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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전체를 여는 문 창세기 1-11장 다시 읽기』해설(차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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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준희(해설) 

『성경 전체를 여는 문 창세기 1-11장 다시 읽기』고든 웬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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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원형역사 속의 하나님, 인간, 세계

  

창세기가 처음 기록된 때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사이에는 수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저자와 독자의 간격이 이만큼 벌어지는 문헌이 얼마나 있을까? 오랜 기간 학자들은 이 간극을 메우고자 수없이 많은 학문적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창세기 1-11장의 장르와 역사성은 지난 2,000여 년 동안 줄곧 연구 대상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거리다. 이 부분은 구약성서학의 최고 격전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구약학자들이 달려들었던 분야다. 창세기 1-11장에 대한 이해는 한 성서학자의 성경 해석학적 좌표를 결정한다. 이런 면에서 웬함이 이 책 원서의 부제를 성경으로 들어가는 통로’(Gateway to the Bible)라고 붙인 것은 무릎을 치게 한다.

 

웬함은 오랫동안 모세오경 전반과 창세기에 관한 연구에서 매우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창세기 상: WBC 성경주석 1은 출판된 지 33년이나 지났음에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물론, 목회자들의 성경 연구에도 권위 있고 유익한 연구 및 안내서로 각광받고 있다. 웬함이 이 책의 서론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창세기에 대한 웬함 자신의 해석은 이전과 크게 바뀌거나 수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웬함은 특별히 이 책에서 성경의 신학적 핵심 원리의 일부를 생생하고 명확하게 제시한다고 자부한다.

 


선사원역사보다는 원형역사

 

창세기 1-11장에 관한 해석은 보수적인 해석과 진보적인 해석으로 나뉜다. 보수적인 해석은 창세기 1-11장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을 문자 그대로 기록해 놓았다고 간주하면서 역사성을 고수하려 하며, 진보적인 해석은 이 본문이 고대근동에서 전승되어 온 신화들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고 강조하면서 역사성을 인정할 수 없는 고대 역사 편찬 문헌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해석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웬함은 이러한 양극단의 주장 가운데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창세기 1-11장의 역사성을 인정하지만, 그 역사적인 실재에 대한 문자적 이해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웬함은 흔히 창세기 1-11장을 가리키는 표현인 선사’(prehistory) 혹은 원역사’(primeval history, 원시 역사) 대신에 원형역사’(protohistory)라는 새로운 표현을 사용한다. 웬함은 창세기1-11장의 이야기들이 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고, 그 이야기의 진실성유효성을 분명하게 담아내기 위한 용어로 원형역사라는 표현을 채택한다.

 

웬함은 창세기 1-11장이 처음에 일어난 일들, 즉 우주의 기원과 세상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차원에서 원형역사라고 부른다. 더구나 창세기 1-11장은 과거에 실존했던 사건들을 묘사하고 그것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이끈다는 점에서 지극히 역사적이라고 말한다. 원형역사에 대한 웬함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

 

역사는 과거를 복사해 놓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고, 허구는 영화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형역사는 과거에 대한 초상화와 같다. 화가의 의도가 충실히 반영된 이러한 묘사는 매우 적절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바로 이 의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성경을 읽울 때마다 어떤 이야기의 세부적인 사항이 역사적인지 아닌지 또는 상상력을 동반했는지 안 했는지를 늘 꼭 가려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와 그림을 구별하는 것은 이미 26여 년 전 필립스 롱(Philips Long)성경 역사의 예술(The Art of Biblical History)이라는 책에서 발전시킨 것으로 여전히 유용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 문헌과 구약성경: 연속성(유사점)과 불연속성(차이점)

 

창세기 1-11장의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문헌과 사상이라는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성경 저자는 저작 당시의 시대와 정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경은 백지상태에서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직접 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기존의 문헌과 사상을 매개로 하여 주어진다. 성경의 일차적인 의미는 시기적으로 앞선 고대 근동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웬함은 우선 창세기 본문의 형태와 구조를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적으로 분석한 뒤 이를 통해 창세기 본문의 의미를 끌어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창세기 본문을 고대 근동의 텍스트와 비교하여 분석한다. 즉 창세기 1-11장 본문을 1, 2-4, 6-9, 5-11장으로 나누어 각 본문을 문학적 구조고대 근동의 맥락에서 검토하여, 창세기 본문의 독특한 신학적 의미를 도출한다.

