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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그리스도인』저자 인터뷰(전문)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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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내용은 8월 5일에 진행한 순전한 그리스도인저자 인터뷰 전체를 쓴 것입니다대체로 인터뷰를 그대로 옮겼으나대화를 진행하면서 나타났던 부자연스러운 흐름이나 표현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약간 윤문하였습니다. 



인터뷰이 김진혁  / 인터뷰어편집 설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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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인터뷰와 이어집니다.



요한 5장이 신앙과 성경이고 여기서 계시 이해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저는 보면서 확실히 루이스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보는 방식, 사람들이 성경을 받아들이는 근대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두 가지 방식, 하나는 근본주의, 또 하나는 자유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그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을 읽는다는 것, 성경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혁 루이스의 성경관이 독특한 건 사실이죠. 독특한 만큼 또 잘못 이해되기도 쉽고요. 동시에 루이스는 전문 신학자 내지는 성서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주 잘 만들어진 성서론을 제시한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루이스의 성서 이해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서 이해와 조금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 비약이 있긴 하겠지만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경우에는, 진리는 너무나도 신비롭기 때문에 누구도 완벽하게 진리를 소유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고 봤고요. 그렇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누구든지 인간은 다 틀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건 성경을 읽을 때 완벽하게 해석하려는 강박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읽는 것이죠. 완벽하게 사실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믿음, 소망, 사랑의 덕을 실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루이스 역시 약간 그런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들고요. 루이스가 특별히 문헌학자로서, 영문학자이자 동시에 비평가로서 성경을 읽어 내는 방식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가 있어요. 성경을 무조건 잘 읽기 위해 성서학 훈련을 받거나 공부를 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기를 가지고 성경을 천천히 읽어 나가는 거죠. 루이스가 비록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진 않지만, 자신의 지적인 성실함과 양심,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성경을 읽는 것, 루이스에게선 이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루이스의 성서론이 주는 제일 중요한 도전 중 하나는, 제가 쓴 표현으로는 루이스가 성경을 우둘투둘한 텍스트로 봤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인간적인 자료들, 고대의 문학 장르라던지, 심지어 시편 같은 경우는 시편 저자들이 가지고 있던 원한, 증오심 이런 것까지 성경의 재료로 쓰였단 말이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책이나 논문을 쓸 때 몇 번이나 퇴고하고 편집자에게 보내고 편집자가 그것을 완벽에 가깝게 매끈하게 다듬는 과정을 거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서로 충돌하는 듯한, 풀리지 않는 우둘투둘함을 갖고 있는데 성경은 오죽할까요. 사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빨리 달려도 되죠. 빨리 달려도 되고, 정확한 도착 시간과 확실한 목적지도 나오고. 하지만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를 달릴 때 빨리 달리게 되면 차가 망가지죠. 마찬가지로 성경도 우둘투둘한 텍스트라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너무 빨리 읽고, 내가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읽어야 되고, 내가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읽게 되면, 오히려 성경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이상하게 만들어 버리는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제 선생님 중 한 분이 고든 카우프만이라는 분인데요. 그분은 신학방법론을 만든 분으로 유명하지만, 잘 안 알려진 모습은 초기에는 메노나이트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분이 저한테, 자기가 성경을 봤는데 성경으로는 모든 것을 증명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부정할 수도 있다는 재밌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무조건 빨리 읽고 정해진 목표만큼 읽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성경이 가지고 있는 우둘투둘함이라는 특성을 잘 살리면서 읽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게 루이스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요한 아까 말씀하신 예기치 못한 것들, 삶의 여러 계기가 나에게 찾아와 변화를 일으킨 게 엄청 인간적인 과정인 건데 그게 성경을 읽을 때나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실 성경 텍스트 자체조차도 굉장히 인간적인 면이 많이 반영된 일종의 장르 문학인 거고 우리가 그런 것을 받아들일 때도 그러한 성격들을 충분히 고려하여 논문 읽듯 읽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성격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끼면서, 또 그렇다고 해서 막 의도를 생각해 가며 읽는다기보다는 인간적으로 쓰인 내용들을 한 사람의 인간이 자연스럽게 읽는 것, 인간이 문학을 받아들이듯이 그렇게 읽는 것, 그게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고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혁 한 마디만 첨언하자면, 루이스의 가장 큰 재능 중 하나는 우리가 쓰는 일상어의 또 다른 의미를 열어젖힘으로써 우리가 익숙해져 있던 것을 새롭게 보게 해 주는 능력이죠. 예를 들어, 성경이 인간적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말이 성경은 인간 저자가 썼고 성경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화적‧문학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루이스에게 성경이 인간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특성에 맞게 계시를 주셨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이라는 거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삶의 역설, 지식의 한계, 문화적 다양성, 이런 것들에 맞게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셨다는 의미에서도 성경은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려 주신 방식 자체를 무시하고 성경을 너무나도 높은, 인간적인 것이 없는 신적 계시처럼 보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시는 방식 자체를 우리가 귀중하게 혹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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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교수님께서 이 책을 마무리하시면서 현대의 의미 상실 문제를 탈주술화와 재주술화로 표현해 주셨는데요. 저는 이걸 보면서 실은 탈주술화와 재주술화를 구분하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주술화가 이루어지는 존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에는 어떤 주술화가 이루어지느냐가 중요하겠다 싶었거든요. 이 부분은 교수님께서 루이스의 『오독』을 빌어서 말씀하신 ‘이기적인 성 쌓기’와 ‘사심 없는 성 쌓기’와 연결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은데, 주술화의 문제와 이런 내용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교수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진혁 루이스의 인간론 중 제일 심오한 점은 인간이 상상력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상상력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힘 중 하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부분이죠.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고 욕망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의 모습을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 그려 내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 중 하나죠.

