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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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박예찬 (IVP 편집자)
끔찍한 악인을 한 명 떠올려 보자. 히틀러, 조두순, 자신을 몹시 힘들게 했던 사람, 누구든.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회심시킬 수 있는 ‘정신 조작 버튼’이 주어진다면, 눌러야 할까? 얼핏 생각하면 누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버튼 하나면 그는 이전 삶을 청산하고, 구원받은 자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그런데 어딘가 찜찜하다. 난감한 두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용서에 관한 것이다. 버튼 하나로 가해자가 돌연 참회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면 피해자의 고통은 해결되는 걸까? 그 사과는 진정한 사과라고 할 수 있을까? 피해자들은 정말 그것을 원할까? 용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또 하나의 복잡한 문제는, ‘버튼 하나로 그 악인이 예수를 믿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심,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만약 그렇다면, 선교 기관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루빨리 이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기술과 기계로 신앙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옳은 걸까? 오히려 그 버튼은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과 회심을 왜곡시켜 버리는 기계이지는 않을까?
치열하게 질문하는
김민석, 안정혜 작가의 만화 『영생을 주는 소녀』는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한 작품이다.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질문과 뒤엉켜 씨름하는 작품이다. 작중 배경인 IT 기업 ‘에붐’에서는 이 ‘정신 조작 버튼’에 해당하는 기계 ‘토브’를 개발하려 한다. 이 프로젝트는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데, 흉악범들을 납치해 실험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납치된 사람 중에는 윤민후 목사가 있다. 그는 에붐의 대표 이도연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자였다. 이도연 대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폭력 없는 세상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이러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회사에 개발자로 입사한 윤다라는 죽은 줄로 알았던 아버지 윤민후가 실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지만,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해 온 자신도 그에게 사과받고 싶었기에 이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장지오 목사라는 중요한 인물이 나오는데, 분량상 만화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토브를 개발하는 과정은 순조롭지 않다. 한 사람을 기필코 변화시키겠다는 마음과 아무 처벌 없이 가해자가 갱생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이 부딪힌다. 과학 기술이 기독교를 위협할까 두려워하는 입장과 그 기술로 선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입장이 대립한다. 치열한 고민과 갈등이 작품 내내 넘실댄다.
멀리 가기 위하여
그래서인지 출간을 준비하는 동안 여러 곳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들었다. 우려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파고 들어가면 결국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거침’, 그 불온함에 기인한다. 그러나 못 말리게도, 그럴수록 이 책이 좋아졌다. 내가 읽고 싶은 책, 그리고 독자에게 건네고 싶은 책은, 그 아래서 뭐가 나오든 매끄럽고 단단한 빙판을 박살 내는 도끼 같은 책이니까.
그 힘은 『영생을 주는 소녀』가 끝까지 움켜쥐고 있는 질문에서 나온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기독교의 역할, 폭력의 사슬과 용서의 불가능성… 쉽게 대답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들도 서로 격돌하고, 그 질문들에 부딪혀 부서지기도 한다. 그러나 쉽게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은 “좋은 질문”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
_『정확한 사랑의 실험』
교회는 과학의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심하게 휘청거렸다. 갈릴레오와 다윈이 등장했을 때도, 코로나가 유행했을 때도 속수무책이었다. 누구도 “좋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으므로 멀리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고 인류는 또 다른 과학의 바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영생을 주는 소녀』는 그 불어오는 바람을 예민하게 감각하며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 바람에 꺾이지 않고 나아가려면 교회는 그 질문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