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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건과 글로리에 관한 새드 엔딩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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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건과 글로리에 관한 새드 엔딩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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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지금도 전쟁을 명령하시는가 


, 글로리, 새드 엔딩. 작년에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고가 애신이 처음으로 배운 영어 단어들이다. 물론 이 단어들은 드라마의 주제였다. 여호수아서 읽기를 시작하며 이 단어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이 단어들이 여호수아서의 주제 또한 잘 포착하기 때문이다.

 

(gun). 여호수아서에 총이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총 대신 이 스무 번 나온다. ‘칼날이라는 표현은 여호수아서에 제일 많이 나온다.1) (구약 전체 서른다섯 번 중에 열세 번이 여호수아서에 나온다. 칼이 나오는 스무 번 중에 열세 번이 칼날에 쓰였다.) 칼은 총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상기시킨다. 여호수아서는 전쟁에 관한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전쟁하는 그리고 대부분 승리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런데 여호수아서를 이렇게 요약하면 고민이 생긴다. 전쟁을 명령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전쟁을 명령하시는가 묻게 된다. 만일 여호수아서의 기록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자신들의 생각일 뿐 실제 하나님의 행동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 아니라면 고민은 그리 깊지 않다. 하나님은 전쟁을 명령하셨던 적이 없고, 지금도 명령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만일 여호수아서의 기록이 하나님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2) 하나님이 과거에 전쟁을 명령하셨듯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성경 인물의 과거 행위를 서술한 것이 반드시 현재 성도들의 규범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비교적 쉽게 설명할 수 있다.​3) 그런데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해서도 성경의 기록은 과거일 뿐 지금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 과거 이스라엘처럼 지금 자신에게 하나님이 전쟁을 명령하셨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또는 구약에 기록된 과거의 행적에 근거해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고 그분과 같은 본질의 하나님이신 나사렛 예수를 전쟁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여호수아서의 원래 의미를 밝히는 주석적 문제뿐 아니라 이 책이 현대의 삶에 주는 의의를 살피는 윤리적 문제 그리고 그 둘을 이어 주는 하나님 이해를 씨름하는 신학적 문제까지 총 망라해야 비로소 입을 뗄 수 있을 만한 주제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한 결론을 서론에서 내리는 것은 무리다. 관련된 구절들을 포함해 여호수아서 전체를 면밀히 살핀 후 이 고민을 이 책의 마지막에서 다시 맞닥뜨리기로 하자.

 

글로리(Glory). 비록 총과 칼, 전쟁에 대한 결론은 책의 마지막에 가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 결론의 방향에 대한 힌트를 두 번째 주제인 글로리에서 엿볼 수 있다. 여호수아서는 승리와 그로 인한 영광의 책으로 읽혀 왔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물론 승리의 영광이 여호수아서 많은 부분의 색깔이다. 아이성의 패배를 제외하고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니 그런 읽기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승리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편파적으로 편드는 인종주의와 결부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열방의 하나님,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하나님이 악인과 의인에게도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아니 잊고 싶은 우리의 편협함을 정당화하게 된다. 그렇게 인종주의와 승리주의가 결부될 때 우리 신앙은 혐오와 배제를 당연히 여기고 심지어 드높이는 신앙이 된다. 이에 우리는 여호수아가 환호하는 승리의 영광이 누구의 영광인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하는 승리와 영광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승리주의와 인종주의의 결합과 관련하여, 전투적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말은 당혹스럽다.

