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혈통이 아닌 언약으로 맺어진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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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이 아닌 언약으로 맺어진 공동체
‘선대’에 관한 라합과 정탐꾼들의 약속이 끝나고 15절부터는 정탐꾼들이 라합의 도움으로 여리고성에서 탈출해 여호수아에게 돌아올 때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추격자들이 정탐꾼들을 쫓는다고 생각하며 성을 나간 후 성문은 닫혀 버렸다(7절 참고). 이에 정탐꾼들이 여리고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탈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침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어 그녀의 창문을 통하면 바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1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에 더해 내레이터는 “그녀가 성벽 위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알려 준다. 그 만큼 ‘성벽’이라는 공간은 중요하다. 라합은 ‘성벽 위’에 사는 경계인이었다. 라합이 사는 물리적 공간은 경계에 있는 그녀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혈통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라합의 행동과 충성은 이스라엘을 위한다.2 이스라엘을 위하는 라합의 행동은 16절에서도 계속된다. 그녀는 정탐꾼들을 숨겨 주고 탈출시켜줄 뿐 아니라 안전하게 귀환하는 방법까지 알려 준다. 라합의 거짓 정보에 속아 요단 나루터까지 갔던 추적자들의 눈을 완전히 피하기 위해 산에 숨어 있으라고 조언한다. 22절을 보면 이 조언은 매우 적절했다.
라합의 도움으로 여리고성을 탈출한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좀더 자세한 규정을 제시한다(17, 20절).3 다급한 상황에서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라합과 선대의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은 가나안 사람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예. 출 23:32; 신 7:2; 참고 삿 2:2).4 그런 부담 때문인지 비밀만 지켜 준다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라합 가족을 살려 주겠다고 다급하게 했던 위기 상황에서의 약속(14절)과는 달리 지금 17절 이하에서는 책임을 피하려는 듯한 미묘한 태도 변화가 감지된다.5
먼저 정탐꾼들은 ‘허물이 없다’(나킴)는 표현을 세 번이나 사용한다(17, 19, 20절). 자신들이 요구한 조건들을 지키지 못해 라합의 가족들이 죽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허물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17절을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라는 식으로 번역해 약속을 확실히 지키기 위해 추가 조건을 제시한 것처럼 이해한다. 그런 면이 없지 않으나 17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해 우리는 허물이 없다’라는 선언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이 문장에서 그들이 한 약속을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라고 표현하여 그 약속을 맺게 된 책임 또한 은근히 라합에게로 돌리고 있다(이 표현은 17, 20절에서 거의 동일하게 반복된다). 정탐꾼들은 이방 여인과 그 가족을 살려 주겠다고 했던 자신들의 약속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더 자세한 지침을 추가한 것도 이런 부담 때문일 수 있겠다. 물론 이런 정탐꾼들의 태도는 이해할 만하다. 가나안 민족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지키겠다고 이제 와서 라합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6
하지만 정탐꾼들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7 가나안 사람들과 언약을 맺지 말아야 했던 이유는 인종이 달라서가 전혀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부터 이미 ‘순수 혈통 공동체’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많은 잡족’과 함께 이집트를 떠났으며 모세의 처가는 미디안 사람들이었다(출 3:1; 12:38; 18:12). 앞서 이야기한 라합의 고백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만의 부족신이 아니라 온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다.8 소위 ‘선민’ 이스라엘 남자들이 정탐에 실패하고 가나안 여인의 도움을 통해 목숨을 구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놓인 덕에 신적 은혜의 놀라운 보편성이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된 것은 참으로 역설이다. 우리는 모두 계획이 있다. 그러나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함께 망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진리가 은혜 가운데 드러나기도 한다.
