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말할 수 없는 신비(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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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관
책 <가만히 위로하는 마음으로> 김영봉 지음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의약분업 제도가 2000년 한국에서 시행되면서 우리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문구입니다.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세분화된 전문가 집단에게 진료 그리고 제조를 받으면 우리 삶이 아픔으로부터 안녕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보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에 빠진 이는 누구에게 가야 할까요? ‘말할 수 없는’은 고통과 친한 수식어구입니다.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고통입니다. 그저 ‘악!’ 소리 나는 신음이 터져 나올 뿐이지요. ‘내가 이만큼 아파’라고 우리는 말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나의 아픔에 대한 이해가 아닌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타인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말은 온기 가득한 공감의 표시가 아닙니다. ‘야, 나도 그런 경험 있었어. 나도 그때 우울하고 아팠는데…’라는 진부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용기를 내 ‘악!’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또 다른 ‘악!’이 메아리쳐 돌아옵니다.
우리는 영원히 고통에 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고통에 이다지도 무능한 것일까요. ‘위로’라는 말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 아니, 좀더 솔직해지자면 당신의 고통을 가만히 위로하는 마음이 나에게 존재하기는 할까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이 고통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정말 불가능한 것이더군요.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누가 나를 위로한다고!’ 냉소 가득한 낮을 보내고 ‘모두가 나를 잊었어!’라는 우울에 젖어 밤을 지새운 지 오랩니다. 의사에게 진료도 받아보고 약사에게 약도 제조 받았지만 별 소용이 없더군요. 삶의 끝자락에서 끝을 선택할 용기가 없어 마지못해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습니다. 누가 저를 위로하실 수 있나요?
『가만히 위로하는 마음으로』 (IVP, 2019)의 저자 김영봉은 개신교 목사입니다. 목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글을 그만 읽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만큼 한국 개신교가 당신을 위로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치유, 회복, 위로에 관한 말은 넘치지만, 당신의 ‘악!’ 하는 소리에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제 말에 잠시 귀 기울여 주시겠어요? ‘아무도 날 위로할 수 없어!’라며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던 저를 저자가 어떻게 가만히 위로하였는지를요.
이 위로는 평범한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누구나 아프다’라는 사실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하나님이 말씀과 사랑으로 직조한 삶의 질서가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진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목사인 저자도 고통의 근원엔 인간의 죄가 있음을 주지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아프다’라는 것이죠. 이렇게 고통을 보편화시키면 사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고 합니다. 고통에 몸서리친 끝에 우리는 자조합니다. ‘하, 왜 살아야 하지?’ 고통이 삶의 이유를 잠식한 것입니다. 삶의 이유가 고통에 잠식당한 사람은 고통의 심연에 가라앉게 됩니다. 더욱 우릴 괴롭게 하는 사실은 고통의 심연에 빨려 들어갈수록 ‘왜 살아야 하는지’ 우린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고통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저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아프다. 누구나 아프다.’ 이 꾸밈없는 사실은 ‘왜 살지?’ 자조하는 저를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고 질문하게 했습니다. 고통에 수동적이었던 제가 능동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고 성찰하게 된 것이죠. ‘누구나 아프다’라는 말은 고통의 심연에서 수면으로 우리 존재를 떠오르게 하는 부력과 같은 것일까요? 적어도 제겐 그랬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용서하(받)기,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신뢰하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존재입니다. 상대의 실수와 잘못을 용납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용서가 두렵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상대를 향한 분노와 원한으로 마음에 응어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용서하지 않는 우린 또다시 힘들어합니다. 용서하는 존재로 지어진 우리는 본성상 증오심과 분노를 품고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죄로 인해 우리 마음에 자리한 ‘두려움’을 이겨낸 사람입니다. 이 능력은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상처와 고통, 분노와 원한으로 얼룩진 우리 마음에 자리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복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한 자는 용서하고 사과(용서보다 어렵습니다)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관계에서 주고받는 상처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 구조와 제도에서 비롯하는 고통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이 부분을 많이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래에 있는 다수의 분노와 원한이 그저 개인적인 관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고맙게도 저자는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공정하지 않은 현실 앞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젊은 세대에게 머리 숙여 사과를 표합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책임과 사과 그 너머의 것을 함께 바라보자고 제안합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희년정신을 예수께서 이 땅에서 마침내 이뤄내셨으니 하나님 나라를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영원한 춤판에 참여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지금 서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정의롭게 살아가도록 힘쓰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고치도록 힘쓰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에 희생당하고 낙오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야 합니다.”(102)
믿는 사람은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고난과 고통 중에도 내 삶을 이끌고 계신 절대자를 신뢰하는 사람이지요. 저자의 말마따나 “하나님으로 충분한 사람”은 무언가 부족하고 공허하다는 결핍의식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세상의 욕망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가지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채워진 상태에서 나누고 베풀고 섬기기” 위해 살아갑니다. 결핍의식에서 비롯된 ‘불안과 초조’(이것 또한 고통이지요)에 대한 신앙인의 마음가짐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왜 살아야 하지?’라는 자조에서 벗어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고민했습니다. 목사인 저자의 도움으로요. 어떠신가요? ‘용서하(받)기,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신뢰하기.’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삶은 풀리지 않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까지 품을 수 있는 신비로 다가올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더 나아가 죽음 또한 신비로 마주할 수 있을 거라면서요. 죽음이야말로 고통의 끝판왕이라 하나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는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서 고통스러웠던 건 아니었네요. 그래서일까요? 죽음에 관한 저자의 이야기(5부)에 수긍은 갔지만, 제목처럼 지금 제게 위로가 되는 부분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그날이 제게 올 때 죽음을 품어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고 고통에서 벗어났을까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을까요? 미안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신박하게 풀어낼 마법의 언어는 이 책에 없습니다. 다만 죽고 싶던 제가, 삶이 저주였던 제가 ‘삶이 축복이고 신비일 수 있겠다’라고 가만히 저를 위로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에 침잠하는 당신의 곁에 제가 머물 수 있는 이유도 발견했고요. 그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눈물을 거두고 잠시 이 책을 들어보는 게 어떠하실는지요.
윤관
삶을 사랑하려고 애쓴다. 전주강림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와 공동주최하여 진행한 서평단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