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영성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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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민형
책 『오늘이라는 예배』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몇 해 전부터 한국 기독교에서 ‘일상’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비슷한 맥락에서 ‘교회 밖’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가리키는 바가 명확하지 않고 그 범위가 너무 넓어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라는 평가 이상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 면에서 ‘일상’이라는 표현은 ‘일주일 중 일요일(혹은 주일)을 제외한 6일간의 삶’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이 늘어 가고 있음을 강조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개된 일상에 대한 여러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이야기는 일상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연결시켜 상상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일상’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직장, 육아, 인간관계 등과 같은 특정한 (교회 밖) ‘활동’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더욱이 일상의 종교적 의미를 강조한 이들은 대부분 일반적 사회생활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일상’ 이야기가 정작 일상을 살아 내야 하는 이들의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일상’이라는 표현의 한계는 관심의 저하로 이어졌다. 피상적 개념으로서의 ‘일상’은 ‘그래서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대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 혹은 ‘하루’는 ‘일상’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오늘’의 종류도 지구상의 인구수만큼 다양하겠지만, 그래도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이의 일상―최소 주 5일 이상―을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상식적인 범위이다. 이는 비단 범위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 혹은 ‘하루’는 어떤 특별한 활동이나 조직 생활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사소한 일들의 집합체라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 있는 이야기들이 오갈 수 있는 주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소개하는 책의 원제인 Liturgy of the Ordinary를 『오늘이라는 예배』로 번역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는 저자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누구나의 오늘이 아닌 누군가의 오늘
이 책의 저자 티시 해리슨 워런(Tish Harrison Warren)은 ‘오늘’ 혹은 ‘하루’ 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신앙의 의미를 묵상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어떤 하루에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 아닌 며칠이고 반복될 수 있는, 또한 이 별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비슷하게 실행하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다. 잠을 자는 것과 잠에서 깨는 것처럼 생물로서의 인간이 해야 하는 기본 행위, 침대를 정리하고, 이를 닦고, 남은 음식을 먹거나, 이메일을 확인하고, 친구와 통화하며, 차를 마시는 것처럼 그리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일들. 열쇠를 잃어버린다거나 배우자와 다툰다거나 교통 체증을 버텨야만 하는, 늘상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해프닝들.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들로 짜인 하루를 보낸다. 다만 그 조합과 순서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그렇기에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이라는 단위로 시작하면 누구나의 하루라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워런이 보편적 이야기로만 책을 채우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초점은 ‘누구나의 하루’가 ‘누군가의 하루’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맞춰져 있다. 그녀만의 특별한 방식은 하루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나누어 묵상하는 데서 출발한다. 어떤 이에게 ‘당신의 하루는 어땠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보낸 하루를 통틀어 평가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워런의 접근은 조금 다르다. 구체적으로 세분화하여 그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단순히 보람이나 일의 완성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그녀는 일상을 부분 부분으로 쪼갠 후 그 조각들을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 체험들, 예식, 신학적 깨달음, 신앙의 고백 등과 연결한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데서 나아가 하루를 구성하는 다양한 일상의 요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의미를 성찰하는 묵상적 행위이다.
예를 들어, 워런은 잠에서 깨는 행위와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연결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 예식이다. 그것은 거듭남, 즉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의식이자 동시에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매여 있음을 고백하는 사건이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자신이 세례를 받았던 그 날의 기억을 의지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더 이상 잠에서 깨는 찰나가 이 세상 누구나의 그것과 더 이상 동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침대와 몸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인력을 이기기 위해 사용할 그 시간을, 그리스도인인 누군가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이 매일을 시작한다고 선포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허락된 찰나일지라도 그 순간을 채우는 몸의 움직임과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워런은 하루를 구성하는 여러 순간들이 하루의 주인이 의지적으로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종교적 의미로 가득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비단 어떤 ‘한 날’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워런은 그리스도인들의 구분된 ‘하루’가 반복되면 결국 그것이 달라진 삶을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그녀는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를 인용하며 (어떤 형태의 활동이든) 반복은 일종의 습관을 만들어 내며 그것은 개인이 욕망하는 바를 결정한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정체성은 그/그녀가 무엇을 욕망하는가와 직결된다고 보는 스미스의 이론에 따라 워런 또한 어떤 한 인간이 매일 반복하는 행위인 예전(liturgy)을 통해 형성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성’이란, 보편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변화시키고 계신 사람’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잘 드러내는 것이 3장 ‘이 닦기’와 5장 ‘남은 음식 먹기’이다. 너무나 평범하고 반복적이어서 무의식에 가까운 아주 소소한 의지만으로도 행할 수 있는 일상의 습관적 행동들을 통해 워런은 하나님의 뜻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단순히 육체의 더러움을 덜어 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를 세세히 살펴보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행위. 