18절에서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줄을 매고’와 ‘가족을 모으라’라는 두 가지 명령을 추가한다. 먼저 그들의 집을 다른 장소들과 구별할 표시가 필요했다. 정탐꾼들을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라고 한다. 그리고 라합은 자신의 가족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아야 한다. 이 줄은 어디에서 났을까. ‘이’ 붉은 줄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방금 막 정탐꾼들을 창문으로 내릴 때 사용했던 줄로 보인다. 개역개정이 ‘붉다’라고 번역한 줄의 색깔을 새번역은 ‘홍색’, 공동번역은 ‘분홍’, 가톨릭 성경은 ‘진홍’이라고 번역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샤니’인데,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죄를 묘사하는 색깔(‘주홍’, 사 1:18), 연인의 입술 색(‘홍색’, 아 4:3), 멸망할 자가 화려하게 입고 있는 옷의 색(‘붉은 옷’, 렘 4:30)과 사울이 이스라엘 딸들에게 입힌 화려한 옷(‘붉은 옷’, 삼하 1:24) 또는 ‘유능한 아내’의 집 사람들이 입는 옷의 색깔(‘홍색 옷’, 잠 31:21)을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성막 장식, 제사장 옷, 진설병을 덮는 보자기에 사용된 화려한 홍색을 가리키기도 한다(출 25:4; 28:5; 민 4:8 등). 세라의 손에 묶었던 홍색 실(창 28:28)에도 이 단어가 쓰였다. 영어 번역들은 이 단어를 일반적으로 scarlet이라고 번역하는데(어떤 경우에는 crimson), 이는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지은 소설 The Scarlet Letter(번역서 제목은 ‘주홍 글씨’다)에서 ‘주홍’ 글씨는 간음의 낙인을 찍는 글씨다. 그 만큼 이 색깔은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치고 선정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색이다.9 이런 특징은 이 줄이 라합의 집이 성매매가 벌어지는 장소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미 집의 창문에 걸려 있었을 것이라는 제안과 나름 어울린다.10 주변 사람들은 이 붉은 줄을 보며 라합을 경멸했을지 모르나 그런 수치의 표지가 구원의 도구가 된 역설을 본다.
붉은 줄을 묶고 가족들을 모으는 것만으로 라합의 가족의 목숨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집 문을 나가 거리로 가서는 안 되었다(19절상). 그런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고 정탐꾼들은 선언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방법은 정탐꾼들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유월절의 경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애굽기 12: 22 전후를 보면 이스라엘의 가장 원초적 구원의 역사인 첫 유월절 때 그들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 안에 온 가족이 모여 그 문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만 했다. 그랬던 것처럼 라합의 가족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에 입성할 때 붉은 줄을 창문에 묶은 집 안에 머물러야 했다. 새로 추가된 이 조건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을 명확히 만들려는 정탐꾼들의 적극적인 태도뿐 아니라 혹시라도 벌어질 실수를 미리 대비하는 자기 보호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20절에 나오는 정탐꾼들의 마지막 조건은 라합이 그들에 관한 비밀을 지켜줘야 할 현실적 필요를 드러낸다. 사실 이 조건이 성에서 탈출하기 전 원래 그들이 라합과 맺었던 약속의 유일한 조건이었다(14절 참고).
정탐꾼들의 말을 들을 라합은 약속이 체결되었음을 확인하고 그들이 요구한 대로 행한다(21절). ‘줄’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티크바’인데 이 단어는 ‘희망/소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라합이 창문에 맨 ‘줄’은 그녀의 ‘희망’이었다. 정탐꾼들의 원래 요구는 그들이 여리고에 들어올 때 붉은 줄을 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합은 그들이 떠나자마자 붉은 줄을 묶는다. 이것은 정탐꾼들을 내려 주기 위해 풀었던 줄을 다시 묶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라합의 입장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라합은 일관성 있게 행동했다. 하나님의 역사를 들어 알고 그런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정탐꾼들을 끝까지 도왔다. 또한 정탐꾼들의 새로운 요구에도 충실히 응했다.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
정탐꾼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한 라합의 조언은 매우 적절했다. 사흘 동안 숨어 있었기 때문에 추격자들이 길을 샅샅이 뒤졌어도 정탐꾼들을 찾지 못한다(22절). 라합은 정탐꾼들을 마지막까지 신실하게 도와주었다. 라합의 적절한 도움 덕분에 여호수아에게 안전히 돌아온 정탐꾼들은 하나님이 그 온 땅을 선물로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과 더불어 여리고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한다(24절).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하나님이 온 땅을 주셨다는 사실을 가나안 사람들의 두려움의 이유로 표현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없이 두 진술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공동번역과 가톨릭 성경 참고). 무엇보다 이 정탐꾼들의 보고는 9절에 나온 라합의 말을 인용한다. 라합을 통해 여리고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정탐한 셈이다. 실패할 뻔했던 정탐이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해 반전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방 여자, 그것도 기생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여자였다.