 

그런데 우리가 또 생각해 봐야 될 것 중 하나는 프로이트 이후에 우리가 사람들을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프로이트 같은 경우 방어기제 중 하나로 환상이라는 걸 얘기하고 있죠. 프로이트는 인간이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충족시키기 위해서 상상의 영역에서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을 환상이라고 얘기했는데요. 사실 루이스가 프로이트에게 받은 영향이 적지는 않은데 그게 얼마나 되고 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았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죠. 그런데 프로이트가 가지고 있었던 환상에 대한 이해를 루이스가 상당 부분 수용한 것은 루이스의 문학 비평 글들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만약에 사람이 환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루이스 입장에서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죠. 왜 선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환상을 가지고 살게 했을까? 단지 상상력이 아니라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세계에 대한 내 환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 환상에 대해서 어떤 그리스도인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상상이라면 우리가 환상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환상이 있을 거고, 그렇지 못하고 우리의 삶을 오히려 파괴하는 환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저는 루이스가 이 두 가지를 성 쌓기로 설명했다고 생각했고요. 그 내용은 루이스의 문학 비평 책(『오독』)을 보면 나오고, 저는 이를 루이스의 전체 글쓰기 프로젝트와 연결시켜서 결론 부분에서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환상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어떻게 하면 그 환상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되돌아봤을 때, 인간의 욕망은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크게 두 가지로 생각을 할 수가 있겠죠. 하나는 자기 자신의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어떤 식으로든 실현시키거나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환상이 있을 거고, 다른 하나는 자기중심성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폐해를 혹은 위험성을 극복하는 형태로 작용하는 환상이 있을 텐데, 루이스는 여기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환상이 무엇일까 생각했고요. 루이스는 내가 꼭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더라도 내가 그 속에서 행복할 수 있고 그 속에서 내가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내가 환상을 통해 그려 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 내가 계속해서 내 의식, 상상력뿐만 아니라 이성과 신앙 같은 것들을 계속해서 발현해 본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속성이 점점 회복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의 여러 소설을 보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그런 망상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 나오고, 동시에 어떻게든 자기중심성과 싸우거나 이를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점점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하는 모습, 이것이 루이스의 소설이나 판타지의 아주 중요한 주제로 나온 걸로 봐서, 그 부분을 제가 조금 더 만들어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하려던 이야기가 중간에 두 개 사라진 것 같은데…얘기가 잠시 딴 데로 가서….

 

요한 어느 정도 답변을 해 주신 것 같긴 한데요.

 

진혁 그러면 잠깐. 이거 하나만 더 얘기하자면, 제가 루이스와 함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 중 하나가 있어요. 기독교인은 아닌데, 아이리스 머독이라고, 루이스와 같은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입니다. 머독이 했던 중요한 말 중 하나가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고 욕망은 환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외, 자기 밖에 있는 타자라던가 세계를 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사랑이 뭘까요? 사랑에는 여러 가지 정의 방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내 삶을 헌신하는 것, 내 것을 나누는 것,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등으로 설명하는데, 머독 같은 경우는 한 마디로 사랑을 흥미롭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내 밖에 있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 능력을 회복하고 기를 수 있을까요? 루이스와 머독이 동시에 보여 줬던 것 중 하나는, 내가 중심이 되는 세계가 아닌 세계를 보는 훈련을 통해서 사랑하는 능력이 길러진다는 겁니다. 루이스의 판타지라던가 소설이라던가 심지어 변증서도 그런 시각에서 보면 루이스가 어떤 인간상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싶은지 우리가 좀 더 잘 알게 되실 거라고 생각해요.

 

요한 마지막 질문이 그거였는데 말이죠. 루이스 외에 이 작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

 

진혁 머독은 아니죠. 그리스도인이 아니니까.

 

요한 그럼 마무리하면서 질문할…

 

진혁: 다른 사람 대면 될까요?

 

요한 아, 이따가 질문을 다시 던질 겁니다. 지금은 다른 질문. 사실 이게 답변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그냥 취향에 따라 보라고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루이스 잘 모르겠는데 관심이 생겼거나 이거(『순전한 그리스도인』) 읽고 관심이 생겼다고 했을 때, 루이스 작품 중에 이건 따로 챙겨 보세요 하고 추천하고 싶은 게 있을까요?

