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고 부담스러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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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진호
책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김용규 지음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은 소위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제대로 모르는” 분야다. 일반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인식이 “알아두면 쓸데없는 잡학”이나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정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문학의 지위가 우리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현상은 단적으로 인문학이 그 자체로 어떤 경제적 이익이나 생산물을 창출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본주의의 팽창을 가속화하는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 아래서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데 쓸모없는 인문학과 같은 학문은 그저 여유 있는 사람들이 향유하는 일종의 취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최근 대한민국 사회를 휩쓸었던 ‘인문학 열풍’ 현상을 새삼스럽게 재조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인문학 ‘열풍’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 인문학 관련 전공은 끊임없이 통폐합되거나 사라지고 있으며,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도 인문학은 취업과는 동떨어진 기피 전공일 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 불었던 인문학에 대한 높은 관심은 그저 고상한 취미를 위해 새로운 대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 속에서 책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2019, 이하 『그리스도인은 왜』)를 처음 마주한다면, 누군가는 단지 시중에 유행하고 있는 인문학 열풍처럼 여행, 음식, 패션, 취미 등에 인문학을 끼워 넣듯 종교에도 슬그머니 인문학을 접목해 보려는 시도 정도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가 걸어 온 발자취를 좇다 보면 우리는 이 책이 단순히 인문학 열풍에 편승하기 위해 출판된 책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인문학을 연구해 온 저자가 자신과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진지하고 묵직한 충고임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20년 가까이 저술 활동을 해 오면서 대중에게 인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애쓴 학자다. 또한 저자는 철학뿐 아니라 신학을 공부했던 경험, 그리고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인문학과 신학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온 저술가다. 그런 그의 노력은 지난해 IVP에서 출판된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2018, 이하 『신』)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신』이 저자의 철학적, 신학적 연구 활동의 결과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탄생한 저서라고 한다면, 이번에 출간된 『그리스도인은 왜』는 저자가 해 온 인문학과 신학을 연결 짓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를, 나아가 그것이 저자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으로 필요한 까닭을 설명하는 책이다.
그러나 책 『그리스도인은 왜』를 제목만 보고 마치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에 그친다는 주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란 부제가 보여 주듯 저자는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인문학과 아니라 신학을 모두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기독교 신학을 “제일학문”(scientia prima)이자 다른 모든 학문의 궁극적 바탕이라고 칭한다(9쪽). 따라서 저자가 그리스도인에게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은 인문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인문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가 모든 독자에게 요청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위대한 기독교 전통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이며, 이를 위해 반드시 인문학적 소양을 갈고 닦는 것이다.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통적으로 신학이 발전해 온 과정에 인문학이 한 중요하고 본질적인 역할을 소개하고 그 사실로부터 그리스도인이 인문학을 배워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철학이나 신학의 사조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신학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개괄적으로 짚어 보고, 또 그 가운데 현재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인문학을 대해야 하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백여 쪽이 조금 넘는 짧은 책이지만 전체는 총 열다섯 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하나의 주제가 인문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통찰을 충분히 담아 낸다. 처음 다섯 개의 소제목은 본격적인 기독교 신학의 태동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인문학이 어떻게 작용해 왔는지를 다룬다. 일찍이 테르툴리아누스란 신학자가 말한 대로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란 질문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당연한 물음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리스 철학과의 만남과 함께 기독교 신학이 처음 시작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아가 저자는 고대 히브리 민족이 신앙을 통해 종교적으로 경험하고 있던 세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해 내기 위한 수단이 바로 당시의 그리스 철학이었으며, 오히려 히브리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만남이 “하나님이 기독교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의 만남이 순조로운 융합의 과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성을 중시한 헬레니즘 문화의 사상이 신본주의 사상이었던 기독교와 종종 충돌하는 경우가 생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리우스 논쟁’이다. ‘아리우스 논쟁’이란 서기 325년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육신의 문제를 놓고 일어난 논쟁으로,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육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와 기독교적 전통에 따라 성육신을 인정하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 사건이었다. 양측의 치열한 다툼 끝에 결국 플라톤주의였던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성육신을 인정하는 니케아 신조(the Creed of Nicaea)가 공포되었으며 저자는 이 사례를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의 부작용을 공적으로 극복한 첫 번째 사례”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아리우스 논쟁’ 이후 지금까지도 당대의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의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기독교 신학이 “시대마다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는 인문학을 배척하기보다 끌어안아 거기서 생기는 부작용을 부단히 극복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하며 성장”해왔다고 말한다(23쪽). 이렇듯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가 강조되어야 하는 까닭은 저자가 생각하는 기독교 신학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과 관련 있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 지닌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은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할 뿐 아니라 수시로 변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교훈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23쪽)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만큼이나 인간과 인간 세계에 대한 설명을 책임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각 시대를 사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인문학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저자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처음 다섯 개의 소제목이 역사적으로 신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작용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일곱 개의 소제목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인문학적 위기와 기독교 신학의 대처를 말한다. 사실은 이 부분이 책의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할 정도로 저자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다. 저자는 근대를 지나 탈근대, 즉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들어서면서 인류에게 닥친 위험이 제법 치명적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저자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2017, 김영사)를 인용하며 신본주의를 폐기하고 인본주의마저 붕괴한 이 시점에 인간에게 남겨진 가치는 데이터를 위시하는 첨단과학과 자본주의의 결탁뿐이라고 지적한다.
