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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이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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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 『처치 걸』 (베스 앨리슨 바 | 이민희 옮김) 
글_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세계관 및 지성사 교수)


내가 『처치 걸』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
 
나는 출판사에서 요청하는 추천사를 쓰지 않는다. 가끔 들어오는 서평 요청도 사양한다. 이유야 몇 가지 댈 수 있겠지만, 기독교 서적을 굳이 찾아 읽지 않는 무관심과 기독교 서적에 대한 선입관도 한몫한다. 최근 몇 년간 내가 쓴 책 대부분이 기독교 출판사에서 나왔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렇지만 일반 역사학을 연구한다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 정도로 해 두자.
이런 내가 『처치 걸』의 서평 요청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수락했다. 첫째는, 저자의 지적·신앙적 배경에 대한 공감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베스 앨리슨 바는 나처럼 유럽 중세사를 공부한 역사학자로 현재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저자는 미국의 복음주의 배경에서 나고 자라면서 신앙과 삶의 정체성을 오래 형성해 왔다. 그런 그가 자신이 속한 미국 기독교와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더욱이 자신의 연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미국 교회 상황에서 품게 된 자신의 고민을 그가 전공한 유럽 역사를 바탕으로 풀어 갔다. 그 결과 오래 익숙했던 신앙 전통과 충돌하고 갈등하며,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경험했다. 
이 책에서 시도한 저자의 글쓰기 방식과 나의 글쓰기는 무관하지 않다. 나 역시 한국 보수 기독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자랐지만, 그 가르침과 실천에 문제의식과 긴장을 안고 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근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와 교회 성도로서 고민하는 저자의 신앙 주제들이 오늘 나의 현실과 잇닿아 있다는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 인용한 저자들은 신학자가 아닌 내게도 익숙한 역사학자들이다. 그 가운데 나의 박사 과정을 지도한 로버트 스완슨 교수가 있어 반갑기도 했다.
저자와 책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더불어, 또 하나는 이 책에 담긴 주장들이 한국 교회에서 어떻게 수용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책이 출간되기 전에 만난 출판사 대표와 편집장은 이 책에 대한 독자 반응이 앞으로 한국 IVP의 출판 기조와 방향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그 의미를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잘 팔릴 책을 내야 하는 현실적 사업 감각과 꼭 읽혀야 할 책을 내야 한다는 선교적 소명 의식 사이의 긴장을 표현한 것일 테다. 
내 추측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 책은 그저 한 권의 책 이상으로, 한국 교회에 던지고 싶은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과연 한국 기독교의 구도 속에서 이 책이 어디까지 받아들여지고 누구에게까지 들려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물론 레이철 헬드 에번스의 책처럼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책들이 한국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지만, 그런 책들과 비교할 때 『처치 걸』은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장점이면서도 독자들의 편안한 수용을 저지하는 한계일 수 있다. 


‘성경적 여성’ 개념은 기독교 가부장제일 뿐이다
 
저자는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색채를 지닌 지역에서 자라고 공부했으며, 그녀의 남편 역시 남침례교 목사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넘나들며 여성과 종교에 관한 연구를 하며, 저자는 일찌감치 미국 보수주의 기독교가 말하는 이른바 성경적 여성(biblical womanhood)이라는 개념이 정말 성경에 근거한다기보다는 개신교 종교개혁 이래 교회가 형성해(making) 온 역사적 구성물임을 이해하고 있었다(이 책의 원서 제목은 The Making of Biblical Womanhood다--편집자). 
그리고 이 책은 그 역사적 구성물로서 가부장제 기독교의 뿌리를 촘촘하게 탐구한다. 신학 용어로 상호보완주의(complementarianism)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다르며, 남성들은 머리로서 리더십을 가진 존재인 반면 여성은 남성의 보호 아래 돕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주로 보수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에 대한 시각으로, 당연히 이 이론에 따르면 여성은 교회나 사회에서 지도력을 가진 위치에 설 수 없다. 여성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는 주장도 상호보완주의에 기인한다. 역사 속에서 이렇게 형성된 차별적 관점은 ‘성경적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왔다. 
저자는 이런 풍토가 여전히 강력한 기독교 대학의 강단에서 가르치면서, 복음주의 공동체에 속한 이들로부터 수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 시간이나 집을 비우나요?”, “당신이 남편보다 돈을 더 버는데, 남편은 괜찮대요?”(38쪽)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를 벗어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 강의 중에 문제를 제기한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강의 자료를 남편과 함께 정리해 보라며 저자에게 친절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저자가 다니던 교회에서 청소년 담당 남성 사역자가 자리를 비워 누군가 그 역할을 대체해야 했을 때, 여성이 남성에게 지도력을 행사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저자는 결국 그 역할을 허락받지 못한다. 저자가 가부장제 교회에 반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결과, 한 교회에서 목회자로 십수 년 일했던 저자의 남편이 해고당했다. 한 여성 학자에게 가해진 이 비현실적인 폭력이 성경적 여성이라는 관념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가부장제일 뿐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아무래도 이렇게 강고한 가부장제 구조에서 살아가는 저자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그 가부장제 구조는 교회라는 울타리에서만 작용하지 않았고, 그녀가 일하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도 버젓이 작동했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책을 읽으며 저자가 처한 맥락은 미국 남부 보수 기독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한국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통스러운 이유가 따로 있었다.


