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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용서의 자리로 부르는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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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는 단 하나의 글, 책의 이름과 같은 내용을 일관되게 써 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책을 ‘은혜’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각도의 변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본다면 필립 얀시의 대표작은 당연히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최근 그 책을 다시 읽고 사반세기 전 미국에서 쓴 그 책의 메시지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하고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 『용서: 은혜를 시험하는 자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개작하고 한 챕터를 추가하여 새롭게 구성한 축약판이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독자들이 글과 메시지를 대하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호흡이 긴 글을 어려워하고 할 말을 최대한 간결하게 해 주기를 바라는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담긴 내용의 충실함, 사례의 풍부함이 오히려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얀시가 『용서: 은혜를 시험하는 자리』라는 축약본을 낸 것은 주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핵심 메시지를 다음 세대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선택과 집중은 필연적이다. 은혜의 특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용서’를 키워드로 선택한다. 4부로 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핵심부라 할 1, 2부에 집중한 것이다. 은혜를 소개하는 1부에서 두 챕터를, 용서의 문제를 다룬 2부 ‘비은혜의 사슬 끊기’의 다섯 챕터를 선별했다. 여기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마지막 챕터에 ‘은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제목을 붙여 『용서: 은혜를 시험하는 자리』의 마지막 챕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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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은혜  


같은 자료라도 구성과 배치가 달라지면 효과와 강조점이 달라지고 때로는 아예 다른 작품이 되는 법. 용서를 개관하는 한 챕터를 새로 쓰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기존 내용을 절반 이상 덜어 내고 새롭게 구성해 낸 『용서: 은혜를 시험하는 자리』는 독립적 작품으로 상정해도 무방하다. 

얀시는 이 책에서 은혜를 이렇게 정의한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은혜란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얀시가 이해하는 은혜의 가장 큰 특성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파격성이다.

은혜의 파격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용서다. 이 책을 위해 새로 쓴 1장 ‘해방’에서 얀시는 용서의 두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아내에게 분노를 쏟아내다 경찰에 끌려가는 망신도 당하고 아내와의 관계도 큰 위기를 겪었던 친구 마크의 사례다. 또 하나는 10살에 30대 남자에게 납치당해 8년간 갇혀 지내며 몹쓸 일을 당한 나타샤 캠푸치의 이야기다. 두 사람 다 가해자를 용서하는 힘든 일을 해내지만, 두 피해자의 반응은 용서라는 같은 단어로 규정하는 것이 합당할까 싶을 만큼 다른 부분도 있다. 

두 용서의 사례에 있는 공통점은 “복수할 권리를 내려놓고 자신을 가해자에게 묶어 두는 울분의 사슬을 끊는” 것이다. 한마디로 ‘해방’이다. 차이점이라면,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지 여부에 있다. 마크는 아내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고, 아내가 몇 달 만에 그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화해와 회복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타샤의 경우 납치범이 경찰을 추적을 받게 되자 자살해 버렸다. 그래도 나타샤는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그자에 대한 분노와 원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잔인한 역설이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피해자다.” 가해자의 반응과 별도로, 용서만이 해방을 안겨 준다.



용서란 무엇인가 


저자는 2, 3장에 걸쳐서 은혜의 세계로 초대한다. 2장에는 어느 가출 소녀의 실화가 등장한다. 이 실화 속 아버지는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다. 이 아버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보여 준다. 그분은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시다. 나간 자식을 기다리시는 정도가 아니라 자식을 찾아 달려가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정도까지 멀리. 여기 은혜의 근원이 있다.

3장은 ‘은혜의 색다른 계산법’이다. 얀시는 “용서의 스캔들”이라는 표현을 쓴다. 은혜란 부당하다. 자격 없는 이가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은혜란 받는 이에게는 값없는 것이지만 주는 이에게는 모든 소유가 들어가는 것”이다. “은혜란 주는 이가 스스로 값을 치렀기에 값이 없는 것”이다.

비은혜의 사슬이 대를 잇는 한 가문의 비극을 소개하는 4장부터 용서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책 제목대로, 은혜가 시험받는 자리, 곧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용서의 문제를 5-8장에 걸쳐 살핀다.

5장은 용서가 ‘비본성적 행위’라는 데 주목한다. 본성을 따라가자면 비은혜의 길, 용서하지 않는 길에 이른다. 이 길이 우리의 본성에 맞다. 하지만 그 길은 막다른 길이다. 본성을 거스르는 용서만이 살 길이다. 그래서 얀시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란 믿음의 행위”라고. “비은혜의 간격을 잇는 유일한 처방은 용서의 가느다란 끈”이라고.

6장에서는 용서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따져 본다. 첫째, 용서만이 비난과 고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가지 이유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면 좋겠다.