 

웬함은 창세기 1-11장과 메소포타미아의 본문들(아트라하시스서사시, 길가메시서사시, 에누마 엘리시)과 비교하며 유사점과 차이점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창세기 1-11장은 당대에 널리 알려진 고대 근동의 이야기들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고대 근동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대안적인 신학과 윤리를 설파한다는 주장이 웬함의 일관된 논지다. 이러한 논지에 대다수 구약성서 학자들이 동의한다.

 

웬함은 이 책의 1장에서 창세기 1(1:1-2:3)의 신학적 특징을 밝힌다. ‘오직 한 분인 전능하신 하나님인간 창조가 신적 창조의 정점이라는 점이 창세기가 고대 근동 문헌과 다른 독특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인간들의 음식 부양에 의존하는 반면에, 야웨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에게 음식을 제공하시고 계속해서 인간을 돌보시는 분이다. ‘구걸하는 신들베푸는 유일신은 전혀 다르다!

 

웬함은 이 책의 2장에서 창세기 2-4장이 고대 근동 문헌과 다른 점을 찾아낸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탁월한 관심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이 창세기의 독특성 이라고 한다. 전자는 땅의 먼지로부터 아담을 창조하고, 그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과일나무로 가득한 동산을 제공하고, 아담의 잠재적인 동반자로서 동물을 창조하고, 그의 갈빗대로부터 하와를 창조한 데서 드러난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처소로, 하나님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할 장소인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어서 추방되는 사건으로 드러난다. 고대 근동 신학은 인간 사회가 더 높은 문명으로 진화한다는 진보를 믿었던 반면, 창세기는 그 반대라고 단언한다. 사회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붕괴한다는 것이다.

 

웬함은 이 책의 3장에서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6-9)는 창세기 1-4장에 대한 간접적인 주석이며, 동시에 홍수 이야기의 메소포타미아 버전들(아트라하시스서사시와 길가메시서사시)에 대한 명백한 반론이라고 주장한다. 서사시의 신들은 변덕스럽지만, 창세기의 하나님은 단호하다. 야웨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단 하나의 불순종 행위 때문에 추방하고, 폭력에 빠진 온 인류를 파멸시키신다. 근동의 고대인들은 문화의 발전에 관해 낙관적이었다. 반면에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를 강조한다. 희망은 미래에 인류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만 있다.

 

웬함은 이 책의 4장에서 창세기 5-11(56:1-8 11)의 독특성을 탁월하게 도출한다. 이 부분은 웬함이 결론적으로 요약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더 좋을 듯싶다.

 

따라서 마침내 밝히 드러났다! 우리는 창세기 1-11장을 통해 고대 근동 이야기를, 특히 바빌로니아 자료들로 알려 있는 것들을 꾸준히 바꾸어 말하는 것에 주목했다. 창세기는 창조에서 홍수에 이르는 세계 역사에 대해 다신론 대신에 유일신론적 해석을 제공한다. 자연의 힘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신들 대신에 창세기는 모든 다른 힘들을 총체적으로 주관하는 한 분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한다. 인간을 신들의 편의와 안락을 위해 만들어진 부산물로 보는 대신에, 창세기는 세상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신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보시는 인간을 말한다. 신들의 변덕 때문에 인류에게 대참사가 들이닥쳤다고 보는 대신에, 창세기는 인류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폭력에 심취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스스로 위에 불러들였다고 말한다. 바빌로니아는 생명이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만, 창세기는 인류의 흩어짐과 많은 언어의 다양성이 하나님이 행동하신 증거라고 말한다. 이 행동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다스린다고 착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반대하는 것이다. 인류에게 희망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로운 계획에 있다. 하나님은 바빌론의 남쪽 도시인 우르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서 새 인류를 이끌게 할 것인데, 새 인류는 아담과 노아와 바빌론이 실패한 것을 성취할 것이다. (본문 p.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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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학하나님을 함께 공부하는 학우(學友)

