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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에 관한 좋은 소식(제임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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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만일 파워가 선하고 창조적일 수 있다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다음의 질문을 품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파워를 추구해야 하는가?”


 제임스 스미스

번역 김명윤

책 『사람의 권력 하나님의 권력』앤디 크라우치 지음



이 글은 2013927, Cardus에서 발행하는 공공신학 매거진 Comment에 제임스 스미스가 쓴 서평 “The Good News About Power”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은 https://comment.org/the-good-news-about-powe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파워를 갖고 싶어.” 이런 발언은 우리가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들의 마음에 심어 주는 일종의 경향이다. 사실 파워를 추구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만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개가 될 수 있다. 핑키와 브레인(Pinky and the Brain)1)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말이다. “, 오늘 밤에는 뭐 할 거야?” 핑키가 진지하게 물으면 브레인은 광적으로 대답한다. “우리가 매일 밤 하는 거 있잖아, 핑키. 세계를 정복하러 가야지!”


그러나 만약 우리가 파워를 지배와 혼동해 온 것이라면? 만약 파워가 강요적이지 않고 창조적이라면? 만약 우리가 파워를 행사하기 위해 지음받았다면? 만약 파워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을 보여 주는 지울 수 없는 증거라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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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권능(power)을 받으리라


우리는 파워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쉽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에게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워와 폭력의 경계를 뭉개고 혼동한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파워가 곧 지배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서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납작하고 냉소적인 개념을 믿어 버린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지”(lording it over) 말라는 성경의 금지 명령이 귓가에 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것은 우리가 파워를 버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마치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어떤 이가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자리를 추구하면 그를 야망 있는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물론 칭찬은 아니다.

 

사람의 권력 하나님의 권력에서 앤디 크라우치는 우리가 파워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성경 내러티브의 처음에 파워를 행사하라고 인류에게 위임하시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선한 창조세계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감당하는 책임은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것이고 다른 피조물들을 정복함으로써 땅을 충만히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로서 우리의 사명은 이 땅을 가꾸고 경작해서 하나님께서 그 안에 두신 모든 잠재력과 약속을 펼쳐 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파워가 맡겨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가서 억압하고 착취하고 지배하라는 위임이 아니다. 이것은 가꾸고 돌보고 섬기라는 명령이다. 파워는 단지 (force)이 아니다. 파워는 라틴어 포텐티아’(potentia)이고, 무엇을 감당하는 능력이며, 하나님이 이 창조세계에 접어 두신 잠재력 전부를 풀어 낼 가능성이다. 파워를 행사하지 않는 문화 행위는 없다. 우리가 파워를 행사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실패하는 것이다. 이것이 크라우치가 파워의 가장 깊이 있는 형태가 창조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는 파워를 창조적 사랑으로 다시 상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나눌 때 증식하는 파워, 파워를 부여하는 파워 말이다. 이것이 오순절이 새로운 창조이자 두 번째 에덴인 이유다.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하신 약속은 창조 이야기의 메아리다.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1:8).



우상숭배, 불의 그리고 보이지 않는 파워


크라우치는 파워가 잘못되어 지배와 억압과 배제로 변질되는 모든 방식들에 심히 민감하다. 우리가 파워를 비축하여 우리 자신들만 이익을 얻고 다른 사람들은 배제하는 제로섬 상품이 되게 할 때, 우리의 파워 행사는 파워가 없는 사람들을 위태롭게 하고 우리 이웃들을 비인간화한다. 내가 파워를 나를 위한 파워로 여길 때, 파워는 지배의 전략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격하시키며 내쫓기 위해 사용하는 몽둥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내 것을 챙기기위해서나 우리의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파워나 권위를 추구할 때, 파워는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기만 하다.


그는 가장 악하게 사용될 때 파워는 인간성을 해체한다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파워를 행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우상이 되고 우상들을 만든다. 크라우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을 만드는 것과 신 행세를 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나는 모든 불의가 우상숭배의 표현으로 환원된다는 주장을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하지만, 이 방면에서 크라우치의 분석은 매우 설득력 있고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지배를 위해 노골적으로 장악하는 것도 부당하지만 크라우치는 파워의 자비로운 행사에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는데, 우리의 자비로운 신 행세가 억압과 지배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고 도리어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요약해서 소개하는 커트 베어빅(Kurt Verbeek)의 단기선교 연구2)는 매우 예리한 사례연구다.] “숨겨진 파워를 다루는 6장은 이 책에서 가장 좋은 부분 중 하나다. 이 장을 읽으면서 나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rster Wallace)가 그의 유명한 케니언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들려준 우화 이것이 물이다3)가 생각났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같이 헤엄치다가 반대 방향에서 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를 만났다. 그 물고기가 어린 물고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얘들아, 그쪽 물은 어떠니?” 어린 물고기들은 한동안 가던 길을 계속 헤엄쳐 갔지만 결국 한 물고기가 옆의 물고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도대체 물이라는 게 뭐야?”

