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종교의 대화에서 찾는, 시대에 적합한 기독교 메시지를 위한 틸리히의 제안(안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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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규식
책 <문화의 신학> 폴 틸리히 지음
IVP 모던 클래식스 17
역설을 통해 위로를 주는 신학자, 틸리
내가 폴 틸리히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이래저래 많이 힘들 때였다. 당시 가장 큰 버거움은 내가 공부하는 기독교 신학이 세상은커녕 신학을 공부하는 나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할 때였다. 하나님에 대한 말이 무성할수록 내면의 공허함과 괴리는 더 커졌고, 내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기독교 안에서 찾고자 했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침묵뿐이었다. 그때, 우연히 틸리히의 설교집을 집어 읽게 되었다. 틸리히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와서 자신은 기독교 교회와 그 토대로부터 소외되었고, 성령의 능력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며, 영적 지식도 전혀 갖고 있지 않지만, 거듭 신학적인 질문, 즉 궁극적 관심과 그것이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서 드러나는 것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신학자로 인정해야 합니다.”(폴 틸리히, 김광남 역, 『흔들리는 터전』, p. 214, 뉴라이프, 2008)
그의 말에 따르면 난 이미 신학자였다. 그렇게 용기를 얻어 단숨에 틸리히의 설교집 세 권을 연달아 읽었고, 이후로 틸리히를 공부하면서 그가 설명하는 신학에 깊이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틸리히는 나에게 위로의 신학자가 되었다. 이런 틸리히의 위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인간의 어두운 부정적 경험들--틸리히는 이를 ‘실존’이라는 말로 표현한다--안에서, 그리고 깨어진 세상의 균열의 틈새에서 ‘새로운 존재’의 빛을 보여 줄 때였다. 그의 위로는 인간의 고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의 대답은 인간의 실존적 질문이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 역설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처럼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인 틸리히의 신학은 대표적인 그의 신학 방법론이라 할 ‘상관관계 방법론(method of correlation)’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상관관계 방법론을 내 나름대로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질문 안에 이미 대답이 있고, 대답 안에 이미 질문이 있다. 따라서 진정한 답은 이 둘 사이의 대화와 역설의 변증법적 구조 안에 신비로 자리 잡는다.’ 물론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 적 없지만 나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그의 저서들을 읽다 보면 내가 하는 말에 동의할 것이다. 원래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상관관계의 방법은 물음과 대답, 상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존과 신의 현현을 상관시키려는 방법이다”(폴 틸리히, 유장환 역, 『폴 틸리히 조직신학Ⅰ』, p. 21, 한들출판사, 2001).
『문화의 신학』을 이해하는 세 가지 틀
이러한 틸리히의 신학 방법론이 잘 드러난 책이 바로 『문화의 신학』(폴 틸리히, 남성민 역, IVP, 2018)이다. 원래 이 책은 틸리히의 주요 관심사였던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책으로, 그가 한 강연의 원고들을 하나로 엮은 책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틸리히가 생각하는 문화와 종교의 관계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각 장에서 설명해 주는 종교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주제들, 예컨대, 실존철학, 현대물리학, 정신분석학, 예술 등에 관한 내용들은 틸리히가 구상했던 그 관계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틀이 필요하다.
첫 번째 틀은 앞서 이야기한 상관관계 방법론이다. 그의 방법론으로 볼 때, 문화는 질문이 되고, 종교는 대답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실존적인 질문들--불안, 죽음, 무의미, 죄책 등--을 문화라는 질문으로 제기하고, 종교는 그 답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단순한 질문과 답의 관계가 아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이해하도록 연결해 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여기서 두 번째 틀이 필요하다.
두 번째 틀은 바로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이다. 궁극적 관심이란 틸리히가 종교를 정의할 때 쓰는 개념인데, 그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 정신의 전체에 있는 깊이의 측면이다”(『문화의 신학』, p. 22). 따라서 인간의 모든 문화와 정신 활동은 종교 즉 궁극적 관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 정신의 저변에 깔린 종교라는 심층을 보지 않고서 인간의 정신문화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문화라는 질문 안에 종교라는 답이 ‘이미’ 주어져 있는 이유는 그 질문을 가져온 이유가 바로 그것의 대답 즉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으로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된다.
