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가장 고귀하고 위험한 선물(노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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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노종문
책 『사람의 권력 하나님의 권력』앤디 크라우치 지음
앤디 크라우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첫 번째 책 『컬처 메이킹』(IVP, 2009)을 통해서였다. 그 책에서 그는 문화라는 것이 조금씩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문화 만들기’를 통해서만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문화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4장). 지난 세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키워드였던 ‘문화 변혁’에 대해, 내가 기존에 그리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함을 조금은 충격적으로 깨닫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두 번째 책 『사람의 권력 하나님의 권력』도 내게는 첫 번째 책 못지않게 신선한 지적 충격과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내용을 먼저 간략히 언급하자면, 첫째로, 그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권력’이라는 주제를 생생하고 풍부하게 다루었는데,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죽어 버린 지루한 개념이었던 권력(‘그래, 권력은 악하고 더러운 거야.’ ‘모든 게 자기 권력을 확장하려는 투쟁일 뿐이지!’)을 새로운 방식으로 상상하게 만들어 주었다(1-2부). 둘째로, 권력과 관련하여 ‘제도’의 본성을 다루는 부분에서는(3부), 나의 기성 제도에 대한 실망, 불신, 경계심과 그 근원을 다시 성찰해 보고 제도 안에서 어떤 희망을 얼마나 품을 수 있는지를 냉정히 돌아보게 해 주었다. 셋째로, 그는 소수의 예외를 제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과소평가하거나 비관적으로 소홀히 여김으로써 그 권력이 모두를 위한 번영의 공간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막아 버린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었다(6장과 11장).
이 책을 좀더 깊이 소개하려면, 책의 제목과 관련해 저자가 들려주는 일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권력(또는 파워)에 관한 책인데, 원서의 제목은 “하나님 노릇 하기”(Playing God)다. 이는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제공한 말이다. 저자 앤디는 월드비전 인도 지부장인 자야쿠마르 크리스티안과 함께 인도 남동부 첸나이를 방문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26-35쪽). 21세기에 노예를 법으로 허용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지만, 오늘날 세계에는 놀랍게도 2,100만 명의 노예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가 방문한 첸나이는 주민 2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20명의 어린이들이 노예로 살고 있었다. 그들의 부모가 겨우 50-100달러의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로 팔린 아이들이었다. 당시 월드비전은 이 지역에서 9년간 지방 의회와 협력하며 노예들을 해방하고 시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을 해 왔다. 앤디는 노예였다가 해방된 아이들과 대화하다가, 이 아이들이 방과 후에 노예 주인을 찾아가 항의하며 아직도 노예로 사는 다른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있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듣게 된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자야쿠마르는 앤디에게, 가난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부가 잘못 분배되었거나 권력이 불공정하게 분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다른 누군가가 그들의 삶에서 신 행세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95쪽).
신 행세, 즉, 하나님 노릇 하기는 물론 노예 주인이 노예로 삼은 사람들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악한 행태다. 그는 타인에게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억압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그들의 존엄성(즉, 하나님의 형상)과 ‘권력’을 완전히 빼앗는다. 그러나 자야쿠마르는, 노예 주인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를 돕겠다는 선의를 가진 월드비전 또한 자비로운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관점에서는, 때로는 자비로운 하나님 노릇이 악의적인 하나님 노릇보다도 더 파괴적일 수 있다. 자비로운 하나님 노릇을 하면서 우리는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103쪽).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노릇은 가난한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 형상을 지닌 주체적 변혁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는다(106쪽). 그러므로 악하거나 선한 하나님 노릇 하기의 진정한 대안은,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부여받은 존엄성과 권력을 회복하도록 돕고, 그들이 주도적으로 권력을 발휘하며 공동체의 번영에 기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책의 첫 번째 문장이자 중심 명제는 “권력은 선물이다”(11쪽)이다. 이를 조금 확장하면 이렇게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은 가장 고귀하면서 또한 가장 위험한 선물이다.’ 권력이 가장 고귀한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가장 좋은 모습이 하나님 형상의 가장 좋은 부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42-49쪽). 즉,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권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그렇게 창조된 세상은 수많은 다양한 생명의 “우글거림”(창 1:20)이 가득한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다(44쪽).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부여한 인류를 창조하셨는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은 창조적 권력을 발휘하며 온 창조세계를 완성형으로 만들어 나가게 하셨다(48쪽). 그런데 또한, 권력은 가장 위험한 선물이기도 하다. 인류에게 주어진 권력은 우상숭배(3장)와 불의(4장)라는 방식으로 늘 왜곡되고 오용되기 때문이다. 우상은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처럼 궁극적으로 무한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미끼로 던지면서, 실제로는 숭배자들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지배한다. 불의는 일부의 사람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하나님 노릇을 하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부풀리고 다른 사람들은 사람 같지도 않은 모습으로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또한 그것을 불가피하고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앤디는 그러나 우리가 상대적으로 더 잘 알고 경험하고 있는 권력의 위험보다는 권력의 고귀함에 강세를 둔다. 