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격론』해설(송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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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인규(해설)
책『창세기 격론』칼 헨리·존 월턴 외 지음
책의 배경과 내용 전달 방식
그리스도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창세기 첫 부분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창세기와 관련된 이슈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견해만이 유일하고 합당한 답변인 양 목청을 높이곤 한다.
구약학자 영블러드(1931-2014)는 이런 독불장군식 태도에 반대한다. 이미 창세기 주해서와 구약 해설서를 여러 권 집필했던 그는 좀 더 혁신적인 형태의 창세기 관련서를 내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창세기 앞부분(1-9장)에서 제기되는 이슈들 가운데 열한 가지를 뽑아 쌍방 토론을 벌이는 방식을 생각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여 토론을 벌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혹은 상반된 의견을 표명할 자리를 마련하자는 발상이었다.
『창세기 격론』이 논제를 취급하는 방식은 ‘일방적 전달식’과 ‘다관점 교류식’의 중간에 위치한다. 전자는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한 사람의 주장이나 견해만 전하는 방식이다. 후자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양한 입장의 전문가들이 자기 견해를 밝힌 뒤 나머지 참여자들의 비평을 듣는 식으로 진행된다. 대표적 예로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창조 기사 논쟁』, 『아담의 역사성 논쟁』 등이 있다. 영블러드는 이 두 가지 방식을 마다하고 중간 방식인 ‘상반 입장 병치식’(반대되는 두 가지 입장을 나란히 놓는 방식)을 채택했다. ‘다관점 교류식’이 특정 입장들을 객관화 및 상대화할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이 책처럼 여러 주제를 다루기에는 ‘상반 입장 병치식’이 더 적격이다. 그는 또한 이 책의 기고자들에게 상대방의 논문을 읽고 자신의 글을 수정·보완할 기회까지 제공함으로써 어느 정도 객관화 작업도 도모했다. 그리하여 창세기 관련 이슈를 열한 개씩이나 다루면서도 일방적 전달식의 약점을 보충할 수 있는 책이 탄생했다.
책 내용에 관한 개관
영블러드가 기획한 열한 가지 주제 중에서 다음 일곱 항목은 과학과 신앙 이슈로 분류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날’의 길이(1장), 창조 사건의 시간적 배열 여부(2장), 지구의 연대(3장), 창조 과정에서 진화의 개입 여부(4장), 아담 이전 인류의 존재 여부(7장), 홍수 이전 인간의 수명(8장), 노아 홍수의 지리적 범위(10장).
이 가운데 다섯 가지 주제(2, 3, 4, 8, 10장)는 찬반 양편의 주장 내용이 우리가 예상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1장(창1장 ‘날’의 길이)과 7장(아담 이전 인류의 존재)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두 장에는 상당수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할 설명이나 주장이 포진되어 있다. 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장 창세기 1장 날의 길이
“창조의 날들의 길이는 24시간이었는가?”라는 1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나 “아니요” 둘로 명확히 나뉜다. 이런 경우 우리는 보통 “예”에는 창조과학(혹은 젊은 지구론)의 지지자가, “아니요”에는 날-시대 이론이나 틀 이론의 주창자가 등장하리라고 예상한다.
