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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었다, 멈추어야 하므로(민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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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민경식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일레인 스토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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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파스타'를 우연한 계기로 다시 보았다. 2010년 당시 꽤 유명했던 이 드라마는 '남자 버럭 셰프'와 'No.9 여자 요리사'의 사랑과 성장 과정을 다뤘다. 10년 전, 시도 때도 없이 소리 지르면서도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내던, 츤데레 매력까지 보유한 '버럭 셰프' 캐릭터는 큰 사랑을 받았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형 여성 캐릭터가 대세이던 시절이니 여자 주인공도 대세를 그대로 답습해 전형적이었다.

지난날 여성에게 배신당한 개인적 경험을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는 선포와 함께 공적 공간까지 끌어들인 셰프, 여성들은 순식간에 해고당한다. 여주인공은 버티고 견뎌 결국 사랑과 요리 실력을 모두 얻지만, 셀 수 없을 만큼 호통에 노출되고 폭언과 무시를 당하는 설정. 심지어 여주인공은 셰프에게 자신을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에 비유하며 '잡은 물고기라고 함부로 하지 말라'며 남성에게 종속되어 그의 처분에 따라 자신의 처지가 결정됨을 자연스럽게 인정한다.

당시에는 '버럭 셰프'의 호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데, 왜 지금은 불편한 감정을 잔뜩 안고 이 드라마를 보고 있을까. 시대가 바뀌어서? 나의 인식에 변화를 준 가장 큰 요인은 그동안 접해 온 문화(영화, 책 등)에 있다.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IVP)은 그동안 접했던 어떤 책보다 충격이 컸다. 인식의 변화에 가속을 일으킬 만큼.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이 3남매 중 막내아들이었던 나의 삶을 누나들 시각으로 돌아보게 했다면, 이 책은 남자로서 '나'는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되어도 온당하겠다는 생각에 닿게 만들 정도였다.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저자 일레인 스토키는 영국 성공회 총회에서 28년간 일하면서 여성들을 위한 많은 변화를 이끈 사람이다. 2016년 '아브라함 카이퍼 상'을 수상한 신학자이자 사회학자, 철학자, 작가로서 30년간 정의와 젠더 이슈를 지지해 왔고 적극 활동해 왔다. 그의 이력을 마주하며 왜 그가 책을 사례와 통계 중심으로 서술했는지 이해가 갔다.

오랜 시간 여성 폭력의 현실을 마주한 저자는 다른 장르를 빌리기보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길을 택했다. 어떤 수사보다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광범위하게 자행되는 여성 폭력의 실상이 그만큼 참혹하기 때문이고, 가공한 현실은 관찰자의 성향이나 지위에 따라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은 경험하지 못한 영역에서 편협하게 작동한다. 보고 듣고 경험한 부분에서 오는 공감과 연대는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책이 소중하다. 1장부터 9장까지는 사례와 통계들로 채워진다. 성 감별 낙태와 영아 살해, 성기 훼손, 명예 살인, 가정 폭력, 인신매매와 성매매 등을 가감 없이 다루며, 전 세계에 걸쳐 벌어지고 있는 이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앞부분을 읽다가 책을 여러 번 덮었다. '마주하라'는 저자의 요청에 응답하고 싶어 용기를 냈음에도, 수월한 전진이 어려운 책인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전진이 어렵다고 회피할 일인가. 폭력이 계속되고 있는데?

"사실상 매일 매 순간, 어디에선가는 가정 폭력, 강간, 명예 살인, 성폭력, 성희롱, 염산 공격, 신부 불태우기, 여성 살해, 신체 훼손, 인신매매를 통한 성매매 등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23쪽)

그러나 개혁은 여전히 느리다


이 책에서 여성 폭력의 사례와 통계, 법 제정을 말할 때, 유난히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된다. '대부분의 차별 혹은 폭력 방조에 관한 조항들이 폐지되고 있다. - 그럼에도 개혁은 여전히 느리다.' 이 두 문장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이 지금도 억압과 폭력에 무너져 가고 있을까.