한국 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 교회가 이 책에서 논의한 것보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몇 가지 사례가 머릿속에 빠르게 지나갔다.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한 교단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여성 교수는 학생들과 교회에서 만나면, 그들이 자신을 전도사님 혹은 자매님으로 불러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상호보완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저자의 말 대로 가부장제는 가부장제일 뿐이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상호보완주의자 존 파이퍼 목사가 성 평등이 성폭력을 유발한다는 설교를 했다. 존스 홉킨스 대학 영문학 박사 과정 학생이자 가르치기도 하는 한 여성 연구자가 쓴 그에 대한 비판을 읽고, 기독교 잡지 「복음과상황」에 요청하여 실었다. 정말 잘 쓴 글이었고, 많은 공감을 일으켰다. 내심 한국 기독교에 주목할 만한 여성 필자를 찾았다고 뿌듯해했다. 그 연구자는 두 달 후 샬러츠빌 폭동 1주년을 맞아 미국 내에 만연한 인종 차별을 다룬 글을 실었다. 샬러츠빌 폭동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가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지도자였던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철거를 반대하며 벌인 시위다. 이 두 글의 시의성과 충실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개혁주의 목회자들 사이에 이 글들이 회자되며 엉뚱한 비판을 받았다. 파이퍼의 상보주의(상호보완주의)를 보완주의라고 번역하고, 파이퍼를 신칼빈주의(New Calvinism)가 아닌 네오칼빈주의(Neo-Calvinism)라고 잘못 범주화한 것을 놓고, 저자의 글이 전문성 없는 무가치한 글이라며 격하시켰다. 그 글을 최초로 공유해서 비판한 목회자에게 단지 용어 때문이냐, 아니면 내용 때문이냐고 물었다. 그는 내용은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 자기 이해가 걸린 일에는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정작 들어야 할 메시지에는 나 몰라라 하는 그 무심함에 참담했다. 감히 목사가 아닌 평신도가, 감히 남자가 아닌 여자가 숭고한 신학적 문제에 왈가왈부하느냐는 말 그 이상으로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그 연구자는 글을 싣지 않았다. 그에게 정말 미안했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너무 부끄러웠던 기억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성경적 여성’은 복음 진리가 아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성경적 여성이 개신교 역사의 구성물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의 여성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종교개혁으로 빚어진 또 다른 형태의 가부장제 기독교가 오늘까지 이어졌음은 역사적으로 합의된 사실에 속한다. 
여기서 드는 생각이 또 하나 있다. 무슨 미련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다시 썼을까? 이토록 공들여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접한다 해도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도록 설계되었나 싶은 정도다. 
저자는 과거에 자신이 침묵한 이유를 열거하며, 불의한 현실에서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밝힌다. 그녀는 솔직하다. 자신으로 인해 남편이 직장을 잃고, 아이들의 삶이 엉망이 될까 봐 두려웠다. 한편으로 자신이 나고 자란 교회가 너무 편안했기에 굳이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오래 침묵했다. 
하지만 곧 침묵이 답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이 틀렸다고 고백한다. 그런데도 저자는 여전히 복음주의 전통과 남침례교의 전통을 지킨다고 한다. 집이고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그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이 오랜 관성을 바꾸고자 한다. 그녀의 펜은 종교 가부장제에 갇혀 사는 여성들과 그런 가부장제를 당연시하는 교회와 남성 지도자들을 향한다. 함께 용기를 내자고 한다.
우리가 오늘날 복음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교회 그리고 여성을 포함한 인간 이해는 역사 속에서 변화해 왔다. 모든 것이 잠정적 가치였다.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다고 여긴 생각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지금 한국 교회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 못지않게 보수성이 강화되어 간다. 그것이 교회를 지키고 살리는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보수성에는 사람들을 질식시켜서 떠밀려 나가게 하는 요소가 적지 않다. 
『처치 걸』이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특히 남성, 목회자들에게 다가갔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이다. 오늘날의 모습이 전부와 절대가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유연한 관점으로 인간을 대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이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에 대해 근원적인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안겨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최종원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세계관 및 지성사 교수
 
IVP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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