증하고 있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2020년 8월 27일)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IVP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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