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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모두를 위한 여성 폭력의 교과서(오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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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수경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일레인 스토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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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를 제외하면 나머지 범죄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무심히 라디오를 듣다가 이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인가 싶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매년 경찰청에서 발표하는 범죄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절도와 강도 발생 건수는 지속해서 감소하는 추세. 5대 범죄(살인, 강도, 강간·강제추행, 절도, 폭력) 중 성범죄만이 라디오에서 들은 대로 유일하게 증가했다. 성범죄는 20091만여 건에서 10년 사이 23천 건으로 증가했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적극적으로 성범죄를 신고할 수 있도록 의식이 변화했다고 볼 수 있지만, 성범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광범위하게 지속되어 온 범죄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2020, 우리는 ‘COVID-19’라는 낯선 바이러스와 함께 새해를 시작했다. 또한 올해는 ‘N번방이라는 신종 성범죄의 실체를 발견한 해이기도 하다. COVID-19N번방은 감염 경로가 광범위하고, 감염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우며, 아직 해결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위험한 바이러스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사회에는 두 개의 바이러스가 떠돌며 피해를 양산하고 뭇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것이다. COVD-19는 백신이 개발되면 어느 정도 통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날이 갈수록 진화하며 증가하는 성범죄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일레인 스토키(Elaine Storkey)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 인류의 상처, 여성 폭력은 이런 절박한 질문 앞에 선 우리에게 때마침 도착한 반가운 책이다


해결되지 않은 세계적 유행병, 여성 폭력 


영국의 학자(신학, 철학, 사회학)이자 작가인 일레인 스토키는 2010년부터 남편과 함께 여성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 리스토어드’(Restored)를 설립하여 활동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국제 구호단체를 통해 만난 아프리카 여성들이 전쟁에서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현실을 목격한 후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1943년생인 노년의 저자가 8년간 세계 여성 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관련 통계 자료와 피해자 연대 단체들의 활동을 꼼꼼하게 정리한 결과물이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이다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여성 세 명 중 한 명이 살면서 학대와 폭력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끔찍한 인권 침해임에도 가려진 채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는, 이 시대의 세계적 유행병 중 하나다.

첫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영화배우 니콜 키드먼의 말로 시작하여 여성 폭력을 세계적 유행병으로 명명한다. 우선 이름을 붙여야 해당 문제를 깊게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저자는 2장에서 9장까지 이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성 감별 낙태, 영아 살해, 성기 훼손, 아동 결혼, 명예 살인, 가정 폭력, 성매매, 강간, 전쟁을 통한 성폭력의 사례를 들며 여성 폭력 피해자(생존자) 인터뷰, 통계, 연구 활동 등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특히 사례의 배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 감별 낙태, 영아 살해, 성기 훼손, 아동 결혼, 명예 살인의 순서로 이어지는 사례는 주로 이슬람 국가나 아프리카 등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 상세하게 묘사한 폭력의 잔혹함에 치를 떨며 읽을 수는 있지만 이를 우리 문제로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후반부에 이어지는 가정 폭력, 성매매, 강간, 전쟁을 통한 성폭력은 이슬람 국가나 소위 3세계로 불리는 특정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소위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에서도 흔하게 발생하는 보편적 폭력이라고 못 박는다. 작가의 노련한 사례 배열은, 방심하던 독자를 여성 폭력의 현장에 꼼짝 못하게 세워 놓고, 그것이 우리 문제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 책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강간문제를 집대성한 수잔 브라운빌러의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강간에 역사를 부여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혔는데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도 마찬가지다. 이름을 붙인 다음, 여성 폭력에 역사성을 부여하여 그것이 실존하는 문제임을 드러낸다이 사례들을 통해 저자는 여성 폭력은 그것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관용하는 문화, 법적·사회적 태도, 젠더 불평등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여성 폭력의 동의어는 젠더 기반 폭력이다그렇기에 폭력의 양상은 달라도 해결을 위한 문제의식은 상통한다


저자는 무수한 사례를 통해 여성 폭력 문제는, 그저 폭력의 당사자들 개인을 향한 수동적인 연민으로는 충분하지 않, 먼 나라 특정 계급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모두의 불의로 인식하고 그 불의를 철폐하기 위해 우리 혹은 각자의 헌신된 행동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 폭력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집요하게 발생하는지 근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근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진화심리학, 사회생물학, 사회과학, 페미니즘 분석 틀을 차근차근 소개하며 원인을 파악하고자 한다. 저자는 이 분석 틀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지적하며 젠더 기반 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가부장제를 지목한다. “남성 우위가 폭넓게 용인되고 의사 결정, 제도, 사상이 대체로 남성으로부터 나오고 여성의 목소리는 침묵 당했고, 여성의 경험은 남성에 의해 해석되었으며 인류 절반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간과하거나 무시하거나 잘못 해석한 가부장제 말이다. 젠더 기반 폭력은 가부장적 통제가 강력하게 시행되는 사회일수록 더 잔인하고 집요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가부장제가 여성에게만 피해를 주었다고 쉽게 결론짓지도 않는다. 이 위험하고 지독한 가치 체계는 여성과 남성 모두 이 구조에 동참하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고 본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 가부장제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의 범인, 즉 가부장제를 발전시키고, 강화하고, 유지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책임을 종교에서 찾는다