 

웬함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창세기 1-11장과 성경신학(특히 신약성경)과의 관계, 그리고 창세기 1-11장과 현대 과학과의 관계를 모색한다. 창세기 1-11장과 고대 근동 문헌의 관계가 구약과 과거의 대화였다면, 창세기 1-11장과 성경신학 및 현대 과학의 관계는 구약과 미래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웬함은 성경 첫 장에서 마지막 장, 즉 창세기 1장에서 요한계시록 22장을 연결하는 신학적 주제 안에 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입증한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주권’, ‘인간의 존엄성과 죄’, ‘하나님의 거주와 다른 주제를 예로 들며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웬함은 과학적 발견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더 도드라지게 해 준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에 감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과학의 축적된 지식을 유일신론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겸허히 수용하면서 감탄하다.

 

만약 하나님이 현대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를 창조하셨고 유지하고 계신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셔야 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천체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빅뱅을 설계하고 관리하셨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셔야 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현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세포를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셔야 하는가?

그는 창세기 1-11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반복해서 창세기가 기원들에 대해 친숙한 고대 신앙과 이야기를 가져다가, 거기에 새로운 유일신론적 변환을 덧붙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에게 이 이야기들은 기원에 대한 현대 이론과 동등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1-11장의 저자는 당시의 과학과 반목하지 않았고, 이들과 진지하게 대화하며 유일신론적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웬함의 주장은 현대 과학과 종종 반목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한국의 일부 근본주의적 입장의 기독교계에서 눈여겨보고 귀담아 두어야 할 대목이다.

 

성경은 과학서가 아니라 신학서. 과학자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주 창조를 보고 배우지만(how), 신학은 과학자가 이해한 우주 창조가 누구의 작품이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알려 준다(who). 과학은 하나님의 작품인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신학은 우주와 자연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사색한다.

 

과학은 자연 일부의 법칙을 분석하고, 신학은 자연 전체의 의미를 규명한다. 창조(who)는 진리이며, 창조의 그림(how)은 다양하다. 과학과 신학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동반자다. 하나님을 함께 공부하는 학우다. 하나님의 흔적(계시)은 성경(특별계시)에만 배타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일반계시)에도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19-20)

과학과 신학은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과학과 신학은 자연과 성경이라는 서로 다른 텍스트를 연구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는다. 서로 손을 잡아야 하나님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신학이 독점할 수 없다. 성경이라는 책 속의 문자에 포위된 하나님만이 아니라 광활한 우주와 자연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도 만나야 한다. 신학과 과학이 손을 잡아야 비로소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차준희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취득하고,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한국구약학연구소(2007)를 설립해 목회자들을 돕고 있다. 창세기 다시 보기』 『시편 신앙과의 만남』 『구약사상 이해(이상 대한기독교서회), 출애굽기 다시 보기』 『예레미야서 다시 보기(이상 프리칭아카데미), 모세오경 바로 읽기』 『역사서 바로 읽기』 『시가서 바로 읽기』 『예언서 바로 읽기(이상 성서유니온선교회), 교회 다니면서 십계명도 몰라?(국제제자훈련원), 열두 예언자의 영성(새물결플러스) 등을 썼고, 구약 예언서 신학』 『오경입문』 『구약,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묵시문학(이상 대한기독교서회) 신학의 렌즈로 본 구약개관』 『구약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이상 새물결플러스)를 번역했다.

 



IVP 20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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