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 서평

자연신학에 대한 새 판 짜기(김형태)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링크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본문


톰 라이트, 『역사와 종말론』



daef684981b09b23314656cfe28ccafa_1669776537_34.jpg

 


 

N. T. 라이트의 『역사와 종말론』은 2018년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교에서 열렸던 그의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을 정리하여 2019년에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기포드 강연은 스코틀랜드의 법률가 애덤 기포드(Adam Gifford) 경의 유언에 따라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에 대한 연구를 증진 및 확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리는 강연으로, 1888년에 시작된 이래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네 대학교인 애버딘, 에든버러, 글래스고,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진행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칼 세이건 등의 과학자부터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한나 아렌트, 폴 리쾨르 등의 철학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칼 바르트, 위르겐 몰트만 등의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역대 기포드 강연자의 화려한 면면을 보면 이 강연의 강연자로 선정된다는 것이 학자로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쉽게 짐작하게 한다.


  신약성서학자로서 마지막 기포드 강연자는 1955년에 강연했던, 20세기 최고의 신약성서학자로 종종 언급되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었다. 그리고 그의 강연 제목이 바로 “역사와 종말론”(History and Eschatology)이었다. 즉, 제목만 보고서도 N. T. 라이트가 바로 불트만의 1955년 강연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강연 “여명을 분별하며: 역사, 종말론, 새 창조”(Discerning the Dawn: History, Eschatology and New Creation)를 준비했고 단행본 『역사와 종말론』(History and Eschatology: Jesus and the Promise of Natural Theology)을 출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라이트가 자연신학을 다루며 제기하는 주장은 새롭게 다가온다.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이나 자연 속에서 얻어진 지식과 경험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존재 및 속성을 논하는 신학 분과이므로, 일반적으로 특별 계시로 일컬어지는 성경이나 계시의 초자연적 현현으로 여겨지는 예수와는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그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라이트는 자연신학이 성경 및 예수와는 마치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 이유를 하늘과 땅, 자연과 초자연을 분리하는 에피쿠로스주의가 근대 이후에 부정적으로 계승된 영향이라고 간주하면서, 성경과 예수를 자연신학의 논의에 포함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는 자연 세계 속에 실존했던 역사상의 인물이었으며 성경 역시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는 인간의 책이기에 자연신학 논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 라이트는 이 책을 4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처럼 4부로 구성하고 각 부에 2개의 장을 배치한다. 각 장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1장에서 저자는 18세기 초 기독교의 낙관론을 무참히 전복시켰던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과 이로 인한 에피쿠로스주의의 급부상을 소개하면서, 자연신학의 논의와 연관된 17-18세기 사상사의 흐름을 살핀다. 2장에서는 근현대에 걸쳐 이신론, 더 근원적으로는 에피쿠로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비평학적으로 연구되어 온 복음서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 연구의 문제를 다루면서, 역사적 예수는 하늘과 땅을 분리하지 않는 1세기 유대적 세계관 속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장에서 저자는 쉽게 정의하기 힘든 개념인 역사의 의미를 다루면서, 역사적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 및 “사랑의 인식론”(epistemology of love)을 제안한다. 4장에서는 혼란을 주기 쉬운 용어인 종말론과 묵시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이를 실존주의적으로 이해하거나(불트만) 가시적 선례가 없는 신적 승리(마틴) 혹은 임박한 세상의 종말(슈바이처)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옳지 못하며, 새 창조의 종말론은 우주의 소멸이나 순전히 초자연적인 존재로의 대체가 아니라 시공간이 있는 창조 세계에서의 변혁적 사건을 예견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신학의 논의 속에 과감하게 성경과 예수를 포함시키는, 심지어 중심에 두는 저자의 새로운 제안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부분은 책의 후반부인 5-8장이다. 5장에서는 그동안 자연신학의 논의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무시되어 온 유대 전통, 즉 제2성전기 유대교의 세계관에서 본 성전과 안식일과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소개하며 이를 새 창조의 종말론과 연결한다. 새 창조의 종말론 속에서 성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안식일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현재로 미리 예견하며, 하나님의 참 형상은 역사 속에 있는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다. 6장에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이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한 창조주의 구속적이며 변혁적인 사랑을 드러내면서 실제 세계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포함하는 새로운 통전적 앎의 방식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하며 이를 “사랑의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즉, 사랑에 의해 부활을 믿게 되고, 그 사랑의 눈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볼 때 새 창조의 종말론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신이 “망가진 이정표”라고 명명한 인간 소명의 7가지 특성(정의, 아름다움, 자유, 진실, 권력, 영성, 관계)은 자연 세계에 속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그의 부활이라는 궁극의 이정표를 통해서 재해석될 때 비로소 참된 이정표 혹은 참된 자연 계시로 작동하게 된다고 주장하며(7장), 이를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교회의 사명으로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연결한다(8장).


