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 서평

힘의 불균형 그리고 여성에 대한 폭력(양혜원)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링크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본문


글 ​양혜원(역자)

일레인 스토키,『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6cd02c505cfd763a4aa2bffd41f45889_1599784174_94.jpg




번역하는 동안에는 별로 못 느꼈는데 출판된 번역서를 받아 들고 보니 생각보다 부피가 크다. 이 두께의 내용이 전부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혹은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의 원서는 제목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이라고 표현하고 본문에서는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이라고 하는데, 이 두 가지는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말 그대로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이 당하는 폭력이다. 그 반면, 젠더 기반 폭력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이 당하는 여러 폭력 중 특별히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 즉 젠더간 불평등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폭력이다. 여성 다수가 젠더간 불평등한 관계 때문에 여러 폭력을 당하는 것이다.

 

다만 둘 사이에 중요한 차이를 짚자면,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이성애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에서 여성이 당하는 폭력을 주로 일컫는 반면, 젠더 기반 폭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젠더간 불평등한 관계가 유발하는 폭력을 말한다. 그래서 생물학적 여성만이 아니라 젠더 정체성이 여성인 사람 혹은 성소수자 심지어 남성에 대한 폭력도 이 안에서 논할 수 있다. 가정 폭력을 다루는 이 책 6장을 보면 드물게 일어나기는 하지만 남편이 아내로부터 당하는 폭력도 언급하는데,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하면 이러한 폭력은 포함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요즘은 여성에 대한 폭력보다는 젠더 기반 폭력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책의 차례만 주욱 훑어보면, ‘특별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성감별 낙태는 우리 일상에서 들어 본 적이 있을지 몰라도 그 외에 연관 있는 내용은 6장의 가정 폭력 정도이고, 나머지 폭력은 아직도 이런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리 가까이에서 보거나 듣기 힘든 내용들이다. 물론 인신매매와 성매매는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인신매매의 경우는 1980-1990년대에는 뉴스에도 나곤 했지만 지금은 거의 접하기 힘들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일들과 별 상관이 없이 살기 때문에 자기 문제처럼 와닿지 않을 것이다. 성감별 낙태의 경우 한때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고 그때 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그러한 낙태를 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해마다 출산율이 최저치를 갱신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것 또한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영국 백인 복음주의 여성인 저자는 이 문제가 어떻게 피부로 와닿아서 이처럼 글로벌한 스케일의 책을 쓴 것일까? 먼저 그 이야기부터 풀어 가면서 우리의 맥락과 연결시켜 보도록 하겠다.

 


문화 정체성과 성통제


영국은 아프리카 일부와 인도를 비롯해 여러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이고 이 나라들의 독립 후 이전 식민지의 많은 주민이 영국으로 이주를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영국에 살러 갔을 때 내가 처음 살았던 집도 원래 파키스탄 사람들이 살던 집이었고, 학교에서도 파키스탄이나 인도에서 온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1980년에 내가 처음 간 학교에는 타인종 중에서는 흑인이나 아시아계 학생보다 인도나 파키스탄계 학생들이 더 많았다. 이렇게 영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 한인 타운을 만들고 자기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에 살면서도 자기 나라의 음식을 먹고 자기 나라의 문화를 지키려 한다. (내가 영국에서 처음 살았던 집에는 집 전체에 진한 카레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3장과 5장에 나오는 여성의 성기 훼손이나 명예 살인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다. 여성의 성통제가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통제란 단지 보수적인 성적 순결주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지켜가는 데에 있어서 여성이 하는 모든 일요리, 옷차림, 결혼 문화, 절기 지키기 등등을 일컬을 수 있다. 이를 전문 용어로 문화의 담지자라고 하는데,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에게 특별히 그 역할이 부과되었고, 타문화 및 타인종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그룹의 여성들에게 그 역할을 강조한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 백인이나 흑인 며느리나 사위 맞는 것을 꺼리고 그래서 한국에서 배우자를 찾아 데려오려는 것도 그러한 이치다. 특히 사위보다 며느리를 한국에서 많이 데려오는데, 자기 아들은 미국에서 출세시켜도 며느리는 미국 물 먹지 않은 참한 여자를 데려다가 혈통과 전통을 이어가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영국에서 잠시 공부할 때 일이다. 말레이시아에서 네 살에 이민을 온 여자 대학원생을 기숙사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영국 백인 남자를 사귀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이를 탐탁치 않아 하셨고 그래서 부모님 집에 다니러 갈 때면 일부러 밖에 나가지 못하게 집안일을 잔뜩 시키곤 한다고 했다. 이것이 폭력적 양상으로 발전하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명예 살인과 같은 사건들이 될 것이고 (그녀의 부모님이 그랬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많은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영국에서 그러한 일을 이웃에서 목격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스토키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백인 집단이 아닌 타인종·타문화 집단에서 일어나는 젠더 기반 폭력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식민지를 가졌던 제국의 시민으로서 식민지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완전히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73쪽부터 나오는 케냐의 사례에서도 보듯, 백인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은 여성 성기 훼손을 둘러싸고 일찍부터 소위 문화적 충돌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특별히 스토키가 종교와 여성에 대한 챕터를 쓴 이유는 우선 여기에서 다루는 많은 폭력들이 이슬람 기반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일들을 폭력이 아닌 전통이나 문화의 일부라고 옹호하는 배경에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스토키는 이슬람 자체를 문제가 있는 종교로 만들지 않으면서 그 문화의 젠더 기반 폭력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이슬람 내부의 논의들, 특히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이슬람 페미니즘은 한국에 소개된 바가 내가 알기로 없는데 나의 최근 저서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비아토르)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페미니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조앤 스콧(Joan Scott)과 같은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는 스토키와 같은 백인 복음주의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들과 손잡고 이슬람 사회의 젠더 기반 폭력 이슈를 제기하는 것을 또 다른 형태의 문화 제국주의로 보기도 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종교와 여성 혹은 종교와 페미니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토키는 가정 폭력, 성매매, 강간을 다루는 챕터에서 백인 사회의 사례들도 두루 다룸으로써 문화적 균형을 유지하려 하고, 복음을 변호하면서도 기독교 내부의 문제 또한 지적함으로써 종교적 균형 또한 유지한다.