 

구약 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붙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나온다.​4) 

신앙 서적에 옮기기에는 너무나 불편하고 불경스럽기까지 한 이런 말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구약 성경에 대한 이런 평가가 어떤 수준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호수아서는 이 중 특히 하나님이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인종 청소자라는 비난의 근거가 된다. 물론 나는 이런 비난은 본문에 대한 피상적 읽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도 본문을 피상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만 읽는 경우가 많기는 매한가지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온 세상을 향한 구약 전체의 전망 속에 다시금 면밀히 읽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그들의 혈통 때문에 편애하셨다는 인종주의적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혈연이 아니라 여호와를 향한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여러 사건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 공동체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 없이 여호와 신앙만 고백할 수가 있다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포용과 환대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5)

 


인종적 승리주의라는 오해를 넘어 


여호수아서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들의 혈통 때문에 편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이야기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무엇보다 아이성 사건이 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첫 성인 여리고에서 승리한 다음, 이스라엘은 아이성에서 패배한다.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유일한 패배 이야기임에도 여리고의 승리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우리는 아이성의 패배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다시 싸워 이기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이성 이야기는 여호수아의 인종적 승리주의의 오해를 깨는 데 매우 중요하다. 아이성 패배 사건을 담은 여호수아 7장에서 여호와와의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과 같은 존재가 된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패했던 이유를 71, 11-12절이 설명한다. 그들이 죄를 짓고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 설명에는 매우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1절과 11절의 온전히 바친 물건12절의 온전히 바친 것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렘인데, 이 단어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멸하다라는 동사와 어근이 같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헤렘을 이스라엘이 가져가 자기 가운데 둠으로써 언약이 파기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 또한 가나안 민족처럼 진멸되어야 할 온전히 바친 것”(헤렘)이 되어 버린 것이다.

 

범죄한 사람을 추적해 아간을 뽑아 내는 과정(14-18)에서도 이스라엘은 가나안처럼 취급된다. 본문에 뽑히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일반적으로 제비뽑기를 묘사하는 동사가 아니라 보통 점령당하다라고 번역되는 군사적 함의를 가진다. 이 동사는 특히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의 여러 성읍을 점령했다는 진술에 반복해서 쓰인다(10:32, 37, 39; 28, 35절의 취하고도 같은 동사다). , 범죄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한 단계 한 단계 가나안 성읍을 점령해 가는 과정처럼 그려지며​6)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민족이 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렇게 이스라엘 내부에 감추인 가나안적 요소와 관련하여 아간의 이름은 매우 흥미롭다. ‘아간이라는 이름을 이루는 히브리어 자음들은 가나안을 만드는 자음들과 같다. ‘아간이라는 이름 자체에 가나안적 요소가 감춰 있는 셈이다.​7)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진정한 가나안은 그들 가운데 있었다. 이스라엘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의 불순종을 경계해야 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가나안처럼 다루셨다.

 

이 주제와 관련해 라합의 이야기는 아간의 이야기와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아간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가족과 소유물-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7:24-25). 이것은 라합이 자신에게 속한 모든 이들과 함께 구원을 얻었던 것과 대조된다(6:23-25). 여기서 우리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던 라합이 이스라엘처럼 되며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아간이 가나안처럼 되는 대조를 본다. 이 대조는 구약 시대에서도 혈통은 구원의 근본적 조건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보여 준다.

 

라합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던 여호수아서는 아간의 범죄를 거쳐 기브온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9). 기브온 주민들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게 된 과정이 온전하지는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브온 주민들은 비록 나무 패고 물 긷는 종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었던 기브온 주민들의 이야기에서도 혈통이 아니라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기준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여호수아서가 말하는 승리와 영광은 인종적 이유로 다른 민족을 배제하는 민족신 여호와가 자기 부족 이스라엘에게 준 승리와 영광이 아님을 보여 준다. 여호수아서의 승리와 영광은 모든 민족을 창조하신 온 세상의 통치자가 자신과의 언약 가운데 맏아들과 같은 대표가 된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이 창조하고 보기에 좋다고 선언했던 세상 전체를 회복시키려는 계획 가운데 누리게 된 승리와 영광이다. 이에 언약에 충실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자신의 소명에 실패하고 가나안과 같은 존재로 다루어진다. 그런 그들에게 주어지는 승리와 영광은 없다. 여호수아서의 건(gun)이 소문자로 시작하는 사람의 총-전쟁-이라면 여호수아서가 드높이는 글로리(Glory)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것을 뒤집어 인간의 전쟁을 하나님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것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여호수아서를 그렇게 읽어서는 안된다.

