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가 남긴 젊은 날의 내밀한 기록(윌리엄 세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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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플래너리 오코너의 기도 일기> 서문
나의 하나님,
당신이 무언가를 주시기 전까지는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심지어 기도를 할 때도
당신이 우리 안에서 기도를 하셔야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아름다운 기도를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자원이 제게는 없습니다.
(본문 중에서)
1946년 1월부터 1947년 9월까지, 플래너리 오코너는 사실상 기도라 할 수 있는 여러 편의 일기를 썼다.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스물한 살이 채 되기 전이었는데, 마지막 일기를 쓴 스물두 살에는 이 기도 일기로 인해 그녀의 삶이 달라졌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 일기는 애초 저널리즘을 공부하러 갔다가 작가 지망생으로 전환한 아이오와시티에서 쓴 것으로, 오코너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인생과 대면한다. 그녀는 이 일기에서, 1925년 3월 25일 조지아주 서배너에서 태어난 이래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믿어 온 어떤 힘에 자신을 바친다. 아이오와시티는 미국의 중심부로, 그녀가 살았던 이국적이면서 다인종이 살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 항구 도시 서배너와는 양극단에 있는 것 같았다. (서배너는 쿠바와 카리브해 지역으로 가기 전, 남쪽으로 향하는 가장 큰 마지막 항구였다.) 서배너는 오코너에게 인간 존재의 다양성 그 이상을 열어 주었다. 그곳에서 오코너가 배운 가톨릭 전례와 가르침은 젊은 날의 그녀에게 일관성 있는 하나의 우주를 형성했다. 그리고 1946년이 되자 서배너는 오코너를 아이오와의 대학 사회에 넘겨주었고, 그곳에서 오코너는 지적인 즐거움을 비롯한 새로운 영향들 속에서 의문과 회의 또한 경험했다.
그 자유 속에서 오코너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다소 드문 대화를 시작했다. 오코너는 이내 인생의 혼란스러움에 대한 단순한 사색들을 넘어서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처음 몇 페이지는 손실이 되었다—이 일기는 이례적인 대화로 발전하는 시적 외침들을 담고 있다. 그녀가 자신만의 기도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느닷없고 생략되어 있으면서도 연쇄적인 각각의 글들은 매우 강렬하다.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그녀는 외친다. “오 주님…[저를] 신비가로 만들어 주십시오, 즉시.” 이러한 긴박성은 실망에 찬 그녀의 마지막 절규에서도 나타난다. 그 무렵 오코너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 대상으로부터 곧바로 답을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말이다. 사소한 것들의 영역에서, 심지어 ‘성적인’ 영역에서도, 그녀는 ‘주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했다.
이 일기들은 언뜻 보이는 것과 달리 그렇게 즉흥적이지 않다. 불과 스물한 살의 나이에도 오코너는 최고의 기예를 지녔고, 이 책의 자필 원고에서도 그녀가 세심하게 자기 글을 교정한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을 드라마화하기 위해서—실제로 그녀는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작가였다—그녀는 당시 아이오와에서 배우고 있던 헨리 제임스의 방식으로 내용 보고(report)의 형식이 아니라 흐름 전달(render)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추구하며 기록했던 편지는 일기가 되었다. 일기의 내용은 단순하고, 친밀하며, 때로 유아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올림포스의 신들 같은 욕망을 드라마화하기도 하는데, 인간의 인생과 운명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관찰은 꽤 충격적이다. 어쩌면 초기 독자들과 반세기 넘게 묻혀 있던 자필의 종이 뭉치를 지켜 온 이들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코너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이 일기를 쓴 것일까? 그녀가 사랑하는 이로 상정한 이 대상은 누구일까? 이 일기에서 그녀는 일반적으로 그 존재를 하나님이라 칭한다. 복음서를 인용할 때만 ‘아버지’라 불렀고, ‘그리스도’를 직접 언급한 것은 몇 군데밖에 없다. 가장 직접적인 언급이 다음과 같은 간절한 간구다. “그리스도를 향한 내 감정이 평범함에 갇혀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느끼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주님, 저를 데려가 제가 가야 하는 쪽으로 서게 해 주십시오.” 그녀의 사랑은 보편적이었고,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살아 있었으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사랑이 절대자를 대변한 것이라면, 작가 자신은 일기의 암시들이 강조하듯 실제적이고 매우 인간적인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성은 상호 배타적인 용어가 아님은 물론이고, 이 젊은 작가는 자신의 일상적 세계가 역사 속의 특정 순간임을 알고 있었다. 일상적 세계의 중심은 늘 그 사랑하는 이에게 있었는데, 1940년대 후반의 분주한 아이오와시티 한가운데서 그녀는 자신이 그를 찾듯이 그도 자신을 찾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오와시티에는 전쟁 후 무상 교육을 받기 위해 군인들이 몰려들었고, 거리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오코너 입장에서는 놀랍게도, 심지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아무런 사회적 제약을 받지 않은 채 그곳에 있었다.