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영적 토대를 재건하라(김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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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승환
책 『도시의 영성』필립 셸드레이크 지음
서울을 생각해 보라.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고층 빌딩과 한강, 바삐 움직이는 지하철과 자동차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들…. 현대 도시는 회색빛의 거대한 건물과 기계들로 가득차 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는 이면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시간으로 채워져 있는 개인들의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들의 공동체다. 도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오랜 삶의 자리로, 단순히 거주지라는 개념을 넘어 시민들의 물적•인적•영적 토대를 제공하고 나아가 공동체의 정체성과 기억까지 간직한다.
도시를 인구 수 혹은 경제적 수치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다. 관계의 엄청난 끈들과 그를 둘러싼 연속된 사건들은 수많은 도시 공동체 이야기를 형성시켰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키며 변모해 가고 있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인간의 거주지가 형성되는 근본적 토대로서 ‘성스러움’을 언급했다. 성스러움은 사람들을 모으고 공동체의 질서를 제공하며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권위 구조를 만들었다. 산업화 이후 근대 도시는 계량적•계획적으로 구성되면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을 지향해 왔다.
하지만 현대 도시는 필립 셸드레이크(Philip Sheldradke)의 주장처럼, 도시를 단합시켜 왔던 영적 영역, 도덕적 비전들은 잃어버렸다. 도시민의 표면적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삶의 동기와 가치, 정체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수많은 관계의 끈들의 언저리에 작동하는 영성은 현대 도시가 재건해야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도 오늘날 도시에서 대성당과 신전과 같은 신성하고 영적인 공간들을 국회의사당과 대학, 박물관, 고층빌딩들이 대체했고, 백성의 영적 영역을 담당했던 제사장과 성직자들의 역할을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이 담당하고 있다고 보았다. 종교적 영성과 세속적 영성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누군가는 왜곡된 영성을 지배와 통치의 수단으로 삼아 도시를 운영하고 있다.
도시 신학의 사상적 흐름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마을과 도시의 초월성과 성스러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도시의 영성』은 현대 도시가 간과하고 있는 도시적 영성, 영적 도시의 초월적 영역들을 복원하고자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기독교 역사의 면면을 살핀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도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 나라의 모티브를 보여 주는 에덴 동산부터 새 예루살렘까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초월성과 다양성, 수직과 수평으로 구성된 그 나라의 특성을 알 수 있다. 물론 최초의 도시인 에녹성을 비롯해서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니느웨와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했던 반역의 도시들도 있다. 죄악의 도시, 신성을 잃어버린 도시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도시의 치유자이며 구원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의 삶으로 보여 준다. 도시민에게 고소를 당하고 도시의 통지자에게는 고난을 받고 도시로부터 추방당해 도시 밖에서 십자가를 지시지만 새로운 성 예루살렘은 그분이 완성하고자 했던 본래적 도시의 모델을 보여 준다.
『도시의 영성』 전반부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부터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까지 도시의 사상이 기독교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추적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속한 곳으로 세상의 도시와는 질적으로 다른 영역이다. 세속적 삶을 따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이상향을 따르는 자들의 모임이다. 중세의 수도원은 신앙적 공간을 넘어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으로 기독교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보여 주는 장이었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역사 속의 도시』(명보문화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도시로 수도원을 꼽으면서 영성과 일상이 균형 잡힌 규칙적 생활과 협업 구조는 좋은 도시의 모델을 보여 준다고 이해했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은 제네바를 시민권과 기독교 영성이 결합된 도시로 세우려 했고,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는 도시 안에 최초로 수도회를 설립하면서 보편적 선을 위해 도시 빈민들을 돕고 가르쳤으며, 셰이커와 같은 그룹은 그런 도시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다.
책의 전반부 끝머리에서 저자는 도시의 영성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사례로 미셸 드 세르토를 인용한다. 예수회 사제로서 신비주의 사상과 현대 사회의 일상성을 문화 이론으로 연구했던 세르토는 도시의 일상을 영적 실천으로 이어가는 한 가지 방법으로 순례/걷기를 제안한다. 걷기는 근대 건축가들이 기획한 도시 공간을 자신만의 독법으로 재해석하고 발화하는 작업으로서 도시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세속화 이후로 종교의 영역이 점점 쇠퇴하고 공적 영역에서 자취를 감추는 듯 보이지만 시민들의 삶과 일상은 여전히 종교적 영역에 속해 있다. 후기 세속 사회에서 종교는 근대가 잃어버린 종교적 초월을 다시 회복하면서 공적 영역에서 긍정적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
공간의 초월적 차원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도시의 영적 차원을 회복하기 위한 네 가지 요소를 제안한다. 신성함, 공동체성, 화해, 미덕이다. 후기 세속 사회에 종교는 개인적•영적 차원에 머물지 않으며, 공적 영역에서 더 나은 사회, 더 풍성한 삶을 향한 분명한 목소리를 낸다.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목적은 종교의 부흥이 아니라 도시의 비전과 도시민의 삶에 자리했던 본래적 모습을 찾아가는 데 있다. 도시의 종교는 다원화되고 파편화되어 가는 도시민들에게 소속감과 정체성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도록 안내한다.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마주침은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고, 공간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은 자의식의 깊은 곳에서 그 사람의 기억을 구성한다. 교회는 도시민들에게 저너머의 생이 있음을 각인시키고 현실적 삶을 초월하는 비전을 제공하는 동시에,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안내해야 한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미사는 초월적 삶을 향하도록 이끄는 동시에 예배와 성찬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게 한다. 또한 교회는 파편화된 개인들을 신앙과 비전으로 묶어 주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경험하게 하고 다양한 개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포용하고 환대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세계화와 다원화 사회에서 환대와 관용은 도시 종교의 필수 덕목이 되었다.
합리적 이성과 소비적 자본주의 안에서 도시 교회는 인간의 영성을 회복시키고 타자를 향한 사랑과 깊은 이끌림으로 관계적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그것이 도시의 영성을 재건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도시를 추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 땅의 도시를 부정하고 도피하게 하는 게 아니다. 현대 도시가 간과해 온 부분, 신성함과 초월적인 영역을 다시 발견하고 채워 주려는 것이다. 도시는 물리적 공간인 동시에 영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공간의 생산』(에코리브르)에서 변화의 성공 여부는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의 창출로 판가름 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많지만 그것을 담아 낼 장소와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황된 상상으로 끝이 날 것이다. 도시의 영성을 새롭게 하려는 시도는 그것을 담지하는 공동체의 존재로 증명해 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왜 자꾸 도시로 몰려들까?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성공에 대한 욕망, 자기 추구에 대한 욕망들의 총합이 도시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필립 셸드레이크가 도시의 교회들에게 제안하고 있다. ‘지금은 왜곡된 욕망과 그 표현들로 망가진 도시의 영성들을 새롭게 할 때’라고.
김승환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문화과정 박사 과정. “존 하워드 요더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석사 논문을 썼고, “후기 세속 도시에서의 교회의 공적 역할에 관한 연구: 공공신학과 급진정통주의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