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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이 숨 쉬는 공간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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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 우리가 찾는 삶 (앤디 크라우치)
글_설요한 (IVP 편집자)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는 사회라고들 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전 세계와 연결되는 작은 장치를 손에 하나씩은 들고 다닌 지 어느덧 십수 년이 지났다. 초연결사회. 어디서든,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기술 문명 시대를 성찰하는 사람들은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왜 인류는 역사상 가장 연결된 시대에 가장 외로워졌을까?”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등으로 접근해 왔다. 하지만 고전학을 전공한 그리스도인이자 문화와 기술을 오랫동안 사유해 온 앤디 크라우치는, 기술 문제를 사회 현상 차원에서 보는 것을 넘어 ‘인격’이라는 화두를 끌어와 인간학적·신학적 질문으로 끌어올린다. 『컬처 메이킹』(2008년) 집필 당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창조성에 초점을 두고 문화 계발에 적극적 태도를 취했던 크라우치는, 이후 권력과 관계의 문제에 천착해 오다가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기술 발전의 영향을 성찰하는 데 집중해 왔다(The Tech-Wise Family, 2017). 『우리가 찾는 삶』(2022년)은 그 연장선에 있다.


  크라우치가 보기에 인간은 “사랑을 위해 설계된 마음-영혼-정신-힘의 복합체”다(p. 45). 우리는 욕망하고(마음), 고유한 깊이를 가지며(영혼), 의미를 추구하고(정신), 노력을 발휘하며(힘), 이 모든 차원이 사랑을 향해 정렬된 존재다. 하지만 기술-경제 체제는 이 인격적 특성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세계를 재편해 왔다. 기술은 사실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지만, 그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복합체인 우리 인격은 일부 요소를 상실해 왔다.


  단순히 기술 발전의 문제가 아니다. 크라우치는 ‘연금술사의 꿈’이 근대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 문제라고 본다. 근대의 기술은 일종의 마법(magic)이 세속화된 형태로, 이해보다는 (당장의 결과가 필요한) 명령을 추구한다. 그러한 기술에는 접촉과 대면이 없기에, 우리를 온전한 인격으로 만들지 않는다. 돈을 주고 기술을 사면 곧바로 결과를 얻는 장소에서 인격이 들어갈 공간은 점점 사라진다. 배달 기사와의 살가운 인사는 사라지고, 알고리즘에 따라 바삐 움직여야 하는 인격들은 점점 기계가 되어 간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크라우치는 우리를 1세기 역사의 한 장면에 데려다 놓는다. 기원후 50년대 후반 어느 늦은 오후 고린도 지역, 로마 시민 가이오의 집이다. 당시 로마는 노예제 사회로, 영아 사망률이 높아 신생아의 생명이 경시되는 사회였다. 하지만 가이오의 식탁에서는 모든 인격이 인격답게 대우받고 있었다. 각 사람의 이름이 불렸다. 크라우치가 보기에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말 중 하나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롬 16:22). 이름 없는 노예 서기가 자신의 이름으로 공동 저자가 되었다. 가이오의 집안 회중은 모두 주 안에서 동등한 형제자매였다.


  이 역사적 장면을 통해 크라우치가 제안하는 삶은, 인격성을 상실시키는 기기에서 인격성을 고취하는 도구로(9장), 파편화된 개별 가족에서 상호 의존하는 돌봄이 살아 있는 가정으로(10장), 취약한 모습을 가리는 주문에 걸린 삶에서 모두가(‘쓸모없다’ 여겨지는 자들까지도!) 존중받는 복된 삶으로(11장) 이동하는 삶이다. 역사는 거대한 권력보다는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의 사슬’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 그 사슬이 생명과 인격을 보존해 왔다. 시대가 지나면서 마술의 제국은 무너졌어도 사랑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방 하나에도 들어갈 수 있을 “단 100명의 사슬”(p. 242)이 우리를 예수님과 이어 준다. 생물학적·문화적으로 각기 다른 계보에서 와서 각자의 사연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만남.


  사실 현대 기술의 발전상에 놀라워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크라우치가 설정하는 기기(인격 배제)/도구(인격 존중) 구분에는 임의적인 면이 있다. 자율 주행 차량은 “기계적인 환경”(p. 113)으로 제한하지 않아도 인간 주행 차량의 세계에 녹아들면서도 안전을 증명하고 있다. 운전을 비인격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은데 차라리 운전에 들이는 노력을 줄이고 인격성을 다른 방식으로 고양해 본다면 어떨까. 식기세척기가 크라우치에게는 아내와의 설거지 대화 시간을 없앤 것과 달리, 혼자 설거지하던 내게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기술과 인격성이 근원적으로 길항 관계를 이룬다고 여기게 된다면 과한 일이다. 과도기는 결론이 아니며, 기술은 또 다른 긍정적 차원의 인격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세탁기는 손빨래를 빼앗는 장치였을까, 인류(특히 여성)를 해방하는 장치였을까.


  물론 이런 소소한 시비가 크라우치의 문제의식을 허물지는 못한다. 마법(기술)을 통해 결과물만 얻고자 하는 세계에서 인격의 교류가 사라지는 문제.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들을 메마르게 한다. 즉, 창조의 모습에서 괴리시킨다. 기술이 사회를 재편하는 양상은 때론 파괴적이다. 어느새 AI는 전쟁(살상)에 투입되었다. AI 낙관론에 기대 투자한 사람들은(그리스도인도 예외 없이) 기업의 노동자들이 그저 기계가 되길 바라고 있다. 거기서 사람은 과연 인격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우받고 있을까.






 



 
IVP 202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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