 


순종하라 순종하라 순종하라  


새드 엔딩(sad ending). 여호수아서가 승리와 영광의 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책 전체의 흐름이나, 책이 구약 성경 전체에 기여하는 역할은 슬픈 맺음에 가깝다. 여호수아서는 제사장들의 우렁찬 나팔 소리와 성벽이 무너지는 굉음이 잦아들고 성이 무너지며 뿜어냈던 먼지들이 가라앉으며 이스라엘의 환호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여리고성의 승리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리고성 승리로 대표되는 정복이야기(1-12)​8) 그 땅을 분배하고 그 땅에 정착하는 이야기로 이어지고(13-21), 무엇보다 언약을 새롭게 하며 지속적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정리이야기로 마무리된다(22-24). 우리는 여리고성의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여호수아서가 지속적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그러나 이 부분에야말로 지속적 순종이 필요하다는 여호수아서의 핵심 주제뿐 아니라 여호수아서를 시작으로 펼쳐지는 이스라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여호수아서가 끝날 즈음에 여호수아는 지속적으로 언약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그는 먼저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선한 말씀 모두가 실현되었음을 확인한다(23:14). 그런데 문제는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림없이 다 실현된 것처럼, 불순종하면 멸망한다는 모든 불길한 말씀도 실현된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할 때까지 말이다(23:15). 이어지는 16절도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한다는 주제를 반복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 이 얼마나 두려운 마무리인가. 그리고 이 두려운 경고는 이후 역사에서 참으로 슬픈현실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우리는 건, 글로리, 새드 엔딩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여호수아서를 넓게 살펴보았다. 여호수아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주제다. 그 주제와 씨름하며 여호수아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예이기 때문이 아니라 언약을 지켰기 때문임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서가 드높이는 것은 한 부족신의 편협한 애착이 아니라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다(3:16). 지속될 것만 같았던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역사는 사사기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역사로 이어지고 열왕기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의 노골적으로 체현해 주는 우상을 숭배하는 역사로 전락해 결국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며 끝난다. 여호수아 시절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이방 민족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는 이스라엘 첫 번째 역사 서술은 이렇게 새드 엔딩을 맞는다. 하나님은 인종을 차별하지 않으시며 인종주의적 우월감은 지속적 순종을 방해할 뿐이었다. 자신들만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며 타자를 배제하며 은연중에 또한 드러내 놓고 혐오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인종적 우월감과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우월감은 너무나 닮아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지속적 순종을 방해하는 우월감으로 왜곡되지는 않는지 겸손히 성찰해야 한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며 승리를 환희하는 목소리를 높일수록,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의 경고 또한 가슴 깊이 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파죽지세로 가나안을 정복했다면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도를 떠났을 때 파죽지세로 패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역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자신의 길을 따르는 백성을 지키실 뿐 인종을 포함해 눈에 보이는 어떤 조건으로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

1) 여호수아서 외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열왕기하, 예레미야에 각 한 번, 욥기에 두 번, 신명기에 세 번, 사무엘서에 네 번, 사사기에 여덟 번 나올 뿐이다

2) 크리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 윤리, 663-674쪽과 성경의 핵심 난제에 답하다, 126-129쪽 참고.

3)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야곱의 거짓말들을 생각해 보자. 이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우리도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면 히브리 산파들의 거짓말은 어떠할까?

4) 도킨스, 만들어진 신(김영사), 50.

5) 이신칭의 교리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포용과 환대의 교리다. 로마서 3:21-22은 복음은 차별이 없다고 선언한다

6) L. Daniel Hawk, Joshua (Berit Olam; Collegevill, The Liturgical Press, 2000), p. 119.

7) Hawk, p. 120.

8) 1-5장과 6-12장을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1-5장은 정비라고 불러 볼 만하다.

IVP 201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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