7장의 제목은 ‘복수’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을 유일한 길은 용서다. 여러 사례 중에서도 테러와 복수의 악순환에 갇혀 있던 북아일랜드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한 고든 윌슨의 이야기는 특히 감동적이다. 테러 공격에 딸을 잃고도 그것을 복수의 계기로 삼지 않고 여기서 폭력을 끊자고 호소함으로써 피의 악순환을 끊어냈다.

8장 ‘은혜의 무기고’에는 은혜와 용서의 사례가 대거 등장한다. 동독 의회가 폴란드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목, KGB 장교의 회개와 기독교 전도자의 용서 장면은 우리가 모르고 넘어갔던 역사 속 특별한 장면들이다. 

 9장에서는 은혜를 위해 윤리와 규율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 중력과 은혜다. 중력의 힘은 “자기애라는 중력장에 갇혀 은혜가 지나갈 통로를 막아 버린다.” 영적 ‘중력’의 힘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신이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자임을 깨닫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그것을 깨닫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유쾌한 거지”가 되어 하나님께 두 손 벌려 은혜를 구한다고 말한다. 거기서부터 은혜를 받고 누리고 나누는 삶이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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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시험대


이 책의 원제는 ‘용서의 스캔들’(The Scandal of Forgiveness)이다. 붉은 기운의 표지는 용서가 얼마나 부당한 것이고 거북하고 어려운 것인지 고발하려는 듯 어둡고 도발적이다. 반면 한국어 번역본의 표지는 차분하고 부드럽고 우아하다. 원서의 제목과 표지가 경고와 도전장의 느낌이라면, 번역본의 제목과 표지는 초대장의 느낌이랄까. 내가 볼 때 이 책에는 두 가지 측면이 다 있다. 그렇기에 도발적인 내용을 부드러운 표지 디자인이라는 당의(糖衣)에 감싼 번역서 편집자의 결정에 동의한다. 나도 이 책을 얀시가 건네는 초대장으로 읽어서다.

이 책은 용서를 줄곧 말하지만 용서의 기술이나 방법론을 설파하지는 않는다. 용서하는 사례와 용서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이 등장하지만, 용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정의가 체계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용서의 세계류의 실전 안내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초대하는 책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하나님인지,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받는 존재인지 말한다. 비은혜의 세계와 은혜의 세계를 소개하고, 두 세계를 가르는 시험대라 할 용서의 사례들과 용서하지 못한 사례들을 나열한다. 비용서, 비은혜의 세계에는 답이 없다는 것, 용서와 은혜의 세계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끈질기게 ‘보여 준다.’ 독자도 마침내 은혜의 세계, 용서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일임을 자각하고 은혜를 구하기에 이르도록.



누가 읽어야 할까 


1. 한국 교회에 이 책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 사회에는 증오와 혐오, 분노가 가득하다. 많은 한국 교회도 다르지 않고, 아예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모습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교회의 이런 태도를 진리를 향한 열정이나 의분으로 포장하기도 하지만 한 꺼풀 벗겨 보면 그 아래에는 비은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지 않은지 우려스럽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용서: 은혜를 시험하는 자리』의 마지막 장에서 얀시는 자기를 보는 시각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고백한다. 자기를 은혜가 필요한 존재로 보게 되자 교회도 달리 보였다. 교회 속의 못난 사람들이 다 은혜에 굶주린 이들로 보였다, 은혜의 렌즈로 보자 교회 바깥 사람들도 달리 보였다.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이들을 봐도 ‘이 사람은 몹시 목마른 사람일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 그에 따르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다. 교회가 자신이 받은 것, 자신이 나누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배워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발걸음에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2. 어떤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할 수 있을까? 독자의 인생에서 어떤 시기에 이 책을 권하는 게 더 좋을지 고민할 수는 있겠지만, 이 책의 잠재적 독자가 아닌 사람은 없을 듯하다. 용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은혜가 없어도 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 관심이 가지 않고 이 책을 손에 들기 싫은 사람이야말로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일단 이 책을 읽고 내가 떠올린 초대자 명단을 적어 본다. 그분들에게 이 책이 가닿기를.


-하나님을 생각하면 두려운 심판자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

-하나님 하면, 찡그린 얼굴의 엄격한 부모(조부모, 양육자)가 떠오르는 사람

-은혜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 사람

-은혜의 신선한 바람을 맡아 보고 싶은 사람

-기독교에서 은혜, 은혜, 하는 이유가 궁금한 사람

-용서를 말하는 것이 답답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

-너무 미운 사람이 있는 사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

-용서하고 싶은데 영감과 자극이 필요한 사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감동적으로 읽은 사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읽다가 중단한 사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안 읽은 사람



홍종락

전업 번역가이고 가끔 글도 쓴다. 필립 얀시의 『빛이 드리운 자리』(비아토르) 『수상한 소문』 『그들이 나를 살렸네』(이상 포이에마) 『한밤을 걷는 기도』(두란노) 등을 번역했고 저서로는 『악마의 눈이 보여 주는 것』(비아토르), 『오리지널 에필로그』(홍성사)가 있다.

IVP 20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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