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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어그램, 마음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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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정신실 소장(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선의를 가지고 타인을 사랑하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가 늘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극한의 갈등으로 결별의 위기에 있는 사람조차도 각자는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고들 주장한다. 관계에서 ‘최선을 다함’이 능사는 아닌 듯하다. 심지어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관계나 공동체에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최선을 다하되, 최선을 다하는 ‘자기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최악이 될 수 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지만, 자기 지식에 관한 한 어느 면에서 우리는 모두 원천적 무능의 상태에 놓여 있다. 내 눈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데 내 얼굴만은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자기 밖으로 나가서 자신을 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모두 일정 부분 나르시시스트일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관계가 파국으로 가고, 공동체가 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브레넌 매닝의 말을 빌리자면 “죄의 본질은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이다. 

나는 MBTI와 에니어그램을 좋아한다. 저마다 고유한 존재를 어떻게 열여섯이나 아홉 칸에 집어넣을 수 있느냐 하는 흔한 비판과 오명을 감수하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내 얼굴을 비춰 주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내게 에니어그램과의 만남은 일종의 구원 체험이었다. 신앙은 좋은데 인격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이율배반에 관한 고민을 해결하는 열쇠였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 1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을 깊이 알지 않고는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고는 자신을 깊이 알 수 없다.” 내 마음을 외면한 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한’ 바리새인이었던 나를 세리의 자리로 안내해 준 것이 에니어그램이다. 모르고 있었고, 알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을 비추었기에 많이 아팠지만, ‘자기 지식’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직면하다, 직면시키다 

성격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 주는 에니어그램은 하나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죄로 인해 깨어진 존재인 기독교적 인간관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에두르지 않는 죄의 고발은 에니어그램이 가진 독보적인 특징이다. 아홉 가지의 성격 유형마다 타고난 성격적 선물이 있고, 그것을 뒤집으면 동전의 양면처럼 ‘근원적인 죄’라는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를 외면하고 선물로 주신 재능에만 과도하게 집착해 오직 그것으로 세상을 통제하려 할 때, 즉 열정이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빗나갈 때 분노, 교만, 거짓, 질투, 탐욕, 공포, 방종, 파렴치, 게으름의 죄가 된다는 것이다. 

에니어그램은 이렇다 할 성찰 도구가 없는 한국 교회에 선물이 되었다. 교회와 선교 단체를 통해 조용하게 깊은 호응을 얻으며 전파되었다. 오용도 있었다. 죄를 ‘직면시키는’ 수단으로 에니어그램이 사용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회개는 죄를 깨닫는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주체적이며 자발적인 현상이다. 물론 성령 안에서의 수동적 주체성이겠으나, 적어도 강압하는 인간적 힘의 작용은 아닐 것이다. ‘직면시킨다’는 표현에는 영적 폭력 행사, 더 나아가 영적 학대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에니어그램은 행동 이면의 내적 동기를 신기할 정도로 파헤친다. 그래서 ‘죄’라는 언표가 더해져 자신 아닌 타인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때 매우 위험하다. 

나는 ‘직면시키는 에니어그램’의 피해자를 많이 만났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 교회의 영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 에니어그램 교사들에게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누구보다 에니어그램을 사랑해 열정을 쏟으며 에니어그램 교사를 자처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기독교 영성적 에니어그램을 개발하고 가르친 리처드 로어로 대표되는 1세대 에니어그램 교사들의 업적이 ‘죄성’의 발견과 자각이라면, 에니어그램을 오늘이라는 상황에 비추어 새로운 지혜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균형의 에니어그램


『변화가 필요할 때, 에니어그램』은 기독교 영성적 에니어그램으로서는 드문 실용적인 안내서다. 에니어그램을 통해 내가 얻은 유익이 ‘죄 된 내면’을 만나는 일이었기에 가르치는 것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마치고 나면 수강한 분들의 표정에서 “그래서 어쩌라고요?” 하는 말을 읽는다. 돌아가는 뒷모습에서는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하는 말씀을 떠올리기도 한다. 화장기 없는 나의 민낯을 마주한 당황스러운 무거움을 안다. 속사람으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되는 반가운 신호이기는 하지만, 정작 홀로 걸어가야 할 침묵 기도의 길은 낯설고 막막하니까. 

이 책은 반갑게도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물음에 답을 주고 있다. 에니어그램 아홉 개의 성격 유형은 장, 가슴, 머리, 세 개의 중심에서 출발한다. 어떤 정보나 상황을 접할 때, 이 셋 중 하나를 먼저 클릭한다는 뜻이다. 세 개의 중심 중 하나의 중심을 잘 쓴다기보다는 여기에 고착되어 있다고 하는 게 맞다. 그간의 에니어그램(특히 기독교 영성적 관점의) 교사들은 고착으로 인한 불균형을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 많이 가르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균형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균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론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세 개의 중요한 힘을 균형 있게 활용할 수 있다는 그 자체다. 저자가 말하는 ‘균형’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우리 안에 그분에게까지 자랄 무한한 힘이 있다는 믿음을 반영하기에, 이는 참으로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이다. 

1부에서는 지배적인 중심, 2부에서는 각 유형의 억압된 중심을 통해 균형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억압된 중심을 끌어내어 균형 찾기를 안내하는 2부는 에니어그램의 날개와 화살 그리고 신프로이트학파의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의 행동 양식(움츠림형, 대항형, 의존형)의 개념을 먼저 이해하고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펼친 독자라면 이미 충분히 아는 내용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자료를 참고하면서 읽으면 유익할 터이다. 지배적 중심에 더욱 고착되는 이유로 저자는 ‘스트레스’를 든다. 불확실한 세상,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스트레스는 평생 겪는 현실이다. “스트레스 대처, 균형, 변혁”이라는 원서의 부제처럼 진단을 넘어 처방까지 제시하는 에니어그램의 지혜를 향유해 보기 바란다.



에니어그램은 과학이 아니다


에니어그램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벗들과 함께 “에니어그램은 과학”이라며 농담하는 때가 있다. 에니어그램 유형을 통해 알게 된 ‘자기 지식’으로 나 자신을 꽤나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차에, 또다시 내가 모르던 내 마음을 만나게 된다. 특히 3중심, 날개와 화살의 역동으로 나를 설명하는 기가 막힌 언어를 발견할 때다. 그러나 에니어그램은 엄밀하게 말해서 과학이 아니다. 심리학이라는 과학의 틀에 가둬지지 않는 직관적인 도구다.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채 짧게 잡아도 2천여 년의 영성사 안에 전해져 왔으니 현대 심리학으로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호한 지점을 품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헨리 나우웬을 2번 유형으로 본다. 나는 나우웬을 4번 유형으로 보기 때문에 그 점이 조금 불편했다. 2번 유형인 저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헨리 나우웬과의 ‘2유형적’ 동질성에 더 많이 주목했을 테고, 나우웬에 대한 사랑이 저자 못지않은 나로서는 나우웬의 유형을 4번의 스트레스(또는 미성숙의 화살) 방향인 2번으로 추정하기가 싫다. 나우웬이 몇 번인지는 최종적으로 당사자만이 확인해 줄 수 있으니 천국 가서 여쭤봐야겠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에니어그램의 매력이고 미덕이다. 용어에 매이거나 단정하지 않고 열어 두고 또 열어 둔 상태로 과정을 통해 자기를 찾아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 좋다. 『변화가 필요할 때, 에니어그램』은 그 길 위에 새롭게 세워진 또 하나의 이정표다. 



IVP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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