그래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향한 질문인 문화와 그 대답인 종교를 질문 따로 답 따로 분리해서 보면 안 된다. 이미 문화 안에 종교가 있고, 종교는 문화를 통해 그 내용을 드러낸다. 이것이 세 번째 틀인 틸리히의 문화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명제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문화의 신학』, p. 63). 결국, 이러한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자세히 밝혀냄으로써 인간의 문화가 종교와 분리된 것이 아니고, 또한 분리되어서도 안 되며, 문화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들과 기독교 메시지의 ‘상호 의존적’ 관계--결코 정답 하나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는 관계--에서 그 시대에 적합하고 유의미한 기독교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페리코레시스
틸리히의 문화와 종교의 관점을 나름 이렇게 적용해 보았다. 얼마 전 본방사수하면서 보았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tvN)의 마지막 회를 아내와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드라마에서 친구들이 밴드로 뭉쳐 함께 노래하는 장면이 가장 좋더라.” 극 중에서 다섯 명의 주인공이 작은 밴드를 구성해서 함께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사실, 나의 아내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 장면을 보고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 장면이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단지 우정의 밴드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이었을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오시면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장면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가장 멋진 예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밀한 하나 됨과 교제에서 흘러나오는 온전한 사랑의 모습--기독교 신학 용어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고도 한다--을 보여 주는 예다. 마치 호흡이 아주 잘 맞는 밴드 같다. 성자께서 반주하시고, 성부께서 노래하시는, 성령의 아름다운 멜로디. 그리고 그 본질은 바로 하나 됨에서 오는 그 따뜻한 사랑과 충만한 기쁨,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서로를 품는 위로다. 예수의 구원 사역은 바로 이 성스러운 연합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 역시 이러한 관계와 공동체를 간절히 열망하고 이를 문화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매 회마다 밴드가 노래하는 장면이 등장해서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 되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 된다.
여기까지만 이해하면 틸리히의 메시지의 절반 정도이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질문 안에 답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답 안에 질문 역시 감추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그 드라마로 돌아가면, 왜 우리는 이러한 친밀한 관계와 공동체를 갈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유한한 실존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의 실존적인 상태는 바로 ‘소외’다(틸리히는 인간의 타락 상태를 소외라는 용어로 풀어낸다). 인간은 하나님, 피조 세계, 타인, 심지어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채 분리되어 살아간다. 영원한 생명과 사랑에서 분리된 인간은 죽음과 외로움을 경험한다. 진실한 관계에서 끊어진 인간은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근원적인 목적을 상실하고 서로를--심지어 자기 자신을--용납하지 못하는 인간은 무의미함과 죄책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이렇게 인간 안에 감추어진 실존적인 질문들은 친밀한 관계와 사랑, 용납과 생명의 관계를 갈망하는 가운데 이를 종교의 형식 즉 문화로 드러내는 것이다. 앞서 말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단순한 왕위 대관식이 아닌 소외된 인간 실존을 향한 삼위일체의 공동체적 하나님이 제시하는 구원의 복음인 것이다.
‘답정너’의 기독교가 아닌 대화하는 기독교로
『문화의 신학』이 한국 교회의 상황에 던져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학이 가진 한계 중 하나는 자신들이 이미 답을 가졌다는 ‘답정너’의 태도이다. 답을 이미 가졌다 착각하기에 세상과 대화하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세상에 부끄럼 없이 내놓는 답은 오답과 답답이다. 이런 교회의 현상은 오늘날뿐 아니라 틸리히의 시대에도 그러했다. 틸리히는 자신을 절대화하고 신격화할 수 있는 ‘마성’을 지닌 기독교 교회를 향해 답을 주려고 하기 이전에 질문 즉 문화에 먼저 겸손히 귀를 기울여 보라고 요청한다. 궁극적 관심이 인간 정신문화의 토대를 이미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질문을 경청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메시지 역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동시에 문화 없이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그 시대에 적합하게 전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질문인 문화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기독교 복음과 대화하면서 그 안에서 인간의 실존적 질문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신학과 내용을 단지 답으로만 본다면 그 메시지는 시대에 적합하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못하며 교회와 세상에 구원의 힘을 전해 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독교 전통에 대해 충실하게 성찰해야 하고, 그 전통과 오늘날의 문화 사이에서 오는 차이를 정직하게 직시함으로써 그것을 오늘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작업이 선행될 때 기독교 메시지는 교회와 세상의 구원과 변혁에 능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적어도 틸리히의 『문화의 신학』을 읽고 나면 틸리히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문화와 종교 이 둘 사이의 대화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안규식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이며, 서대문구에서 부목사로 일하면서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작성 중에 있다. 공역한 책으로 『신학의 역동성』(대한기독교서회, 2019)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