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시대를 꿈꾸며(김동희)
관련링크
본문
글 김동희
책 『여성은 인간인가?』도로시 세이어즈 지음
생존의 차별과 차별의 연속
내가 태어난 1981년 대한민국의 출생 성비는 107.1명이었다. 남아 107.1명이 태어날 때 여아 100명이 태어났다. 자연적 남녀 성비가 105:100이므로 여아 100명 중 2명은 엄마 배 속에서 죽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비율은 계속 높아져 내가 태어나고 십 년이 지난 후에는 113:100에 이른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아서 남자라는 이유로 세상의 빛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아남았지만 얼마나 많은 아이가 여자라는 이유로 죽었을까?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연합고사를 보고 성적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입시에 떨어진 학생은 후기 고등학교에 입학하곤 했다. 당시, 지역에는 네 개의 인문계 고등학교가 있었고, 입학 정원은 모두 650명이었다. 네 학교 모두 남녀공학이었는데 내가 입학한 학교만 여학생이 남학생에 비해 훨씬 많았고, 다른 세 개 학교에는 남성 325명, 여성 325명 동일한 수의 학생들이 입학했다. 그 이유는, 우리 학교만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시험 결과를 반영하여 학생들을 선발했고, 다른 세 개 학교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여 시험 결과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성별 구분 없이 성적순으로만 입학생을 선발한 우리 학교의 여학생 비율이 훨씬 높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체 여학생들의 평균 점수는 남학생들보다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세 개 학교에서는 남녀 학생이 동일한 시험 성적을 받았더라도, 성비를 맞춘다는 미명하에 남학생들은 남성라는 이유로 합격을 하고, 여학생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합격하여 후기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분명 불합리한 제도였다. 고교 서열과 성적순 선발이 입학 제도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성별을 구분하고 성비를 맞춘다는 것 자체에 성차별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음을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런가 하면 여성 신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교회에도 차별이 존재한다. (여러 층위의 차별이 있지만) 간단한 문제 중 하나는 남녀 화장실의 변기 수가 거의 같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화장실 사용 시간을 고려할 때 그 차이는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남성인 나는 지금까지 불편함을 모르고 지냈지만 아내와 함께 화장실에 갔다가 아내보다 훨씬 빨리 볼일을 끝내고 나와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인간으로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는 『여성은 인간인가?』에서 여성을 여성으로만 대하지 말 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주장은 하나다. 일관되다. ‘여성도 인간이고, 남성도 인간이다. 여성을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고정관념이 차별을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그는 다음의 예로 이를 설명한다.
“저는 결혼한 지 11년이 되었고 결혼기념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 달 전부터 아내에게 알려 주고 그날 저녁을 성공적으로 보내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저와 다르게 아내는 결혼기념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미리 알려 주지 않으면 그날의 의미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결혼기념일이 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내의 이런 무관심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그의 글에서 이 질문을 한 남성은 자신의 아내가 ‘여성의 범주’에 맞지 않고, 아내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결혼기념일을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남성이 결혼기념일을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이는 남성이기 때문에 혹은 여성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성향’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개인의 각성과 공동체적 연대
차별로 인해 상대적 이익을 얻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차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특별히 고민할 필요도 없고, 그에 대한 문제 제기도 거의 없다. 무엇보다 차별을 없애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차별의 당사자가 되면, 문제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두 가지다. 순응자가 되느냐, 반항아가 되느냐.
저자는 “이제는 각 여성의—그리고 각 남성의—개인적 필요를 더 강하게 강조해야 하는 때가 왔다고 확신[한다]”고 말한다. 즉, 개개인의 각성을 강조한다. 거대한 사회적 흐름과 만연한 풍조에 순응하지 않고 용기 있는 ‘반항아’가 되려면, 결국 각성된 개인으로 먼저 서야 한다는 뜻이다. 세이어즈는 1938년에 이미 개인의 각성을 외쳤는데, 우리 사회는 세이어즈의 시대로부터 8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각성된 개인들이 서서히 그 목소리를 내면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다.
세이어즈가 살았던 시대, 유럽에서는 전체주의가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그룹이네 집단이네 하는 문자적 사용 자체를 꺼렸을지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그룹이 아닌 톰, 딕, 해리, 즉 개인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개인의 각성은 물론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지만, 개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주변 혹은 사회적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순응하기로 한 사람들 속에 있는 것과 순응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 속에 있는 것, 즉 어느 곳에 서 있느냐에 따라 나의 결정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차별적 요소와 환경에 저항하기로 했다면 각성된 개인들이 모인 연대, 즉 공동체를 이루어 그러한 정신을 공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남성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성차별적 문화 속에서 사회적으로 이익을 얻는 집단의 구성원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러한 사회가 지속되는 것이 나 개인적 차원에서는 사실 이익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식하지 않고 침묵할수록 나도 모르게 사회로부터 얻는 이익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차별적 구조에서 비롯한 나의 이익은 다른 이의 불이익을 양분 삼아 얻게 되는 것이다.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차별의 악함에 직면할 수 있었고 다른 수많은 종류의 차별들에 대해서도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직면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고(나의 경우 장애인과 저학력자들), 차별에 반대하는 소위 ‘반항아’들과 소통할 수 있었으며, 그들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조금씩 연대의 길에서 그들과의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지금까지 변해 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차별을 당연시하던 시대가 있었으나, 우리는 점차 차별이 약화되는 시대 또는 차별을 약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여긴다.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차별에 대한 인식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고민하는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여성을, 병자를, 죄인을, 아이를, 모든 인류를 ‘진정한 인간’으로 대하고 또 그러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남의 불이익을 양분 삼아 내 이익을 얻는 조악하고 비루한 삶에서 벗어나 더 풍성하고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동희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공인노무사로 일하고 있으며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