그런데 “예”라는 답변의 제시자는 놀랍게도 창조과학과 전혀 인연이 없는 테렌스 프레타임이다. 그는 구약학자로서 루터교 신학교의 석좌 교수로 재직했으며, 몇 종의 구약 주석서 및 구약적 주제와 연관된 신학 서적을 저술했다. 프레타임의 신관이 개방 신론이나 과정신학에 동정적이라는 점, 노아의 홍수를 성경의 묘사에 훨씬 못 미치는 미미한 사건으로 치부한다는 점, 그의 주석서나 저술이 복음주의 계통 출판사에서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 등은 그의 신학적 경향을 드러낸다. 그런 인물이 창세기 1장의 ‘날’ 문자적 24시간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프레타임의 답변은 간단하다. ‘날’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용례들에 집중할 때 창세기 저자는 24시간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덟 가지 정도의 어의적·주석적 증거를 동원하여, 창세기 1장의 ‘날’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24시간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섯 날에 걸쳐 창조의 사역을 진행하셨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의 관심은 어느 한 날이나 연속된 날들에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자는 일과 휴식(6일+1일)이라는 7일 단위의 생활 패턴이 이미 창조 세계의 구조에 내장되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후에 출애굽기 20:11에서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쉬도록 명한 한 주간의 생활 리듬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7일간의 창조 역사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이처럼 7일 패턴이 나타내는 중요성도 각 날이 24시간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런 날들의 길이를 지구나 우주의 연대에 대한 과학적 데이터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이 취하신 일종의 적응 행위로서, 창조의 역사를 창세기 저자의 당시 경험과 ‘지식’수준에 맞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예”의 입장을 대변한 인물이 수수께끼 같았다면, “아니요”의 경우는 그 미스테리 수준이 극에 달한다. 왜냐하면 “아니요”를 내세우는 인물의 주장이 도무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요”를 강변하는 클라이드 맥콘은 인류학과 사회학을 함께 전공한 인물로서 일반 대학에서 인류학·언어학을 가르쳤다. 한 마디로 맥콘의 입장은 버나드 램의 분류에 의하면 “종교적으로만 해석하는 이론”(Religious-only theory)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창조 기사는 계시와 종교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 과학이나 역사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의 ‘날’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날이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날이 아니다. 맥콘 자신의 주장을 들어 보자.
시간이란 기존의 창조 질서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필수적인 요인이다.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에너지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기능적 구성 요소를 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의 필수적 요소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주를 어느 시점에 또는 얼마 동안에 걸쳐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 길이가 날이든 지질학적 기간이든, 하나님을 시간에 속한 피조물로 만드는 것이고, 창조계를 본래의 위치보다 훨씬 열등한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맥콘은 “창조의 날들의 길이는 24시간이었는가?”에 대해 단연코 “아니요!”로 답한 것이다. 만약 “창조의 날들은 긴 시대였는가?”라는 질문이 그에게 주어졌다고 해도 역시 답변은 “아니요”였을 것이다.
7장 아담 이전의 인류 존재 여부
7장에서는 “아담과 하와 이전에 사람들이 있었는가?”라는 소위 ‘아담 이전 인류’에 관한 이슈를 제기한다. 먼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이는 디킨슨대학에서 인류학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한 웨이드 시포드다. 아담 이전에도 인류가 있었다고 보는 이들은 두 가지 근거를 내세운다(이것은 시포드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고생물학적 증거이고, 또 하나는 문화 인류학적 고려 사항이다.
우선 고생물학적으로 화석에 나타난 원인(原人, hominid)의 연대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출현 시기보다 매우 이르다. 인류의 출현을 20만 년 전으로 잡든 3만 년 전으로 잡든,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의 창조 시기(기껏해야 1만 년 전)와 비교할 때 그 격차가 매우 크다. 또 문화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구석기 말기에 속하는 아담의 연대와 신석기 시대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가인의 연대 사이에도 시간적 간극이 있다. 아담의 출현 시기를 1만년 전으로 잡고, 전형적인 신석기 시대 거주민으로 보이는 가인과 후손들이 7천 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할 경우에도 약 3천 년 정도의 시간적 간극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적 간극 문제는 아담 이전 인류의 존재를 상정하면 말끔히 정리될 수 있다. 시포드는 이런 견지에서 이 사안에 대해 “예”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구약 분야의 전문가 조지 쿠펠트(1923-2010)는 어떤식으로 자신의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가? 우리의 통념은 그가 아담 이전 인류의 존재를 부인하는-따라서 아담이 인류 최초의 조상이라는-전통적 입장을 변호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쿠펠트의 논변은 우리의 추정을 크게 벗어난다. 도대체 그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글의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출간된 역사적 아담 관련서의 네 가지 견해를 참조한다고 해도 별 성과는 없다. 쿠펠트의 입장은 이 네 견해-(1) 역사적 아담은 없다(진화적 창조론), (2) 역사적 아담은 있다(원형적 창조론), (3) 역사적 아담은 있다(오랜 지구 창조론), (4) 역사적 아담은 있다(젊은 지구 창조론)-가운데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혹시 두 번째 견해가 가깝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같은 유형으로 간주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쿠펠트가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대표로 해석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의 주장에서 느껴지는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는 쉽게 사라진다. 사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그의 견해가 아직까지는 꽤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해석한 창세기 초반부는 자못 생경하다. 쿠펠트는 창 1:27의 “사람”(아담)을 인류라는 의미의 집합 명사로 해석한다. 이는 실로 아담은 나와 너요, 또 인류 가운데 그 누구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 나서 아담(그리고 하와)을 인류의 대표로 상정할 경우, ‘원죄’, ‘비(非)아담계열 사람들의 구원 문제’, ‘가인의 아내’, ‘가인이 두려워한 대상’, ‘성의 건설’ 등의 사안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서술한다.