식욕과 굶주림을 채우기 위한 식사가 아니라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몸과 마음을 채우는 예배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일상 속의 반복적 행위(liturgy)가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또 하나의 종교적 예식(sacrament)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그녀의 해석은 가히 탁월하다. 무엇보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급진적 정통주의의 영향 아래 기독교의 예전과 예식에 주목하고 있는 요즈음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워런의 해석은 새로운 접점을 제시한다. 예전의 실천이 (교회의 성장률 회복을 위한) 또 하나의 소비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창조주가 지으신 우리의 몸을 관리하는 것과 같이 당연하면서도 꼭 필요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전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예전과 예식은 유행의 흐름에 따라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 혹은 공동체가 그러한 의미의 예전과 예식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매일의 삶을 돌아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워런이 8장 ‘교통 체증 버티기’와 10장 ‘차 마시기’에서 강조했듯, 예전을 따르는 영성을 위한 삶의 자세는 즉각적 반응을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느리지만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일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훈련에 익숙해지면, 반복적인 것들뿐 아니라 예상 밖의 일이 닥쳤을 때도 사건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워런은 몇몇 챕터에서 확장된 의미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중 6장 ‘남편과의 다툼’에서 그녀가 논의를 이어 가는 방식이 흥미롭다. 매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종종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갈등 관계에 놓인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끝날 수도 있고 심각한 관계의 균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러한 갈등은 안타깝게도 인간의 일상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C. S. 루이스(Lewis)가 이야기했듯, 한 인간에게 있어 갈등 관계에 절대 놓이지 않는 존재는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갈등 관계를 훌륭하게 해결할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를 용서하는 행위만으로도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해결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워런은 그것을 (전통적) 예배 순서 안에 반드시 들어가 있는 ‘평화의 인사’와 연결시킨다. 교단별로 혹은 교회별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예배 순서에 들어가 있는 ‘평화의 인사’ 예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이 땅에서도 화평을 일궈 내는 자들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평화라는 신학적 담론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이다. 남편과의 갈등을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워런은 이렇게 고백한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선교를 추구하는 일은 내가 있는 곳, 나의 집, 나의 동네, 나의 교회에서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다. (117면)
이 말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삶의 진리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에 담겨 있음에도, 새로운 가르침만을 얻으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반복되는 하루 안에는 종교적 습관뿐 아니라 의지적인 종교적 실천을 위한 가르침도 들어 있다. 다만 그것이 너무나 평범하고 익숙하게 다가오다 보니, 하루를 깊이 묵상하고 들여다보지 않는 한 깨달을 수 없을 뿐이다. 어느 요리사의 말이 생각난다. ‘지천에 고기가 아닌 (먹을 수 있는) 풀들이 깔려 있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가지고 있는 하루에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큰 가르침이 들어 있다. 그러니 하루를 천천히 그리고 깊이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신앙적 실천이라는 워런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다시, ‘하루’
하루를 쪼개어 생각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기가 처음부터 쉬울 리는 없다. 특히나 과도한 피로 사회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이 ‘잠’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참으로 좋다. 워런은 수면을 통해 인간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잠을 자지 않고는 하루를 버틸 수 없는 인간은 잠자는 동안만큼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무방비 상태(그리고 무능함)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면이 충분한 안식이 되기 위해 우리는 쉬지 않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은 하루 안에 깊이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잠이 주는 깨달음이 하루를 묵상하는 데 가장 중요하기에 워런은 그토록 ‘저녁부터 시작하는 하루’를 강조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자세 없이 하루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의 영성’이란 여전히 어려운 주제이다. 특히나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익숙할수록 교회 밖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지 않는 날에도 굳이 구분을 지어 신앙생활을 연장한다. 허나 그러한 실천은 일상을 살기도 벅찬 현대인의 삶에 (종교적) 노동을 추가하는 것이고, 결국 일상이 아닌 부분을 늘리는 일이다. 이렇게 구분지어진 영성은 더 이상 ‘일상의 영성’이 아니다. 일상의 영성을 찾기 위해선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하루가 이미 충분히 하나님과 관계 맺어진 시간의 조합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내야 한다. 그 은혜야말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형성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에 익숙해지기 위한 훌륭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팁을 제시하자면, 절대로 저자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을 비교하지 말았으면 한다. 워런이 그녀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세에만 집중하라. 그리고 나의 상황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찾으면 된다. 분명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많이 다를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영성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작은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으로 밤새 뒤척이다 간신히 잠듦” 정도가 아닐까? 지친 현대인들에게 일상의 영성이 자양강장제와 같이 다가오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민형
보스턴 대학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독교 문화와 타문화 간의 관계 자체가 기독교 전도임을 연구하는 논문을 썼다. 현재는 성결대학교에서 선교와 문화, 도시선교,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등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예전과 기독교 전통의 문화가 기독교인의 벙체성 확립에 큰 도움이 된다는 이해를 가지고 꿈의 교회에서는 기독교 이미지와 상징을 통한 새가족 교육을 하고 있다. 더불어 예전에 관심이 있으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교회를 위한 토탈 컨설팅팀 ‘오래된 미래’를 기획했다. 이는 성도 교육, 교회 공간 및 가구 디자인부터 목회자의 예복까지 각각의 교회에 맞는 예전과 예배 공간을 만드는 프로젝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