크라우치는 특권을 가진 물고기들에게 아마도 처음으로, 우리의 환경을 구성하는 파워라는 물을 인식하도록 초대한다. 이는 마치 뭄바이 공항의 탑승 수속 줄에서 유일한 백인 미국인이었던 그가, 단지 백인이고 미국인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즉각 줄의 맨 앞으로 안내받았을 때와 같은 경험이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지친 노동자들을 지나쳐 걸어가면서, 크라우치는 그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부여받은 특권들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 경험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파워가 작용했던 다른 경우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했다. “얼마나 자주, 나는 줄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줄의 맨 앞에 서게 되었을까?”



특권에 관한 좋은 소식?


좋은 책은 당신이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해 보지 않았을 법한 질문을 하도록 이끈다. 훌륭한 책은 그런 것들을 당신이 잠시도 떨쳐 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깊이 심어 버린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권력 하나님의 권력은 훌륭한 책이다. 이 책은 내가 떨쳐 낼 수 없었던(혹은 답할 수 없었던!) 끈질긴 질문들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크라우치와 함께 생각나는 대로 파워와 특권과 지위에 관련된 몇 가지 역학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책 중반에서 크라우치는 유용한 지도로서 우리가 자주 혼동하는 단어들(파워, 물리적 힘, 강요, 폭력)을 모두 담은 용어 사전을 제공한다. 나는 그가 파워와 지위에 대해 논한 부분에서 가장 큰 흥미를 느꼈다. 크라우치에 따르면 특권은 특별한 종류의 파워다. 그것은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파워다. 사실, 오직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만 우리는 그것을 조금 이나마 의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특권은 과거의 성공적 파워 행사에 따르는 지속적 혜택이기 때문이다. 특권은 나 자신의 파워가 아닌 경우까지도 포함한 과거의 파워 행사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파워다. 사실, 특권은 종종 세대 간에 물려받는 유산이다.


크라우치는 특권이 나쁘지는 않지만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특히 안 보이기 쉽고, 그런 경우 그것을 남용하기가 더 쉽다. 게다가 우리는 진정한 파워 행사가 아닌 다른 많은 목적을 위해 특권의 혜택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우리가 가진 다른 어느 파워와 능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든 상속받은 것이든 항상 이 파워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결국 크라우치는 특권의 죄책과 자기혐오라는 자유주의적 자의식의 유희에 빠져드는 유혹을 피한다. 반대로 크라우치는 현실적인 평가를 한다. “진정한 파워 행사는 많은 경우 우리의 특권을 이용해서 우리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게 함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가진 특권에 대해 한탄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이용할 수는 없다. 당신이 다트머스 대학 졸업생의 세 번째 세대라면 그것은 파워와 특권이라는 특별한 선물의 수혜자라는 의미다. 여기에 반응하는 방법은 그것을 갖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파워를 잘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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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에 대한 크라우치의 평가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다소 특이한) 정의에 따르면, 지위란 순수한 특권이며 늘어선 줄에서 당신의 위치. 그러므로 정의상 지위는 희소한 자원이다. “줄의 맨 앞에는 한 사람만 설 수 있다.” 그는 지위는 궁극적으로 배제에 대한 것이라고 제안한다.

 

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특권을 긍정하면서 지위는 악마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데,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이미 어떤 지위가 주어져 있지 않은 특권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 속의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라. 바로가 요셉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신뢰한 것은 그의 지위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히브리 청년들이 느부갓네살왕의 궁정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던 것은 특권층이었던 그들의 고귀한지위 덕분이었음이 확실해 보인다(1:3-5). 로마 시민이라는 바울의 지위 덕분에 그가 황제 앞에서 증언할 권리를 얻지 않았던가? 그는 그것을 기꺼이 사용하고자 했다(16:37-38; 22:25-29).


나는 지위가 크라우치가 생각하듯 배타적이라고도 확신하지 않는다. 여러 줄이 있을 수 있고, 반드시 각 줄의 맨 앞에 선 한 사람만 특권이나 지위를 갖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리키 바비4)의 평생을 좌우했던 어리석은 좌우명, “첫째가 아니라면, 꼴찌일 뿐!”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둘째, 셋째, 넷째도 될 수 있다.