 


결국 문제의 뿌리는 같다


한편, 문화를 매개로 하는 젠더 기반 폭력에서 성 자체에 좀더 초점을 맞춘다면 9장에서 다루는 전쟁 중에 일어나는 성폭력 혹은 강간 문제가 될 것이다. 성통제는 혈통 통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상대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적의 여성을 강간하기도 하고, 그렇게 적의 침입을 받은 여성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배신자의 낙인을 안게 된다. 여성의 성은 자기 집단의 응집성을 위해서 이용되기도 해서, 적군 혹은 타민족과 섹스를 하는 여성은 종종 배신의 기호로 사용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에서 짧게나마 다룬 한국 위안부문제는 그가 좀더 집중해서 다룬 아프리카의 사례들과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결국 문제의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위안부문제는 크게 민족주의 진영과 젠더 진영으로 나뉘었는데, 민족주의 진영은 여전히 여성의 성을 집단 내 응집성을 위해 활용하기 때문에 젠더 진영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 관점은 위안부이슈를 특별히 일본과의 대립 관계에서 보고, 젠더 기반 폭력이라고 하는 더 넓은 관점에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부문제가 어떻게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MeToo)과 같은 직장내 성폭력 고발 운동과 그 뿌리를 같이하는지 간과한다. 그러나 젠더 기반 폭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모두 젠더에 기반을 두고 있는 폭력의 서로 다른 종류들일 뿐, 결국 가부장제하에서 젠더간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같은 범주의 폭력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자신의 민족적 범주를 넘어서 자기 문화건 타문화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 혹은 젠더 기반 폭력을 기반으로 서로 연대할 수 있는가? 스토키는 그렇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에 여러 종류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젠더 기반 폭력이라는 범주 아래서 함께 다룬다. 그러나 과연 한국 여성과 일본 여성이 단지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국적을 불문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그래서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문제 역시 종교와 페미니즘 문제만큼이나 복잡하다. 민족 정체성의 구성에는 그 민족의 종교문화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을 생각할 때 (예를 들어,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고 그렇게 하나의 민족으로 호명된다) 그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특별히 섹스를 매개로 하지 않는 폭력은 아동 강제 결혼을 제외하면 가정 폭력인데 마찬가지로 젠더 기반 폭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폭력과 가정 폭력은 별개의 폭력이 아닌 같은 뿌리를 가진 폭력이다. 게다가 가정 폭력이 부부간 강간이나 성폭력과 연계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두 젠더 기반 폭력이 된다.

 



6cd02c505cfd763a4aa2bffd41f45889_1599784585_47.jpg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이것을 알아야 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젠더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문제를 이해하던 방식에 새로운 관점을 더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젠더 관계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젠더 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여기에서 밝혀진 폭력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처벌 대상이 되지 않던 폭력이고, 젠더 관점은 그것이 왜 어떻게 법적 제재와 처벌이 필요한 폭력 행위가 되는지를 밝혀냈다.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폭력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성폭력 문제의 뿌리가 궁금하다면 그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그 안에도 차이가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폭력을 당하는 절대 다수가 여성이라고 해서 여성 전부가 똑같은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 젠더 기반 폭력이라고 해서 개인차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민족 간, 인종 간의 차이, 그리고 종교 간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자는 자주 갈 길이 멀다는 표현을 쓰는데, 책에서도 보여 주듯 이러한 폭력을 처벌이 필요한 젠더 기반 폭력으로 보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인종 차별, 문화 차별, 종교 차별 등의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 이주민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이주 여성이 한국인 남편/남성에게 폭력을 당할 때나 한국 여성이 이주 남편/남성에게 폭력을 당할 때는 물론이고 이주민 가정이나 부부 사이에서 젠더 기반 폭력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아직 대중적 대화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이 문제를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양혜원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수년간 기독교 서적 전문 번역가로 일했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를 수료했으며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유진 피터슨 읽기(IVP),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 가다』『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이상 비아토르)가 있고,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IVP)사랑하며 춤추라(신앙과 지성사)를 공저했다




IVP 2020-09-11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