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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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오늘을 사는 이유』서론
<오늘을 사는 이유> _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
유로스타 열차를 타고 브뤼셀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열차는 세인트팽크라스 역으로 접근하면서 선로 곁에 있는 빅토리아풍의 폐건물들을 지나갔다. 많은 건물이 온갖 낙서, 슬로건, 항의의 상징 등으로 지저분하게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열차가 역에 진입하면서 속도를 줄이자 어느 벽에 적힌 또렷한 메시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인생은 한 번뿐이야, 영원하지 않아.
그러니 신나게 살아. 단숨에 들이켜.
웃어넘겨. 진하게 살아.
인생을 가져갈 순 없어. 인생은 한 번뿐이야.
물론 이 말은 덧없는 욜로 철학(YOLO, "You Only Once")의 요약판이다. 이는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금언ㅡ"내일이면 죽을테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ㅡ의 대중판으로 많은 대학 캠퍼스를 잠시 휩쓸었다. 그러나 그것이 에피쿠로스 철학의 왜곡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욜로의 신봉자 가운데 날카로운 반전이 있는 그 철학을 탄생시킨 본래 어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죽을 인생, 덧없는 인생, 깨지기 쉬운 인생
한마디로 우리는 존재의 한가운데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여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고, 우주는 마치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없이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동안에도 대다수는 우리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고, 너무도 순식간에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지구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흔적이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중요성을 대단치 않게 여기든 혹은 과도하게 인식하든, 우리는 그리스인이 말하듯 한갓 “죽을 인간”에 불과하다. 어느 로마인의 묘비명을 빌려 말하면 “내가 그렇듯이 당신도 그렇고 모두가 그렇다.” 또는 성경이 말하듯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우리 인생은 세 개의 단어로 묘사될 수 있다. 죽을 인생, 덧없는 인생, 깨지기 쉬운 인생. 우리 인생이 깨지기 쉬운 이유는 우리가 죽음에서 떨어져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한 줄기 숨결일 뿐이며, 언젠가 우리 모두는 최후의 한 숨으로 인생을 마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너무나 짧은데다가 충분하게 살 수 있는 만큼 쉽게 낭비될 수도 있다면 결국 어떻게 되는 것일까? 쏜살같은 세월을 어떻게 잘 활용할까? 일순간에 불과한 인생은 삶, 의미, 목적, 정체성, 진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옳고 그름 같은 개념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인생은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주, 시간, 역사, 실재, 그리고 하나님, 신들, 또는 무(無)의 존재 여부 등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검토된 삶”,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이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강렬한 시간의 도전과 빠른 생활의 압력
요컨대, 우리 인간이 직면하는 도전은 땅 위에서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과 그렇게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짧은 인생이 몸담은 현실의 기본 요소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둘은 서로 다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디오게네스에게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물었을 때, 이 완고한 늙은 철학자가 “내 빛을 가리지 말고 비키시오!”라고 대답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우리는 어느 공간을 점유해서 타인의 접근을 막을 수 있지만, 아무도 시간을 독점할 수는 없다. 시간은 우리의 “공유지”, 즉 어느 순간에든 살아 있는 모두에게 열린 공유의 땅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백만장자, 억만장자, 곧 등장할 조만장자를 보라. 그들은 재력이나 기술이나 정치권력의 면에서는 거인일지 몰라도, 시간과 마주하면 우리와 다름없는 작은 사람이자 죽을 인간일 뿐이다. 그들이 어떤 장래 계획과 꿈을 갖고 있든지, 어떤 의도와 해결책이 있든지, 어떤 에너지와 자원을 갖고 있든지 간에, 우리와 똑같이 죽음이 마지막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 연장의 꿈을 꾸는 이들이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하더라도 죽음이야말로 인류 “최후의 적”임이 틀림없다. 영웅이든 악당이든, 성인이든 죄인이든,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우리 모두는 결국 죽는다. 모든 인생은 시간에 매여 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의 기본 조건은 소설가이자 시인인 토머스 하디(Thomas Hardy)의 말대로 “시간으로 찢긴”(time-torn) 상태다.
하지만 시간의 도전은 우리 현대인에게 한층 더 강렬하다. 잘 알려져 있듯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들을 “임금 노예”로 묘사했는데, 죽음에 대한 생각과는 별개로 현대 세계에 몸담은 우리는 일부가 “임금 노예”와 “빚의 노예”인 만큼 상당수가 “시간의 노예”임을 잘 알고 있다. 진보한 현대의 즉각적인 세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공허해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어지듯이 삶의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을 인식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살고 있다는 뜻인가?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시간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는 전례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시간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현대의 빠른 생활의 압력 아래 어떻게 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시간에 매이고 시간으로 찢긴 상태를 피할 길은 없다.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 시간의 노예라는 악몽에 대한 해답, 그래서 시간을 바라보고 인생을 최대한 활용할 길은 있는가?
카르페 디엠의 이상을 성취하는 확실한 길
카르페 디엠, “오늘을 잡으라”, 또는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이상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성취해야 할까? 이를 하나의 구호나 대학생의 포스터에나 어울릴 만한 상투적 문구 이상의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개의 뻔한 함정—이기적으로 또는 단기적으로 오늘을 붙잡는 것, 또는 무작위로 살아가는 즉흥성을 기르는 것—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현대의 빠른 생활이 끊임없이 가하는 압력 아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과학은 그 본질상 사물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으나, 우리에게 필요한 의미는 줄 수 없다. 3천 년간 이어져 온 철학은 우리의 사유를 날카롭게 해 주었으나 견고한 답변들로 인도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깊은 사유를 거부하는 풍조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의 지혜는 여전히 우리가 궁극적 믿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진리를 견지한다.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앞을 열어 주는 단순하고 곧고 확실한 길이다. 오늘을 붙잡는 것과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성이나 부조리함에 직면할 때 과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상이란 그것을 성취할 만한 인생관을 요구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인생관은 시간과 역사, 인간의 중요성과 거대한 계획 등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다루는 어떤 궁극적 믿음, 신앙, 관계, 신뢰 안에서 가장 잘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요컨대 오늘을 붙잡는 것,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셋 모두를 이루려면 충족해야 할 요건이 있다.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다루려면 시간의 창조자와 시간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 창조자가 그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준 역할을 알아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만 시간과 역사 전체의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개인의 소망과 운명을 우주 자체의 목적과 운명에 맞추는 삶을 살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사실이다.
* 이 글은 오스 기니스의 『오늘을 사는 이유』 서론을 생략하여 발췌한 것이고, 소제목은 편집자가 임의로 추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