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설요한
책 <여전히 우리는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 리처드 미들턴, 브라이언 왈쉬 지음
리처드 미들턴과 브라이언 왈쉬의 <그리스도인의 비전 Transforming Vision>(<비전>)은 기독교 세계관 논의의 교과서로 읽히는 작품이었다. 특히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는 인식의 틀이 있고 그에 따라 사고와 행동이 나타남을 지적하고, 그리스도인의 인식 틀인 기독교 세계관을 창조·타락·구속을 중심으로 정리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세속적 세계관, 특별히 근대의 세계관을 비평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비전>을 쓴 지 약 10년이 지난 후, 미들턴과 왈쉬는 <여전히 우리는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여전히 진리>)를 통해 전작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측면을 부각하고자 했다. 원래 이 책은 <비전>을 개정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고, 저자들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티라고 명명하는 문화 변동에 비추어 모더니티가 쇠퇴한 이유"(7쪽)를 분석하고자 했다. 아울러 포스트모더니티에 집중했을 때 드러나는 근대의 한계를 이전 작업에서는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반성과 함께 그 부분을 더욱 조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는 개정판이 아닌 후속작이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이전에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출간 당시 (<뉴스앤조이>·<복음과상황> 등) 몇몇 매체에 이 책에 관한 글이 실렸는데1), 복음주의권에서 묵직한 논의를 하는 필자들이 출간 배경이나 의의, 신학적 방법론, 기독교 세계관 비평 등을 서술한 내용이었다. 책 출간 당시에 나온 반응 중 하나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와서 반갑다"는 것이었다. 그보다도 더욱 뒤에 새로 나온 이번 한국어판은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글에서는 이전에 나온 서평 내용과 조화를 이루도록 책 본문에 초점을 맞추어 책의 대략을 서술하고 약간의 감상을 적고자 한다.
근대의 위기
<비전>에서 미들턴과 왈쉬는 세계관이 세계에 관한 일련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답을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그 질문은 네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1)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 우리는 누구인가? (3)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4) 치료법은 무엇인가? <여전히 진리> 1부는 이 질문을 가져와 근대의 세계관이 어떻게 답변하는지 제시하고 그 답변을 비평한다.
근대 세계관의 전형으로 책 서두에서 제시하는 콜럼버스 이야기에 담긴 세계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각각 이렇게 대답한다. (1) 우리는 잃어버렸다가 발견한 세계 안에 있고, (2) 정복자로서 이 땅(북아메리카)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3) 중세 유럽에서는 계급적 사회가, 아메리카에서는 야만성이 문제이므로, (4) 유럽을 벗어나 아메리카라는 약속의 땅을 정복해 진보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19~20쪽). 미들턴과 왈쉬는 이성, 계몽, 진보를 추구하는 이런 세계관이 과학, 기술, 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완전한 사회'라는 근대의 이상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 이상을 추구하는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계속해서 주변화되는 인물들(인디언, 흑인, 여성 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근대의 이상적 사회 모델은 실현 불가능한 하나의 신화다. 진보의 이상은 20세기 초중반에 세계를 뒤흔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 사이에 있던 대공황으로 인해 그 허상이 드러났다. 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잠시 호황의 시기가 도래하는 듯했으나, 세계적으로 보면 냉전으로 인해 갈등 구도가 형성되었고 국지적으로는 계속해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불안 상태는 근대가 더 이상 완성된 이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세계를 바라보는 세 가지 방식
미들턴과 왈쉬는 이 불안 상태가 실재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실재에 관한 인식을 세 가지로 표현하고자 월터 트루엣 앤더슨을 빌어 세 야구 심판 비유를 제시한다. 세 야구 심판은 각각 이렇게 말한다. "여러 개의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고, 나는 있는 그대로 판정하지", "여러 개의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고, 나는 내가 본 대로 판정하지", "여러 개의 볼과 스트라이크가 있고, 내가 판정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지"(58쪽). 이 세 심판의 말은 세계를 보는 세 가지 방식을 각각 대변한다. 첫 번째 심판은 "인간의 앎이 외부 세상과 인식론적 판단 사이의 직접적 상응 관계를 모색하는" 소박실재론, 두 번째 심판은 "외부 세계를 향한 접근이 언제나 인식하는 사람의 관점을 통해 매개된다고 보는" 관점주의적 실재론(비판적 실재론), 세 번째 심판은, 이 "관점주의를 끝까지 몰고 가는" 급진적 관점주의를 말한다(59쪽).