라합의 이야기를 신약과 연관시켜 이야기할 때, 라합이 묶었던 붉은 줄을 예수님의 붉은 피에 대한 예표로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교부들의 전통을 따른 것이지만, 사실 이러한 설명은 본문에 근거하지 않는다. ‘샤니’라는 단어는 딱히 피 색깔을 지칭하는 데 쓰이지 않으며 신약도 라합이 매어 놓은 끈의 붉은 색을 중요하게 언급하는 경우는 없다.11 라합 이야기를 신약과 연결한다면, ‘세리와 창녀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욱 잘 어울린다(마 21:31). 가나안 땅 여리고에 사는 기생 라합은 적절치 못한 직업과 신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알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따라 용기 있게 행동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목숨을 구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확신하게 된 것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서였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세리와 창녀들’이 종교 지도자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라합의 이야기는 이 복음의 비밀과 역설을 잘 보여 준다.
*주
1) 우리가 흔히 보는 성벽은 폭이 좁기 때문에 그 ‘위에’ 집이 있다는 묘사는 어색하다. 그러나 여리고의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 외벽과 내벽 사이에 집들을 지을 수 있었다. 『IVP 성경배경주석』, 304쪽.
2) Hawk, p. 47.
3) NIV는 정탐꾼들이 라합과 맺은 맹세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17절의 동사를 과거완료형(‘had said’)으로 번역해 정탐꾼들이 성벽에 난 창문을 통해 탈출하기 전, 라합의 집 안에 있을 때 자세한 요구를 한 것처럼 번역했다. 그러나 집 안에 있는 라합과 이미 창문을 통해 빠져 나온 정탐꾼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도 어색하지 않다(NRSV, JPS 참고). 가톨릭 성경은 17절을 ‘그러자’로 시작해 17절에 나온 정탐꾼들의 요구를 16절 이후의 사건으로 명시하고 있다. Nelson 또한 이 상황이 전형적이라고 보았다. Richard D. Nelson, Joshua: A Commentary (O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 51.
4)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출 23:32);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2);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신 20:16).
5) 참고. Nelson, p. 51.
6) 그 만큼 약속―혹은 언약―을 맺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며 이 주제는 기브온 사람들과의 언약이 문제가 되는 9장에 다시 등장한다.
7) Goldingay는 필자의 이해와는 달리 정탐꾼들은 라합의 야웨 신앙을 보았기에 그녀와 가족을 살렸다고 설명한다. Goldingay, p. 14.
8) Goldingay, pp. 13–14.
9) 구약 성경에서 ‘아돔’이라는 단어가 붉은 색을 묘사하기도 한다. 이 단어와 관련된 어근은 야곱이 에서에게 주었던 죽의 색(창 25:30), 물에 해가 비치어 피와 같이 붉어진 색(왕하 3:22), 붉게 물든 방패(나훔 2:3), 충혈된 눈(잠 22:29)등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10) J. Asmussen, “Bemerkungen zur sakralen Prostitution im Alten Testament,” ST 11 (1957), p. 182; Richard D. Nelson, Joshua: A Commentar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p. 51–52에서 재인용. McConville 또한 그것이 아마도 라합의 직업을 보여 주는 옷가지의 조각이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McConville, p. 18.
11) J. Gordon Harris. Cheryl A. Brown, and Michael S. Moore, Joshua, Judges, Ruth (UBC; Grand Rapids: BakerBooks, 2000), p. 29. 이 책에서 여호수아 부분은 Harris가 저술했기에 앞으로 인용할 때에는 Harris라고만 표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