여성 폭력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 인식이 개혁에 가속도가 붙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개혁이 여전히 느리고 완만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니, 현재 진행형인 이 참상들에 마음도 머리도 쉽사리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재건의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인식은 안전한가

책에서 소개하는 설문 조사를 접하며 좌절했다. 5장에서 다루는 (명칭부터 불합리한) '명예 살인'에 관해 2013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한 연구자가 진행한 설문이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사는 10대의 1/3 이상이 '명예 살인'을 지지한다고 설문에 답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과 여성의 20퍼센트는 가족에게 '불명예'나 수치를 가져온 딸이나 자매나 아내를 죽이는 것은 정당한 처벌이라고 생각했다."(123쪽)

이 설문 조사를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가 접한다면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낄까. "세계 모든 지역에서 여성과 여아는 피해자가 된다"(170쪽)는 인식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우리 대부분은 또 다른 간접 가해자로 존재하게 될지 모른다. 책을 읽을수록 내 인식의 한계와 천박함을 곱씹게 되었다. 우리 인식이 피해자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을 주고 폭력에 가까운 무언가라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이 책에서 등장하는 사례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중동 등에 집중되어 있다. 한국의 사례는 한 부분 등장하는데, 9장 '전쟁과 성폭력'에서 한국의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여성의 성을 군대의 소모품으로 착취하는 대표 사례인 위안부 문제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도 미완의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피해 생존자들은 이 사건을 "20세기의 가장 큰 인신매매 사건 중 하나"라고 칭했다(233쪽).

일레인 스토키는 2013년 직접 한국을 방문해 몇몇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만났다. "80대 노인인 이들은 아직도 오랜 폭력으로 인한 물리적 피폐함과 씨름하고 있었고, 삶을 이어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했다. 이들 몸에는 아직 상처가 남아 있었다."(234쪽) 당시 스토키는 젊은 일본 여성과 함께 할머니들을 만났는데,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은 이 일본 여성은 "전혀 몰랐어요. 아무도 말을 안 해 줬어요"(234쪽)라고 말했다.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일본의 폭력적 태도로 할머니들이 여전히 피폐함과 씨름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민다. 왜 여전히 우리는 이 명확한 범죄를 논란거리, 정쟁의 대상으로밖에 다룰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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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상처, 여성 폭력


기독교는피해자의 내부자 될 수 있을까

뉴스나 전해 듣는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아픔을 접할 때, 그저 순간의 안타까운 감정만 느끼고 잊어버리는 일의 '무의미'를 생각한다.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자기 위안 내지 나 자신이 아픔 제공자는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살았다. 이 책은 여성 폭력 문제를 더는 제3자의 시선으로 보지 말라고 촉구한다. 고통스러운 내부자로 이 문제에 같이 참전하기를 요청한다. 그래서 더 독서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내 무관심한 시선도 누군가에게 폭력적으로 닿지는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 때문에 더더욱.

그리스도인으로서 스토키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여성 폭력을 바라보며 이 책을 마무리한다. 기독교가 지닌 가부장적 얼굴, 성경 속 공포 텍스트와 폭력적 성경 해석을 언급하고, 기독교와 여성 혐오 사이의 회복적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죄로 종결되지 않는 기독교의 본성을 희망으로 제시하며, "기독교의 많은 운동은 구원하는 사랑의 효과와 도전을 보여 준다"(366쪽)는 점도 희망적이라고 본다. 지난한 남성 우월주의 문화 속에 여성 폭력과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제시"(369쪽)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희망의 증거를 발견하려는 스토키의 노력에 공감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떠올리며 느껴지는 이질감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교회 밖에서 피해자들의 내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교회의 공적 역할에 도움이 필요한 소수자들을 위한 공간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은 책의 대부분을 사례와 통계, 이론적 한계와 문제점을 언급하는 데 할애한다. 마지막 13장에 가서 '희망'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만, 이마저도 앞부분은 대부분 여성 혐오와 뗄 수 없는 기독교의 관계성에 대한 서술이다. 여성 폭력에 대한 참상을 책으로 만들면서 희망적인 이야기를 몇 문단으로밖에 할 수 없는 점이 그 자체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 안타까웠다.

지금도 어디선가 폭력에 처참히 무너져 내리고 있을 여성을 떠올린다. 참상을 안다고, 책으로 읽는다고 당장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의 사례들을 꼼꼼히 읽어 나간 것은 '함께하고 싶다'는 설익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 책으로 적어도 두서없이 어지럽던 여성 폭력에 관한 개념들이 정리되기 시작했고, 내 인식 속 여성 폭력의 범위가 확대되는 경험을 했다. 이것은 모두의 일이고, 모두의 문제라는 사실도 배웠다. 더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으려 한다. 우리의 연대가 멈추지 않아야, 여성 폭력의 역사가 과거형으로만 존재할 날이 오지 않을까.

"폭력을 멈추는 게 시급하다. 인류에게 그어진 상흔이 깊다. 이제는 치유와 회복적 정의를 위한 일에 동참할 때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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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식 

IVP 마케터



*이 글은 뉴스앤조이(2020년 8월 27일)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IVP 20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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