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 아이가 건네는 위로(심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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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혜인
책 『엄마의 엄마』이주현 지음
“엄마도 아기였던 적이 있어?”
아이가 다섯 살 때 내게 던진 물음이다. 아이를 낳으면서 자동으로 엄마가 되었고, 그 생활에 익숙해져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내가 처음부터 이 아이의 엄마이기만 했던 것처럼 살았는데, 아이의 물음에 내가 내 엄마의 ‘아이’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엄마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춘기 때는 엄마를 미워하기도 했다. 엄마는 늘 바쁘고 피곤해하고, 나를 이해해 주지 않고 화만 내는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 집에서 나와 살다 보니 자연스레 관계가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엄마와 대화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아이를 낳으면서 엄마와의 관계가 많이 달라졌다. 엄마가 나를 낳은 그 나이에 내가 첫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순간마다 나와 같은 나이의 엄마가 어땠을지 상상하면서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림책 『엄마의 엄마』에도,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고 마주하게 된 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만 엄마가 오래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그 슬픔이 삶에 오랫동안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저 평범한 엄마와 딸 사이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좀더 깊고 내면적인 성찰과 화해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가 된 이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아이를 돌보다 보면 내가 ‘엄마의 아이’였던 과거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엄마를 더 이해하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이해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엄마에게서 받았던 상처나 분노 같은 것들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경우도 있다. 엄마가 되는 순간 나라는 존재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상처는 아이를 대하는 현재 내 모습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엄마가 된 이 책의 ‘나’에게는 오래전 자신의 곁을 떠나간 엄마의 부재가 상처로 남아 있다. 어느 날 자신의 삶에서 갑작스레 떠나간 엄마. “엄마가 너무 그리워 울다 잠든 날도 있었”고, “엄마가 내 옆에 다녀갔을 것만 같은 날”도 있었지만, 어느새 아픔을 마음 한편에 그저 묻어 둔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어느 밤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다가 자신의 엄마가 떠오르고, 사라진 줄 알았던 아픔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나’는 그 상처를 그냥 덮는 대신,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택한다. 엄마의 떠남이 나의 존재에 드리웠던 어둠, 곧 밤하늘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 것이다. 밤하늘을 지나 찾아간 꿈의 정원에서 ‘나’는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만남의 기쁨과 화해를 경험한다.
책의 후반부 그림들은 다소 어둡고 무거운 앞부분 그림들과 대조적으로 색채가 다양하고 화사하다. 더욱이 책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표지에는 손을 잡고 눈부시게 빛나는 해를 향해 걸어가는 엄마와 아이가 그려져 있다. “엄마를 잃고서 엄마에게 사랑받은 기억마저 잃어버렸”다가 “이제 사랑받은 엄마의 딸로 누군가의 엄마가 될 수 있게 되었”다는 한 추천사의 문장이 단적으로 설명해 주듯,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꿈속의 만남이 ‘나’의 마음에 일깨워 준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한 변화일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지만 동화처럼 펼쳐져서 내용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여러 상징들이 숨어 있어서 곱씹을수록 깊은 감동을 얻을 수 있다. 특히 밤하늘을 넘어 꿈속으로 들어가는 길에 날개가 되어 준 것이 다름 아닌 ‘눈물’이라는 점은, 용기를 내어 상처를 직면할 때 느낄 수 있는 아픔이야말로 결국 상처를 아물게 한다는 진실을 보여 준다. 꿈속 정원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정원사의 말은 답을 알 수 없어 막막하고 아팠던 시간들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실은 마음속 용기가 자라나는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기도 한다.
아픔을 딛고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막상 나의 상처에 그 이야기를 적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떠났다’는 것에 집중하면 마치 버려진 듯한 느낌, 내 존재가 가치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이렇게 한번 무너진 내면의 힘이 회복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면의 아픔과 그 회복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 낸 이 그림책을 읽다 보면, 어쩌면 내게도 그런 회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무엇보다 내 무언의 외침을 모두 들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다정한 정원사의 이미지는, 더디더라도 내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원하는 존재가 있다는 위로와 힘을 준다.
작가는 과장하거나 꾸며내지 않은 채, 상처 입고 넘어져 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책의 마지막에서 ‘나’를 어루만지는 아침 햇살은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기회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게 나를 다독이는 누군가의 따스한 눈길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깊은 어둠 속을 지나는 이들, 또는 나의 아픔이 내 아이를 아프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엄마들에게, 이 책이 건네는 위로가 부디 닿기를.
심혜인
IVP 편집부에서 책을 만들고 있다. 아기에서 어린이가 된 두 아들을 키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