 

확실히 우리는 특권과 지위 모두를 우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우상숭배 경향이 창조의 선함을 비난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걸림돌이 되고 죄가 되는 것은 특권과 지위가 분배되는 기준에 있다. 내가 단지 내 피부색 때문에 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부당한 것이다. 그러나 교육과 덕과 근면을 가치 있게 여기는 한 집안의 영속하는 구조 때문에 특권의 상속자가 되는 손자손녀가 있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내 안에 있는 끈질긴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특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특권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는 것이 거룩한 열망이 될 수 있을까? ‘기득권 포기가 찬양받는 시대에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만일 파워에 관해 크라우치가 옳다면, 그리고 만일 특권이 영향력 있고 창조적인 문화 창조(culture-making)를 일으킬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옳다면, 우리는 특권이 추구하고 공유할 만한 것이 아닐지 고려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샬롬을 추구하고자 하고 우리 사회의 구조를 하나님 나라에 가깝게 변화시킬 위치에 있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다양한 문화 분야에서 파워와 권위를 획득하기를 열망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수줍어하거나 소심하거나 겸손한것도 사실상 우리의 의무와 희망을 회피하는 것일 수 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여기서 이전에 크라우치와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dson Hunter)가 문화적 변화와 파워의 엘리트 중심성에 대해 벌인 논쟁의 메아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는 그 울림을 배경으로만 놓아두겠다.]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부모의 입장에서, 또 한편으로는 교수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이 두 가지 부르심에서 나는 내가 어떤 파워를 가졌든지 다음 세대가 그들의 이웃을 위해 하나님 형상을 나타내는 문화 창조자들이 되도록 그들에게 파워를 부여하는 데 내 파워를 사용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파워의 선한 행사가 내 자녀들과 학생들에게 쌓이고 또 그들의 자녀들과 그들의 학생들에게 쌓여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문화적 업무들에 그들이 투입될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외부의 접근이 차단된 고급 거주지에 살면서 고급 SUV 세 대는 주차해 놓고 개인용 제트기를 타고 명승지로 놀러 다니는 그런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는 방식으로 그들의 영향력에 대한 엄청난 책임을 떠맡고 그들의 이웃에게 파워를 부여함으로써 샬롬을 가져오기 위해서 말이다.


언젠가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내게 마이클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를 인용하며 이렇게 일깨워 주었다. “경력을 만들어 내는 데 여러 세대가 걸린다네.” 우리가 지배를 위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와 갱신의 행위자가 될 수 있는 권위와 영향력의 위치에 이르기 위해서 파워의 눈덩이를 굴리려면 역시 여러 세대가 걸릴 것이다.



파워에 대한 다른 이야기


사람의 권력 하나님의 권력은 그 책의 성격상, 개념을 형성하는 작업이기도 하고 파워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상상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크라우치의 주장은 철학의 영역을 밟아 간다. 그렇다고 학문적인 책인 척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전문적인 학술 용어로 이 책을 비판하는 것은 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학자들은 크라우치의 참고도서 목록이 좀 당황스러울 만큼 얇다고 느낄 것이다. 이쪽 학문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크라우치 자신의 경험과 성찰을 통해 거의 ()로부터’(ex nihilo) 출현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우리 다수에게는 이 책의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료들과 영향들이 분명히 보인다. 각주는 그저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여 주는 지루한 방식이 아니다. 내가 진 빚을 갚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철학적 차원의 질문을 한 가지 하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크라우치는 문화 현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영(spirit)을 분별하기 위해, 즉 그 현상들을 뒷받침하는 세계관을 포착하기 위해 문화 현상을 읽어 간다. 예를 들어 서부 영화의 전제는 파리대왕에서 헝거 게임에 이르는 니체류의 문학 작품들의 전제와 마찬가지로, 문명의 덫을 벗어 버리면 모든 공간을 차지하려는 경쟁 속에 있는 실체들의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갈등을 보게 된다는 것이라는 분석을 생각해 보자. 이에 대해 크라우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 세계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진리는 무엇인가? 장악과 지배를 위한 투쟁인가? 아니면 궁극적으로 사랑에 이르는 협력과 협동인가?” 그의 대답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이다. 그는 나는 궁극적 실체에 대한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지고 니체의 사상을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음을 논증하고 싶다고 강조한다.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옳다. 근원에까지 이르러서 우리가 파워를 어떻게 구상하는가가 근본적으로 다른 신화들, 다른 신념의 입장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당신이 파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떤 신앙고백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런 면에서 크라우치의 비판과 재진술은 자신도 모르게, 그러나 더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존 밀뱅크(John Milbank)가 그의 기념비적 저술인 신학과 사회이론(Theology and Social Theory, 특히 10)에서 니체를 비판한 것을 그대로 재연한다. 파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파워를 무너뜨려 폭력과 지배가 되게 하는 신화를 거부한다. 우리는 파워가 창조적 선물이고, 그 파워를 바르게 사용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확신한다.