  필자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면서, 우선 역사와 철학과 문학과 신학 등 서로 연계된 학문을 넘나들며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는 라이트의 박학다식함에 압도당했고 현재까지 펼쳐진 자연신학 논의의 장에 성경과 예수라는 담론을 추가해 새 판을 짜려는 그의 대담한 기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라이트의 바로 그 박학다식함,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장황한 스타일 때문에 그의 논지를 파악하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3장에서 ‘역사’의 의미를 다루는 내용이 과연 자연신학에 대한 라이트의 핵심 주장에 얼마나 크게 공헌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아울러, 누군가는 지금까지의 게임의 법칙을 깨는 라이트의 방법론적 대담함 때문에 그의 주장이 과연 정당한지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성경과 예수를 자연신학 논의에 포함시키자는 라이트의 대담한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실제로 그것이 얼마나 신선하고 건설적인 결과를 도출하고 있는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실 자연 계시(혹은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관행과 틀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면, 라이트의 주장은 전통적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설명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칼뱅도 『기독교 강요』 제1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논하면서, 이미 에피쿠로스주의 신관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가 있다(Inst., I.2.1). 또한 칼뱅은 성경을 안경에 비유하면서, 성경이야말로 자연 속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흐릿하게 보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안내자와 교사로 묘사하였다(Inst., I.6.1). 마찬가지로 칼뱅은 인류가 죄로 황폐해 있는 상태에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셔야만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구속주로서 비로소 인식할 수 있게 됨을 강조한다. 즉 칼뱅은 성경과 예수를 통해서만 창조주와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 지식(duplex cognitio Dei)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Inst., I.2.1). 이는 성경에 계시된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이라는 궁극적 이정표를 통해서만, 즉 새 창조의 종말론적 시각을 통해서만 창조 세계에 계시된 사랑의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망가진 이정표들이 회복될 수 있다는 라이트의 주장과 표현을 달리할 뿐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필자의 제한된 지식과 이해 때문에 이런 평가가 필자의 은사 중 한 분인 라이트의 업적을 격하시킨 것은 아닌지 죄송하기도 하다.


  하지만 라이트의 논의가 과연 얼마나 새로운가 하는 평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은 신약성서, 역사적 예수 탐구, 바울 연구 등에 큰 족적을 남긴 대가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기에(주의 깊은 독자들은 이 책 곳곳에서 라이트가 그간 남긴 여러 저술이 메아리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번 곱씹어서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에 나오는 에피쿠로스주의, 역사적 예수 탐구, 부활의 역사성 논증, ‘비판적 실재론’, ‘사랑의 인식론’ 등의 내용을 라이트의 전작들인 『시대가 묻고 성경이 답하다』,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등에 나오는 관련 내용과 비교해서 읽으면, 각각의 주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라이트의 사상이 현재에 이르는 동안 어떤 식으로 발전하고 집대성되는지 살피며 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젖을 먹는 데 머무르지 않고 단단한 음식을 맛보고 싶은 용자들이여, 일어나 이 책을 집어서 먹으라!

 

 

 

김형태

기업연구소에서 개발자로 근무하다가 뒤늦게 신학의 길에 뛰어들어 목사가 되었고, 영국 더럼 대학교에서 바울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김포 고촌의 주님의보배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면서 목사-신학자(Pastor Theologian)의 길을 가고 있다. 번역서로 『바울과 은혜의 능력』(감은사)이 있다.

IVP 2022-11-30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