저자들이 보기에 근대의 이상은 소박실재론, 즉 누구나 주어진 실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해 나타났으며, 이는 오늘날 유효하지 않다. 실재를 파악했다고 여기는 사고는 일종의 "지배 욕망"을 드러내며, 이는 "서구의 정복과 정치적 우위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65쪽). 이런 사고방식에 대응해 나타난 포스트모던 사고에서는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언어적·개념적 구성을 통해 실재에 접근한다."(60쪽) 결국 그러한 구성을 '누가' 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배제되는 것은 무엇인지가 문제다. 미들턴과 왈쉬는 관점주의적 실재론에 가까운 입장을 갖고 있다(다만 '실재론'이라는 표현을 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포스트모던 사상가가 여기서 더 나아간 급진적 관점주의를 고수한다고 보며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여기서 끌어오는 포스트모던 사상의 대표적인 사례는 해체주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실재론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공격적인 일이며,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현존의 형이상학"은 폭력의 형이상학으로 귀결된다. 세계의 다양성을 하나의 체계로 환원하려는 시도로, 결국 그 체계에 맞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은 배제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상은 타자나 약자에 대한 구조적 이해와 감수성을 강조하며, 이는 시대를 반성하는 사유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큰 기여다. 다만 해체는 방향 상실, 즉 아노미(anomie)로 이어진다. "아노미는 노모스(nomos)의 상실, 곧 세상에 의미 있는 질서가 있다는 명확한 감각의 상실이다."(70쪽) 보편 질서가 아닌 그저 어떠한 '하나의' 신념 체계나 세계관에 입각해서 살아왔다는 깨달음, 심지어 그 관점이 폭력을 야기했다는 깨달음은 견디기 어렵다. 게다가 해체와 더불어, 미디어에서 모조품(simulacrum)의 범람을 통해 실재라 불리는 것들을 다루는 모습은 실재가 그저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더욱 강화한다.
사실 포스트모던 현상은 근대를 탈피한다기보다는 근대를 새로이 계승하는 일이다. 근대를 "실재론과 자율성이 섞인 혼합물"(80쪽)이라고 한다면, 포스트모더니티는 실재론을 거부하고 자율성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 근대의 한 측면을 계승한다. 그 결과는 급진적 다원주의다. 자유로운 인간이 수많은 가치관이 진열된 상품 전시장 안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들턴과 왈쉬가 보기에 인간은 실제로 자유롭지 않다. 포스트모던 관점에서는 인간의 자아 역시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실재를 그 자체로 드러내지 못하고 재현할 뿐이며, 오히려 언어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한다. 이 문제는 저주인가 해방인가? 포스트모던 관점에서 이를 주체의 해방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미들턴과 왈쉬가 보기에 이는 오히려 주체의 소멸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이것이 도덕적 위기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행동의 내용보다 선택 자체가 존중받지만 그 선택에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내러티브의 제자리 찾기
이러한 경향에서는 어떠한 문제가 나타나는가?(세계관 질문 3번) 그리고 해결책은 무엇인가?(세계관 질문 4번) 미들턴과 왈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세계관이 갖는 내러티브적 특성에 주목한다. 유대교와 기독교뿐만 아니라 여러 문명에서 나타나는 신화와 종교에서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이 가진 진리를 전달하고 이야기 안에서 윤리를 구성한다. 저자들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 로저 런딘에 기대어 주장하듯, 근대 역시 마찬가지다. 근대의 이상으로 제시된 객관적·중립적·합리적 윤리 자체가 실은 전통에 기인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다. 이를 무시하는 "합리성 추구는 (중략) 도덕적 불일치에 관한 의미 있는 대화를 방해한다."(131쪽)
포스트모던 사고에 따르면, 상황적 특성을 갖는 이야기에서 메타 내러티브(거대 내러티브)를 주장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더러 폭력을 낳는다. 역사를 돌아보면 바빌로니아 제국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이슬람의 이름으로,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수많은 폭력이 자행되었으며, 창궐하는 메타 내러티브의 폭력 아래 여러 국지적 이야기는 억압당했다. 앞으로의 관건은 이 이야기들을 해방하는 일이다.