세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가부장제를 발전시키고, 강화하고, 유지한 종교의 책임을 묻는다. 왜 종교일까? 앞서 언급한 여성 폭력 사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이슬람이나 기독교 등의 종교 체계는 인간 사회를 신이 인정하는바에 따라 지도한다고 하면서 가부장제가 형성되도록 도왔고, 남성에게 특권을 주고, 여성을 종속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제도적 관습과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종교가 모두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평가가 너무 야박하다고 보는가? 저자는 꾸란, 불교 경전, 성경 등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폭력을 당한 무수한 사례를 근거로 제시한다. 굳이 타종교까지 언급할 것도 없이 성경은 신구약을 망라하여 여성 폭력의 사례를 여과 없이 담았고,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고 종속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억압하는 사상을 감추지 않았다. 성경이 누군가에게는 은혜로운 말씀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텍스트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공포의 텍스트를 덮을 것인가? 저자는 적극적으로 다시 보기를 권한다. 다시 보면 우리(특히 남성 신학자·목회자)가 얼마나 성경을 왜곡된 관점으로 해석·적용해 왔는지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은 종교의 본성과 우리가 원래 창조된 모습을 회복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니까 여성 폭력을 해결하는 일은 종교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종교를 가부장 체계의 범인으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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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인 스토키가 지금 한국 사회를 방문한다면?


책을 읽으며 일레인 스토키가 지금 한국 사회를 방문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올 것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여성 폭력은 이 시대의 세계적 유행병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한국 사회도 이 유행병에서 안전하지 않다. 오히려 ‘IT 강국으로서 디지털 성범죄 선진국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고 있다. 20166월부터 20183월까지 다크웹에서 음란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를 운영하며 전 세계 128만 명의 회원에게 22만여 개(8TB)의 음란물 동영상을 판매한 손정우는 겨우 16개월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손정우가 운영한 웹사이트에서는 여성 아동을 대상으로 한 잔혹한 성범죄 동영상이 절대다수로 판매되었고, 그중에는 생후 6개월 영아를 대상으로 한 범죄 영상물도 있었다. 올해 초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N번방은 어떠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성 가입자들이 그저 게임하듯여성의 성을 착취했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얼굴과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디지털 성범죄는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다. 바이러스가 변종에 변종을 거듭하며 출현하듯 디지털 성범죄도 가부장 체제 속에서 무럭무럭 성장해 왔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이 범죄들에 인신매매죄를 적용하라 일갈했다. 그만큼 여성 폭력의 기술은 발전했지만, 발생하는 원인과 양상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 사회만 그러한가? 교회는 더하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쉽게 은폐되고, 어렵게 피해 사실을 폭로해도 꽃뱀’ ‘신천지등으로 낙인찍힌다. 범죄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교단은 처벌할 의지와 권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결국 피해자는 사라지고, 가해자는 기세등등하게 살아남는다. 성범죄에 관해서는 교회가 사회를 탓할 자격이 없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지적처럼 남성 목회자·신학자 중심 체제 아래 여성을 억압하는 불의한 가부장 구조를 강화하는 데 전력을 다하며 성경을 해석하고 교권을 수호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혁적인 목회자·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교회가 저지른 여성 차별과 혐오 체제와 여성 폭력 앞에서는 관찰자가 되고, 그것은 나중 일이라 여긴다. 어떤 면에서는 가부장제가 성경의 권위를 앞서는 가장 오래되고 새로운 종교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날로 진화하는 여성 폭력, 함께 저항하라


모든 문화와 체제는 진공 상태에서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땅이 있고, 그것이 자랄 환경이 되니 뿌리박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불의가 가능한 원인, 즉 땅과 환경을 정확하게 분석하며 직면하는 일은 중요하다강 건너 불구경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당사자·협력자 시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저자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조와 민족과 젠더를 넘어서는 임무로 인식할 것을 강조한다. 인류에게 깊게 그어져 지워지지 않는 상흔, 여성 폭력을 멈추는 게 시급하며 치유와 회복적 정의라는 종교적 가치는 문제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알알이 박힌 잔혹한 여성 폭력 사례를 건너기 힘들고, 원인에 관해서는 질문과 토론이 필요하다. 그래서 좋은 책이다. 폭넓은 사례, 권위 있는 근거 자료, 정확한 진단에 이르기 위한 합리적 전개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평가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교과서로 불릴 만하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여성 폭력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폭력적 체제, 그 체제 속에서 진화하며 성장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은 코로나 시대의 여성을 더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여성을 존중해야 할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문화와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코로나로 인해 집에 갇힌 여성들을 상대로 한 노동 착취와 폭력은 증가하고 있다. 교회 내 여성 폭력은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은폐된다. 여성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책은 완성작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이 책은 우리를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계로 인도하여 이 책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우리가 멈추지 말아야 할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성 폭력을 방치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일 수 없으며 하나님도 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교회의 필독서로 지정하길 바란다.




오수경

청어람ARMC 대표



IVP 202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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