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친구 작가 중 한 사람이었고 여러 번 같이 저녁을 먹었던 글로리아 브레머웰(Gloria Bremerwell)이라고 하는 젊은 여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당시 오코너는 아이오와시티에 흑인 남성들이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는 이발소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일기의 기도들은 분주한 교실, 도서관, 그리고 아이오와시티의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기도들이다. 한 층에 하나뿐인 욕실을 향해 있던 그녀의 기숙사 방은 결코 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없었다. 그 애매한 위치의 방에서 이 젊은 작가는 전열기 옆에 있는 펜, 연필, 타자기가 놓인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모든 냉장 식품들은 창밖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세상은 격리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아이오와에 있으면서 그녀는 자기 삶 안팎을 보는 문이 모두 열리는 것을 갈수록 많이 보았다. 많은 것의 영향이 집약되던 환경 속에서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은 그녀에게 가장 큰 의미였다.
실제로 이 기도들을 쓰면서 오코너는 자신의 첫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소설은 마침내 『현명한 피』(Wise Blood, IVP)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때는 1946년 감사절 방학이었고, 이 기도가 그 외에 어떤 일들을 이루었든지 간에, 매우 독창적인 이 미국 소설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 일기의 여파는 상당하다. 이 일기에서 자주 반복되는, 좋은 작가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이미 응답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 안에서 상상력을 펼쳐 낼 더 깊은 자원을 발견했다. 실제로, 오코너는 아이오와에 있으면서 콜리지(Coleridge)가 실행한 ‘불신의 자발적 유예’로 상상력을 배움으로써 그 유예 속에서 자유롭게 소설을 쓸 수 있는 법을 터득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과 기도 일기
일기의 막바지에 달할 무렵, 오코너는 자신을 직접 하나님께 바쳤다. 그때 그녀는 그 절대자를 더 사랑하고, 더 희생하기 위해 자신을 바치고자 했다. 그러나 1947년 9월 26일,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루프스라는 질병이 갑자기 들이닥치기 3년 전, 젊은 오코너는 마지막 일기를 썼다. 딱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다. 그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어졌”으며 엉킨 생각들 속에서 “이 글을 쓰면서 끌어올리는 감정은…가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바로 그날 그녀는 자신이 “스카치 오트밀 쿠키와 에로틱한 생각에 탐닉하는 식충이”라고 시인했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나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로 일기를 마친다.
그러나 사실은 할 말이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일기는 끝이 났지만, 일기에는 그때까지 오코너가 이룬 문학적 성취가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그녀의 고통과 죽음도 예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바치고자 했던 소망, 적어도 20세기에 와서는 기이한 일이 되어 버린 그 소망의 결과가 있었다. 그 소망을 가지고 오코너는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고통스러운 운명을 지닌, 그러나 그 기다림을 통해서만 비로소 살아 있는 인물들을 자기 소설 속에 만들어 냈다. [부정적으로는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A Good Man Is Hard to Find)의 미스핏과 같고, 혹은 긍정적으로는 “파커의 등”(Parker’s Back)에 나오는 타투를 한 남자나 “계시”(Revelation)의 루비 터핀과 같은 인물들이다.]
1950년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오코너는 혼자서 기차를 타고 코네티컷에서 조지아로 갔다. 그녀의 친구 샐리 피츠제럴드(Sally Fitzgerald)는 역에서 “밝은색 베레모를 쓴 활기찬 젊은 여성”을 배웅했다. 그러나 그녀를 마중 나온 삼촌에 따르면, 애틀랜타에 도착할 무렵 오코너는 “마치 노인처럼” 핼쑥하고 구부정했다고 한다. 북에서 남으로 가는 여행길에 루프스가 발병했고, 이 병으로 인해 오코너는 1964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다.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의 시간은 그녀에게 작가로서는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고, 미국 문학에서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소설들을 그때 써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이 일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윌리엄 세션스(William A. Sessions, 1928~2016)
미국 작가. 조지아 주립 대학교 명예 교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