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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경계를 넘나드는 하나님의 은혜

본문

경계를 넘나드는 하나님의 은혜(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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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중심이었던 1장과 달리 2장은 이야기 중심이다. 그 이야기의 인간 주인공은 가나안 창녀라합이다. 성경에서 가장 군사적이고 가장 인종주의적인 느낌을 주는 여호수아서가 이스라엘 남자 군인 여호수아의 대화들과 더불어 변두리 삶을 사는 가나안 여성 라합의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1 또한 이스라엘 남성들의 실패했던 정탐 군사 작전이 그나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아는 가나안 여성의 도움 덕분이었다. 정탐꾼들은 라합 덕분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으며 2장 마지막에서 그들이 보고하는 내용은 라합의 말 그대로였다(24절과 9절을 비교해 보라).

 

이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상황이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지는 계기가 되는 역설을 본다. 또한 이방 여인의 거짓말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의 목숨이 유지되는 역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역설들의 심층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진정 정탐꾼들의 목숨을 구원한 것은 라합으로 하여금 그들을 선대해야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였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궁극적 주인공은 비밀스런 정탐에 실패한 정탐꾼들도 아니고, 그들을 살려 준 라합도 아니다. 죽을 위험에 처한 정탐꾼들과 정복 전쟁이 시작되면 죽게 될 라합과 라합 가족을 구원한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가나안 창녀’(. ‘조나’)였다는 사실 또한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 라합의 신분은 요세푸스가 그녀를 여관 주인이라고 소개하며 신분 세탁을 시도하려 했을 만큼 충격적이었다(새번역 난외주 참고). 그러나 본문은 라합의 신분을 명확히 창녀라고 말한다. 하나님 은혜의 역사는 사람을 가리거나 가르지 않는다.

 


불안한 시작


가나안 땅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가 담긴 2장에서 정탐꾼들은 싯딤에서 출발해 여리고로 들어간다. 개역개정에는 없지만, 개역에는 여호수아가 두 사람을 가만히보냈다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헤레쉬의 번역으로 조용히’, ‘비밀히’, ‘몰래정도의 의미다(NIV, ‘secretly’). 개역의 경우 가만히보내며를 꾸미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이르되를 꾸민다.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에게 몰래 지령을 내렸다. 누구 몰래였을까? 가나안 사람 몰래 보내는 것도 물론 필요했겠지만, 민수기 13-14장에서 모세가 보냈던 정탐꾼의 부정적 보고에 백성들이 절망했던 기억을 가진 여호수아가 혹시라도 부정적 보고를 받을 경우에 대비해 정탐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몰래 보냈을 가능성도 꽤 있다.​2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얼마나 믿은 것일까? 만일 완전히 믿었다면 부정적 보고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굳이 정탐꾼을 보내야만 했는지도 궁금해진다. 정탐꾼들을 몰래 보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1장의 격려와 권고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여전히 두려워했을 가능성을 포착한다(7:10-11 비교).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두려움(그리고 백성들의 두려움)을 암시하며 시작한 2장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가나안 창녀의 고백을 인용하는 보고로 마친다는 역설은 더욱 강해진다.

 

정탐꾼이 출발한 장소는 싯딤이다. 싯딤은 문자적으로 아카시아라는 의미로 험한 환경을 암시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환경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싯담에 얽힌 독자들의 기억이다. , 싯딤은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시작했던 곳이다(25:1-5).​3 그 음행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 또한 한 이스라엘 남자가 미디안 여인과 관계를 가지다 비느하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곳이 바로 싯딤이다(25:6-9). 이러한 싯딤에 대한 기억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불안한 시작을 느끼게 만든다. 게다가 정탐꾼이 여리고에 들어가 머무르게 된 곳이 기생(‘조나’)의 집이었다. 여기서 기생은 조선 시대의 황진이 같은 사람들이라기보다 현대의 성매매 여성 즉, ‘창기에 가깝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기생의 집에 유숙했다는 표현에 사용된 동사는 숙박이라는 일반적 의미를 일컫는 /이 아니라, 성적 함의를 띨 수 있는 샤카브이다(이러한 함의를 가질 때, ‘눕는다라고도 번역한다).​4 1절에서 여호수아가 명령한 것은 가라보라였다.​5 정탐꾼들이 한 첫 번째 행동은 가서로 여호수아의 명령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들의 두 번째 행동으로 기록된 것은 보다가 아니라 역시 성적 함의를 띨 수 있는 들어가다였다(사사기 16:1은 삼손이 기생과 관계를 가진 것을 들어가다라는 동사로 표현했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두려움 때문이었든지 전쟁에 필요한 요소였든지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을 보낸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시작부터 불길한 조짐을 보인다. 음행과 우상숭배의 장소였던 싯딤에서 출발한 정탐꾼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은 채 기생의 집에 들어가’ ‘눕는다’. 이러한 불길함은 2절에 이르면 더욱 강해진다.​6