그러나 크라우치는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까지 가지는 않는다. 그는 니체류의 대립하는 파워의 신화가 정치적 자유주의의 근저에 깔린 신화의 일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홉스와 로크와 루소는 모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자연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계약에 대한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연스러운 경쟁(파워를 차지하기 위한 제로섬 게임)이라는 이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미국 독립선언문과 미국 헌법의 근저에 깔려 있고, 온화하다는 우리 민주주의 제도가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나는 크라우치의 편이다. 우리는 원초적 갈등과 최초의 지배에 관한 이야기들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학문적인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선거 정치와 자유시장 같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제도들에 새겨져 있다. 거기서 근본적 갈등과 대립의 이야기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 생각에는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비전과 같은 류의, 더 공동체주의적 사회 이해가 되겠지만 이 주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다.] 우리가 니체의 입장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담대하게주장하는 것은 좋지만, 만일 같은 논리로 우리가 자유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어떻겠는가?


철학적 이야기를 한 가지만 더 하자면, 크라우치는 우리 시대의 철학이 특히 미셸 푸코 이래로 파워에 대한 질문을 다시 취했다고 바르게 지적했다. 푸코나 니체 같은 인물들에 대한 그의 피상적인 독서를 상세하게 지적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푸코가 크라우치의 주장에 놀랄 만한 지지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만은 짚고자 한다. 사실 푸코는 그의 기념비적 작품인 감시와 처벌(Discipline and Punish)에서 크라우치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파워의 영향을 부정적 용어들로 묘사하는 것을 완전히 중단해야 한다. ‘배제한다’ ‘억압한다’ ‘검열한다’ ‘추상화한다’ ‘가린다’ ‘숨긴다같은 용어들 말이다. 사실 파워는 생산한다. 파워는 현실을 생산한다.” 이 주장은 사람의 권력 하나님의 권력과 매우 흡사하게 들린다.



하나님의 역할을 감당하기


사람의 권력 하나님의 권력이 선포하는 파워에 관한 좋은 소식은 중요하면서도 시의 적절하다. 파워를 배타적으로 장악하려고 하는 우리의 권력 애호적 성향에 대해서뿐 아니라, 권력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책임을 떠맡으려 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작용하는 해독제가 되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더 교훈적인 것은 후자의 강조라고 생각한다. 파워의 선함을 그려 내면서 크라우치는 기독교적지배의 추한 사례들을 너무나 많이 본 나머지 파워에 대한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져 망설이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밀어붙인다. 그런 사례들을 보면서, 또 여기에 촌스러운 중서부의 내성적인 성격이 일부 영향을 미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지배와 파워를 혼동하는 덫에 걸려 버린 것 같다. 그러나 크라우치는, 우리가 주저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사실 우리는 이미 파워를 가지고 있고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책임을 회피하는 그러한 태도는 제도 속에서도 실패로 나타난다. 크라우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패한 제도에서는 파워의 남용만큼이나 파워의 방치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제도가 실패할 때는 파워를 행사하는 데 실패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크라우치가 붙인 제목(“Playing God”)의 이중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한편으로, 우리가 파워를 오용하여 억압하고 배제하는 우상들을 만들어 낸다면 우리는 피조물들에 대해 신 행세를 하는 것’(playing god)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사랑 안에서 파워를 바르게 잘 행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 속에 거하며 세상을 위해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역할을 감당’(playing God)하라는 창조의 명령을 실제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는 경고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신의 역할을 하고 있느냐에 있지 않다. 우리는 분명히 어떤 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신의 역할을 하느냐다.” 



 

1)유전자 변이 생쥐인 핑키와 브레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미국 애니메이션. 매일 밤 세계 정복을 나섰다가 실패하는 이야기들이 반복된다. - 옮긴이 주.

2)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5/juneweb-only/12.0c.html - 필자 주. 본문 밑줄 부분을 클릭하면 링크로 연결.

3)https://www.theguardian.com/books/2008/sep/20/fiction - 필자 주. 본문 밑줄 부분을 클릭하면 링크로 연결.

4)2006년 개봉한 미국의 스포츠 코미디 영화 텔라데가 나이트: 리키 바비의 발라드(Talladega Nights: The Ballad of Ricky Bobby)의 주인공. - 옮긴이 주.




제임스 스미스

2013-2018코멘트’(Comment)의 편집장을 지냈고 칼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이미지 저널’(Image Journal)의 편집장이다.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왕을 기다리며》,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급진 정통주의 신학》,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 《해석의 타락》 등 여러 책을 저술하고 편집했다 

 

   



IVP 20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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