나에겐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이 진부하지 않다고 느낀 부분이었다. 그는 권력이 지난 세기 동안 종종 악을 생산하는 원흉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본질은 선하며 올바른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공들여 설득하고자 한다. 그중에서 일부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권력이 제로섬 게임의 대상인 한정된 자원이 아니라 ‘증식하는 자원’(33쪽)임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를 위해 드는 한 가지 사례가 자신의 첼로 레슨 경험이다(51-60쪽). 첼로 레슨에서 선생님은 첼로를 연주할 파워(즉, 권력)를 지녔고, 학생은 그 파워를 얻고자 연습을 한다. 선생은 학생의 엉터리 연주를 들어 주고 작은 기술들을 하나씩 익히도록 인내하며 돕는다. 레슨이 끝나면 선생님의 첼로 연주 파워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학생의 파워는 조금 더 증가해 있다. 우주에서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파워의 총량이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선순환을 위해서는 인내와 고통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파워에 관해 이런 선순환이 가능하다는 것은 심오한 수준에서 좋은 소식이다(60쪽). 인류가 제한된 권력의 독점을 위해 서로 투쟁해야만 하는 숙명 안에 있다고 믿는 니체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날 희망의 빛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앤디는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액튼 경)라는 유명한 말에 대해서도 반례가 존재함을 지적한다. 아기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부모가 아기를 양육할 때, 그 절대 권력이 부패하지 않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 이유는 “사랑이 권력을 변화시키며, 절대 사랑은 절대 권력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66쪽).권력과 관련된 또 하나의 유명한 경구로서, “모든 정치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며, 궁극적 권력은 폭력이다”(찰스 라이트 밀스)라는 말이 있다. 이 경구는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가 깊이 공유하는 신념이 되어 우리의 정치와 공동체적 삶의 양식에 은밀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앤디는 이 신념에 반대하며, 폭력이 권력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즉, 권력의 본성 자체가 폭력에 뿌리 내린 것이 아니라, 폭력은 권력의 ‘궁극적인 왜곡’이라고 주장한다(196쪽). 밀스가 옳다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드시 “폭력으로 이어지는 가파르고 미끄러운 내리막길”에 서 있다고 여겨야 하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야 하고, 결국 아무런 권력을 갖지 않는 길을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197쪽). 권력에 대한 비관주의나 낭만주의에 대한 올바른 대안은, 권력을 폭력이나 강요와 관련지어서만 상상하지 말고1) 창조와 번영을 위한 것으로 상상해 내는 것이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그것이 권력의 본래적 사용임을 선언하며2), 에덴 이후의 인류에게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 주셨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이 궁극적 파워가 아니라는 기쁜 결론에 도달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폭력은 뒤틀린 공포를 자아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하고 깨뜨릴 수 있고 실제로 무너진 파워다. 진정한 파워는 창조이고 가장 진정한 파워는 부활이다. 폭력이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놓더라도 부활은 번영을 회복할 수 있는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199-200쪽)
이제 나에게 신선한 지적 충격을 준 제도의 문제(9-10장)와 숨겨진 권력 주제(6장, 11장)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앤디는 제도(institution)가 권력이라는 고귀한 선물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번영에 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한다(243쪽). 이 주장은 처음에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교회와 내가 사랑하는 단체들을 떠올리며 정말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품게 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건강한 제도는 파워를 창조하고 분배하며(243쪽),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번영하는 환경이 된다(244쪽). 물론, 우상숭배와 불의를 끈질기게 지속시키기도 한다(245쪽). 그럼에도 그는 “인간 번영의 최고의 위협은 제도화가 아니고 제도의 상실이다”(268쪽)라고 주장한다.
숨겨진 권력 주제(6장)에 관해서 앤디는, 우리가 종종 자신에게 어떤 권력이 이미 주어져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권력이 숨겨질 때는 위험하다. 권력이 부지중에 과도하게 휘둘러지거나, 그와 반대로 사용되어야만 하는 순간에 태만하게 방치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특히 제도가 망가진 상황에서는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제도가 망가지면 어떤 사람은 가난해지고(즉, 역할이 위축되어 창조와 돌봄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과도한 지배자가 되어 하나님 노릇 하면서 권력을 오용하게 되며, 어떤 사람은 태만한 지배자가 되어 권력이 있음에도 그 권력을 방치하게 된다(304-305쪽). 제도의 변화를 위해서는 어느 공동체에서나 대다수를 차지하는 태만한 지배자들이 깨어나 자신에게 이미 부여된 권력을 창조와 번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306쪽). 개인적으로는 가정, 교회, 국가 등 여러 가지 수준에서 이미 나에게 부여된 권력을 과소평가하여 방치하지 않고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특별히 와닿았다.
이외에도 하나님 형상에 대한 더 깊은 묵상(5장), 권력 오용과 부패의 탐지 신호인 특권과 지위에 대한 애착(8장), 권력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훈련으로서 이삭줍기, 안식일, 안식년, 희년(12-13장) 등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다. 이 풍부하고 통찰력 넘치는 책을 직접 읽어 보는 즐거움을 많은 이들이 누리기 바란다.
주
1)“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과 아나뱁티스트 모두 밀스의 실수를 자주 반복한다. 즉, 파워가 궁극적으로 폭력은 아니라 해도 물리력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입장의 관심은 물리력을 적절하게 제한하는 데 집중된다”(204쪽).
2)타자를 향한 비강요와 창조 참여를 위한 공간 마련과 관련하여 앤디는 창조 기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간접 명령법’(jussive)과 ‘청유형’(cohortative) 명령에 주목했다(42-47쪽).
노종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좋은나무」 편집주간
*이 글은 뉴스앤조이(2022년 2월 10일)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