이 책의 유익과 활용 방안
『창세기 격론』을 통해 세 가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창세기 초반 내용과 관련한 이슈들이 무엇인지 전체적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이슈들을 파편적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슈들 전반을 아우르는 조감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창세기 격론』은 이런 빈틈을 메우기에 안성맞춤이다. 해설자가 예시한 과학과 신앙 관련 이슈 일곱 가지, 나머지 신학적 이슈 네 가지만 기억해도 도움이 된다.
이슈들의 내용을 파악하게 해 준다는 것은 이슈에 대한 찬반 입장은 무엇이고 각 입장의 주창자는 누구인지를 대략이나마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각 이슈와 관련한 필독서나 자료를 더 찾아볼 수도 있고, 비슷한 주제를 좀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둘째, 복음주의 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거나 확신하는 성경적·신학적 주제와 사안은 대부분 기독교 내의 한 가지 견해나 입장인 경우가 많다. 성경은 하나지만 성경 해석과 신학 전통은 다양하다. 어떤 주제나 사안에 대해 자기만의 소신을 가지는 일과 자신의 입장이 기독교 전체의 파노라마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아는 일은 병행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후자의 중요성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창세기 격론』과 같은 책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되돌아보고 다른 이의 견해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멀리하거나 반대하던 입장의 글을 읽어야하기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하고 힘들 수도 있다. 심지어는 동료 사역자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의견 차이가 생겨 관계가 서먹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자기를 객관화하는 시도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개인적 성숙의 관점에서든 리더십 역량의 강화라는 목표에서든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과제다.
셋째, 효과적인 논변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다른 책도 그렇지만 특히 『창세기 격론』 같은 논전서(論戰書)의 경우, 논제를 밝히고 개진하는 작업은 주로 증거/논거 제시, 반박과 입증 시도 등을 통한 논변의 진행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책을 세심히 읽으면, 기고자가 어떤 증거/논거를 사용하는지, 이 증거/논거가 어떤 범주(성경적, 신학적, 철학적, 과학적)에 속하는지, 또 어떤 범주의 증거/논거가 다른 것에 비해 우선적으로 등장하는지를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다. 이런 지적 능력의 계발과 향상은 의식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창세기 격론』 유의 책을 섭렵할 때 얻을 수 있는 결과임은 확실하다.
또한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논변의 태도 역시 훈련할 수 있다.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고 확실히 표명하면서도 상대방을 폄하하거나 교만하게 굴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이나 견해를 비평하면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논변 내용의 탁월성 못지않은 미덕이다. 독자들은 『창세기 격론』에서 이러한 절제된 논변 태도의 예를 발견하고 그에 비추어 스스로를 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의 내용이 전후 관계로 엮여 있지 않기 때문에 관심 있는 주제부터 읽어도 좋다.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중심으로 찬반 격론을 벌이는 이 책을 그룹으로 공부한다면 더 큰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크나큰 유익을 주었던 이 책이 국내에 소개되어 기쁘다. 이 책이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에 대한, 더 나아가 성경 전반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 눈을 뜨고 더 자유롭게 서로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