 

이제 이야기는 정탐의 과정은 전혀 없고 그들의 존재가 탄로 나 위험에 처하는 상황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정탐꾼들의 존재가 탄로 났다(2). 그들의 정체(‘이스라엘 자손’)와 그들의 목적(‘이 땅을 정탐하러’)이 비록 밤에 잠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났다. 어떻게 발각되었는지는 내레이터가 알려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정탐의 임무가 시작되기도 전에 잠입 사실이 탄로 났다는 사실이다.​7

 

정탐꾼의 잠입 사실을 보고받은 여리고 왕은 어떻게 알았는지 라합에게 사람을 보낸다(3). 여리고 왕과 그가 보낸 사람들은 라합이 그녀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라합에게 알리면 그녀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들을 끌어내야 하는 이유로 그들이 장기적으로 이 땅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밝힌다(“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왜냐하면정탐하러 왔느니라”). 1절에 따르면 정탐꾼은 라합의 집 안에 있고, 3절에 따르면 그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정확히 알았다. 2-3절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내레이터는 정탐꾼들의 위치나 상황에 대해 더 이상 알려 주지 않는다. 또한 라합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자신의 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독자들은 전혀 모른다. 정탐꾼들은 이제 라합의 결정에 그 운명이 놓여 있고 독자들은 초조해진다. 그런데 라합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탐꾼들을 도와준다.

 

개역개정은 이미라는 부사를 번역에 첨가해 그 여인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시점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은 사건의 순차적 진행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동사(와우 연계 미완료)를 사용해 4절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라합이 그들을 숨긴 시점은 사실 모호하며 이런 모호함은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한다. 이미 정탐꾼들을 숨겨 놓은 상태에서 편안하게 대답을 한 것이 아니라, 3절의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그들을 숨기고 대답했을 수도 있다.​8 그만큼 상황은 급박하다. 그런데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라합은 꽤나 침착하게 답변한다.

 

라합은 왕이 보낸 사람들의 말에 대해 일단 동의함으로써 그들의 신뢰를 얻는다(“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9 그다음 대답은 독자들조차 진실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정말 최소한 처음에는 라합이 그들이 온 곳을 알 지 못했을 수 있다. 이어지는 대답에서 그녀는 단순히 알지 못한다를 반복하는 것을 넘어 추격자들을 완전히 따돌리기 위해 급히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제안까지 한다. 일단 라합을 신뢰하게 되자 추격자들은 의심 없이 라합의 제안을 충실히 따른다(7).

 

내레이터는 6절에서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겼다는 사실을 다시 독자들에게 알려 준다. 이 정보는 7절에 기록된 추격자들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성문이 닫힌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이제 추격자들은 다음 날 성문이 열릴 때 까지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탐꾼들도 아직까지 독안에 든 쥐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비록 왕이 보낸 추격자들로부터는 안전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라합의 태도에 운명이 달려 있다. 라합이 마음을 바꿔 그들의 존재를 성 안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그들은 안전은 치명적일 것이다. 이런 상황은 라합의 도움 요청을 정탐꾼들이 받아들이는 압력으로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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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hab and the Emissaries of Joshua(사진 위키미디어) 



경계를 넘나드는 선대


라합이 정탐꾼들을 도와준 이유는 8절 이후 그녀의 말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시고 요단 동편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이 미래에도 이스라엘에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알았다(9절상). 이제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진정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11절하). 그는 심지어 여호와라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도 언급한다.​10 이런 하나님을 그 땅 주민들처럼 두려워하는데 그치거나 아모리 사람들처럼 대항하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목숨을 매우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과 달리 라합은 선대를 요청하며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라합의 하나님 지식과 고백은 지식은 여리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기록한 본문(9절하-11절상)을 둘러싸고 있어(9절상, 11절하) 두 태도가 잘 대조된다.