 

진혁 저는 루이스 작품 중에 루이스 본인도 자신의 작품 중 최고로 거론했던, 저 개인적으로도 루이스가 정말, creative writer라고 하죠, 정말 소설가로서 재능이 뛰어나다 하고 느꼈던 작품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작품입니다. 영어로는 Till We Have Faces라는 작품. 루이스가 늦게, 거의 환갑 다 되어서 결혼했는데 자기 아내에게 헌정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주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또 동시에 좀 더 기독교적인 작품을 원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루이스의 작품들이 기독교 변증을 주로 했던 1940년대 작품들이 있고, 1950년대 이후에 또 다른 모습으로 글의 스타일이, 기독교 서적도 그 스타일이 약간은 변화하게 되는데, 그중에서 제가 제일 재밌게, 그리고 높게 평가했던 작품은 『시편사색』(Reflections on the Psalms)입니다. (원서를 꺼내며) 자랑해도 되나요?

 

요한 오, 갑분자랑. (초판) 1쇄를 갖고 계시는군요. 홍성사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진혁 아, 그런가요?

 

요한 농담입니다.

 

진혁 (『시편사색』 원서 1쇄를 들고) 이게 C. S. 루이스의 『시편사색』, 영국에서 나왔던 1쇄를 제가 영국에서 떠날 때 킬른스에서 같이 살았던 친구가 선물로 줬거든요. 이걸 선물했던 친구가…루이스의 후배죠. 옥스퍼드에서 고전학 전공을 했고 고전학 박사까지 했던 분인데, 그 친구가 앞에다가 써 준 내용이 뭐냐면,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루이스의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에 대한 이해가 너무 흥미로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시편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지, 시편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주고 기독교의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책이지만, 또 동시에 고대 고전 문명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이 책을 통해서 루이스의 원래 전공이었던 고전 문학이 어떤 식으로 히브리인들의 시편과 연관성을 갖는지 그 유사점과 차이점을 볼 수 있는 가장 루이스다운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사색』을 기독교 서적이면서도 가장 루이스다운 작품으로 추천을 하고 싶습니다.

 

요한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루이스 외에 이 작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봤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 있다면, 혹시 한국어로 소개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진혁 신학자는 일단 제외하도록 하고요.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 하나는 엔도 슈사쿠였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작품이 아무래도 제일 유명하기도 하고, 저도 20대 때 그 책을 읽고 그때 받았던 충격과 고민이 지금까지 제 삶에 계속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리고 엔도 슈사쿠가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 세계가 솔직히 말해서, 엔도 슈사쿠가 융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그의 기독교 세계가 상당히 깊어지고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엔도 슈사쿠의 작품에서는 기독교, 아시아인,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신분석학 내지는 심리학적 관심이 아주 흥미롭게 조화되고 있어서 저는 상당히 강하게 추천하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니라) 엔도 슈사쿠의 여러 작품들을 강하게 추천합니다.

 

요한 감사합니다.『순전한 그리스도인』에 대해 독자들에게 짧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마무리할까 합니다.

 

진혁 이 책 결론 부분에 제가 이렇게 썼는데, 루이스가 추구했던 인간이 어떤 모습의 인간일까 했을 때 제가 찾은 답은, 상상력과 이성과 신앙이 조화된 인간이라는 거죠. 이때까지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해 왔던, 성경 많이 읽고 교리 공부하고 주일 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성찬 받고 하는 것들을 루이스가 강조를 하지 않았냐 하면 루이스가 강조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 습성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지만 또 동시에 그것들만 너무 강조하다 보면 우리가 상당히 경계해야 할, 도덕적 완전주의라던지, 더 많이 쓰는 표현으로는 율법주의로 또 우리의 신앙이 끌려 갈 수 있게 되는 거죠. 성경 많이 읽어야 되고 주일 예배 참석해야 되고,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들이 상상력과 이성과 신앙의 조화 속에서 습성화가 될 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만약에 이성과 신앙만을 강조하게 되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기독교인의 모습이 좀 고정되거든요. 루이스가 여기에 상상력을 집어넣으면서 나타난 변화는 그러니까, 엄청나게 다양한 모습으로 기독교인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루이스가 열어 두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 책 결론부에서 강조했던 건, 루이스가 보여 주고자 했던 건 상상력과 신앙과 이성이 조화되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또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루이스에게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루이스가 아무리 글을 잘 쓰고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것 같더라도, 결국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리스도인의 순롓길을 찾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결론 부분에 톨킨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금이라고 다 빛나는 것은 아니다. 방황한다고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루이스를 읽는 이유는 루이스에게 매이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요한 긴 시간 인터뷰 감사합니다.

 

진혁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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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를 통해 본 상상력, 이성, 신앙




IVP 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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