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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스승,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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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설요한 (IVP 편집자)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복이다. 귀감이 되는 사람들은 삶에서 더러 만나지만, ‘아, 이 사람에게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 하는 끌림과 더불어 점점 더 알고 싶어지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어떤 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에게 실망하는 순간도 있겠으나, 그 모든 한계에도 결국 존경하게 되는 사람. 그건 아마도 그가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알고 있거나 추구하고 있기에, 그가 걷는 길을 나도 따라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 사고를 훈련하는 학자라면 자기 분야의 누군가를 쉬이 스승 삼기 어렵지 않을까. 자기 분야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 지식의 경계를 넓혀야 한다는, 그럼으로써 학계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선대의 인물들은 존중할 대상이더라도 동시에 극복할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신학에는 또 다른 경우가 있는 듯하다. 신학은 단순히 지적 탐구를 넘어 궁극적 실재, 존재의 의미, 삶의 방향 등을 다루며, 그 내용이 자신의 정체성과 직접 연관된 경우가 잦다. 그런 만큼 신학자에게 선대의 사상가들은 지식 전달자를 넘어 신학자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동반하고 싶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하물며 선대의 사상가가 당대를 살아가는 가운데 희노애락의 흔적을 남기며 성찰해 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오늘을 위한 아우구스티누스 인생 수업』의 저자 조장호 교수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스승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신학의 거물이기에 그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웠겠지만, 저자는 그의 삶과 신학을 연구하면서 비판적 연구 대상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다. 그래서 저자는 “내 신학과 믿음, 교회에 대한 섬김과 헌신을 지도한 스승”(p. 16)에 대한 존경심을 한껏 담아, 책을 서술하는 내내 아우구스티누스를 ‘선생’이라 칭하며 그를 소개한다. 분명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저술을 면밀히 연구한 흔적이 보이는 학술적 글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전도 책자 같은 필치도 느껴진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신학자보다는 “영적 지도자이자 목회자로서의 모습을 더 부각”(p. 17)하고자 한다. 저자가 보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 이후의 기간을 무엇보다 목회자로 살았기에 그의 저술은 목회 맥락에서 쓰였다고 이해하는 게 옳다. 저자 역시 웨이코한인교회에서 15년간 목회해 왔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목회적 고민에서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목회의 핵심에는 결국 ‘무엇이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다는 데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의 스무 장은 모두 이 질문을 향해 있다.

  1장 “행복을 찾아서”에서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작 『행복한 삶』을 들며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 ‘참된 행복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지’ 묻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험에 따르면 “선한 것…또한 변치 않고 지속하는 것”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p. 42). 그리고 그러한 최고선은 하나님이며, 결국 하나님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 하지만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지(caritas) 않으며, 세상과 자신을 사랑한다(cupiditas).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며, 은총으로 말미암아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 사람이 행복하다.

  은총으로 말미암은 행복의 길로 이끄는 인도자가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중보자, 길과 목적지, 양식, 의사가 되신다(6장). 그분은 세상에서 흔히 여겨지는 능력, 아름다움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즉 그분 자신이 “부서짐을 통해 우리의 부서진 형상을 회복시키셨다”(p. 140). 그리고 그렇게 부서진 사람들을 치료, 회복하는 곳이 교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목회자로서 사람들을 (모두의 스승인)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교사 자신이 그 진리로 인해 행복해하는 것”을 봄으로써 진리로 이끌렸다(p. 159).

  인생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참된 행복을 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탐구는 하나님을 보는(관상) 지복의 상태를 점점 강조하는 데로 이어진다. 이는 흔히 오해하듯 단순히 신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으로 만나며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발을 갖고 있습니다. 그 발이 교회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손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 눈이 궁핍한 사람들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요한 서간 강해』, 7.10. p. 376에서 재인용).

  저자는 스승을 깊이 존경하나, 단순히 스승을 답습하지 않는다. 결국 스승이나 제자나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기 우물을 파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자신의 우물을 팔 때에라도 그 물의 근원,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은총”(p. 397)을 바르게 찾아야 할 것이다. 이방인 목회자인 저자가 이방인 목회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끌렸던 것은, 그 스승이 자기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끝까지 영혼의 궁극적 지향점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IVP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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