9절상        라합의 하나님 지식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9절하-11절상     여리고 사람들의 두려움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11절하       라합의 하나님 고백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제 12-13절에서 라합은 자신이 정탐꾼들을 선대했으니 자기 집안을 선대해 달라고 그들에게 요청한다. ‘선대하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 ‘헤세드를 행하다이며 헤세드궁핍한 언약 동반자에 대한 확실한 도움을 의미한다.​11 자애로움, 자비, 신실함, 충성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1) 이미 적극적인 관계가 확립된 사이에 (2) 도움을 받는 사람의 생존이 결부된 문제를 (3)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해결해 주는 행동을 말한다.​12 그런데 이러한 헤세드의 일반적인 특징과 라합과 정탐꾼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이 두 당사자의 관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13 이 둘은 민족이라는 경계로 구별되어 있는 타인들이다. 그런데 마치 그 타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이미 있는 것처럼 선대를 주고받자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 8-11절의 하나님에 대한 라합의 고백을 통해 관계가 이미 형성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14 주목하고 싶은 것은 라합의 고백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독특성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인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참고. 4:39; 왕상 8:23).​15 하나님의 유일성의 이면은 하나님의 보편성이다. 참 신이 한 분이라면, 그 신은 모든 사람을 아우른다. 이러한 야웨 하나님의 보편성이야말로 경계를 넘나드는 선대의 근거다. 사람들이 경계를 넘나들며 선대를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의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야웨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 , 모든 만물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이를 만드신 하나님의 형상이다(참고. 10:34-35).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신 야웨의 은혜가 이스라엘을 넘어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의 경계, 창기와 군인이라는 신분의 경계 또한 넘어선다. 그리고 이 둘은 동등하게 선대를 주고받고자 한다. 이것이 라합이 현실의 여러 경계를 넘어 선대를 요청하는 12절을 그러므로’(문자적으로 그러니 이제’)로 시작할 수 있는 논리였다.

 

라합은 자신이나 정탐꾼이나 모두 하늘과 땅의 하나님 아래 있다는 관계에 근거해 선대를 이미 베풀었다. 그리고 정탐꾼들의 선대를 요청한다. 반면 정탐꾼들은 자신의 일들을 끝까지 비밀로 지켜 달라는 조건을 건다(14). 라합과 자신들 사이에 관계가 없기에 선대를 베풀기 위한 조건이 필요하다 생각한 듯하다(개역개정에서 인자라고 번역된 단어 또한 헤세드).​16​ 물론 그런 신학적 이유와 더불어 아직까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자신들의 안전 문제를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다. 무언가 라합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이 남는다.




*주

1) 참고. Richard S. Hess, Joshua: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vol. 6,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6), p. 106.

2) C. F. Keil and F. Delitzsch, Joshua, Judges, Ruth (Edinburgh: T&T Clark, 1875), p. 33.

3) L. Daniel Hawk, Joshua (Berit Olam; Collegevill, The Liturgical Press, 2000), p. 40.

4) 여호수아 3:1에서 유숙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이다.

5) 개역개정이 엿보다로 번역한 동사는 롸아로 흔히 보다라고 번역되는 일반적 동사다.

6) 엄밀히 말해 일반적으로 성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함께 눕다’(. ‘샤카브 임’)이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성적 접촉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7) 설령 이미 정탐을 마친 상황이더라도 내레이터는 정탐 자체보다 정탐꾼들이 처한 위험에 더 관심이 있다.

8) 6절의 경우에도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미라는 부사가 명시적으로 쓰여 있지 않다. 하지만 6절을 시작하는 문장은 부대 상황을 알려 주는 명사 뒤에 완료형이 오는 구문이기에(w-x-qatal) 5절에서 이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5절 이전에 했던 일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9) Hawk, p. 43.

10) J. Gordon McConville and Stephen N. Williams, Joshua, The Two Horizons Old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mbridge, U.K.: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p. 17.

11)  브루스 월키, “여호수아”, IVP 성경주석(서울: IVP, 2008), 328.

12) 캐서린 두웁 자켄펠드, 룻기(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59

13) 이런 예외 상황에 대해 8-11절의 여호와에 대한 라합의 고백을 통해 관계가 이미 형성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Katharine Doob Sakenfeld, Faithfullness in Ac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22. 

14) Sakenfeld, Faithfulness in Action, p. 22.

15) 참고. John Goldingay, Joshua, Judges, and Ruth for Everyone: A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Bible, Old Testament for Everyon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 p. 14.

16) 참고. Sakenfeld, p. 22

IVP 2019-09-02 조회5,0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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