근대는 인간의 이성과 계몽을 주창하며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신본주의의 폐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인간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으며 궁극적 목적을 상실한 인간의 삶은 그렇게 점점 무의미해져 갔다. 신의 죽음은 곧 인간성의 죽음이었으며, 신본주의의 폐기는 곧 인본주의의 붕괴를 의미했다. 저자의 진단은 현재 인류가 마주한 이런 파국적 현실에 기독교 신학 역시 책임이 있다는 것이며, 이제 그 문제적 사태에 대처할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거대 서사 혹은 거대 담론이라고도 불리는 ‘큰 이야기’에 대한 불신이다. 근대를 지배했던 이성주의가 획일적인 ‘큰 이야기’를 부당하게 정당화함으로써 얼마나 폭력적이었고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큰 이야기’의 폭력성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으며, 인간은 스스로 맹신해 오던 이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의심은 끝내 ‘큰 이야기’를 해체하고 제한된 영역에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작은 이야기’들로 인간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작은 이야기’의 반란 역시 완전한 변화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 또다시 스스로를 부당하게 정당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는 다양성, 개별성, 상대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큰 이야기’가 되려 함으로써 인간에게 더는 전통적인 ‘큰 이야기’가 설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단적으로 현재 지구상에는 “매년 전 세계 인구의 두 배 가까운 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해 내고 있다(92쪽).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매일 10만 명 이상이 이런저런 결핍으로 인해 목숨을 잃어 가는 현실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초래한 원인이 ‘작은 이야기’에만 관심을 두고 ‘사랑’, ‘생명’, ‘진리’, ‘선함’과 같은 ‘큰 이야기’에 무관심한 모두에게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책의 마지막 세 장을 통해 기독교 신학이 현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설 것을 요청한다. 기독교 신학은 시대를 막론하고 마땅히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을 잇는 건실한 교량”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60쪽). 건실한 교량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전통만을 고집하는 것도, 인문학적인 관점만을 위시하는 것도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한쪽에만 지나치게 천착하는 것은 신학을 공허하게 만들며 인문학을 맹목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독교 신학이 시대의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그 시대의 인문학을 끌어안으며 부단하게 온전함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이 지향해야 할 온전함이란 고대의 신본주의, 근대의 인본주의, 그리고 현대의 탈근대적 가치 중 하나를 고집하지 않고 세 가지 가치를 동등하게 복원하는 것이며,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책임은 이런 과정을 통해 “온전한 가치”를 정립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
기독교에서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나 참인 진리의 말씀이다. 하지만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어느 때이건 불완전한 이해로 그칠 수밖에 없다. 2천 년 이상 지속된 기독교의 전통과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태도로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한 신앙 공동체가 세워 온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확립해 온 역사도, 종교개혁을 통해 기존의 악습을 타파하려 한 노력도 모두 이런 겸손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저자는 이처럼 “지난 2천 년 동안 사도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위대한 신학자들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기 위해 목숨 바쳐 지켜 온 전통에서 유래한” 기독교 신학에 대해 충분한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9쪽). 그러나 사실 기독교 신학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부심을 느끼는 것에서 더 나아가 기꺼이 “위대한 전통의 일부”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전통의 일부가 되려는 노력은 필수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먼저 전통적으로 세워져 온 기독교 신학을 이해한 뒤에야 그것을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기독교 전통을 자신의 삶에 가장 근본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다. 그러나 전통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이 정작 그 전통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다면 그 결단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 전통은 일차적으로 신학이란 학문의 형태로 발전해 왔으며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핵심 교리들이 합의되어 왔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며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거대하고 부담스러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
책의 제목이자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는 그 자체로 꽤 본질적이고 거대한 물음이지만, 저자가 책에서 이 질문을 다루는 방식은 비교적 명쾌하고 단순하다. 이 책이 처음부터 출판을 목적으로 쓰인 글이 아니라 강연 목적의 원고를 바탕으로 쓰였고, 따라서 구어체에 가까운 유려한 문체로 독자를 이끌어 가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책의 논의 전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올바른 인문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온전한 가치의 지향”, “온전한 신학의 추구”를 바라야 한다는 저자의 일관된 관점 아래서 진행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오랜 기간 정체되어 왔다. 기독교의 정체가 너무나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어떤 기준으로 그 문제를 진단하든 ‘정체’라는 결론은 대부분 유효할 것이다. (그 기준은 기독교의 구성원일 수도, 기독교의 사상일 수도, 교회의 제도일 수도 있다.) 나아가 기독교가 정체되어 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각도 정체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각자가 신앙의 정체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할 때다.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우리는 너무나 거대하고 부담스러운 질문 앞에 덩그러니 내던져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이 부담스러운 질문을 마주하길 바란다.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안내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조언으로, 응원이자 격려로 다가가길 기대한다.
이진호
대학에서 영상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뒤 지금은 교육학 석사과정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