미들턴과 왈쉬는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과연 메타 내러티브만이 폭력을 낳는지 되묻는다. 현대의 여러 분쟁 지역을 보면, 국지적 이야기 간에 벌어지는 폭력 역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대게 자신의 입장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갈등의 대상자에게는 자신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하며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들은 메타 내러티브가 문제라는 주장 자체가 메타 내러티브라고 주장한다. 수행 모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메타 내러티브적(세계관적)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 저자들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전유한 데리다의 '파르마콘'(약 혹은 독) 개념을 끌어와 내러티브 자체가 약학적임을 주장한다. 결국 문제는 인간의 폭력성이며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치료제가 필요하다(156~157쪽). 이제 어떤 내러티브가 치료제를 담고 있느냐는 질문이 이어진다.성경의 메타 내러티브1부에서 문화 비평을 시도한 미들턴과 왈쉬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성경 내러티브의 내용을 서술한다. 1부의 흐름이 시대 상황 → 실재의 의미 → 자아 → 내러티브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면, 2부에서는 역순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내러티브 → 자아 → 새로운 실재의 의미 → 시대의 희망 순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미들턴과 왈쉬가 보기에 성경 내러티브는 명백히 인간의 폭력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구속적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무엇보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전체주의와 상충한다"고 주장한다(167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이야기에는 "고통에 대한 급진적 감수성"이 담겨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 의도"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168쪽). 저자들은 이 이야기가 내러티브의 폭력적 사용을 제한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정의나 긍휼이 아닌 폭력을 낳은 경우도 있었음을 인정한다.
저자들은 우선 출애굽에서 시작한다. 이 사건의 의미가 구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시대까지 이어지는 성경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출애굽은 해방과 시내산 언약을 통한 공동체 형성이라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처음이자 결정적으로" 벌어진 사건이다(169쪽).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하라고 하시며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어떤 이야기에 속해 있는지 기억해야 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
특별히 저자들은 월터 브루그만에 기대어, 이 이야기는 타자의 고통에 민감히 반응하고 포용하기를 요청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정의와 해방과 사회변혁을 요청한다. 이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창 12장)을,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상기시킨다. 또한 저자들은 정경 형성 과정을 설명하며, 토라 이야기가 신명기, 즉 약속의 땅에 진입하기 전에 끝난다는 점과 유일신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한다는 데 주목한다. 정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끝나는 토라 이야기만이 "땅을 잃은 유배민에게 의미 있는 내러티브를 제공"할 수 있고(190쪽), 창조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야만 유배 시기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이자 재판장이고, 이스라엘은 주변인·타자로서 고통받을 때 하나님께 구원받았으며, 구원받은 백성들은 억압받는 타자를 해방하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 이 구약 전통은 예수의 가르침, 삶, 죽음으로 이어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따라야 할 모델이 되었다.
인간, 하나님의 형상
이 내러티브 안에서 인간은 "고귀한 지위와 위엄을 부여"받는다(234쪽). 이는 유배지 바빌로니아의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의 인간관과 대비된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인간은 신들의 전쟁에서 패자가 된 신들 중 하나의 피로 만들어진 노예에 불과하다. 이 이야기에서 인간은 노예지만, 그것이 구현되는 실제 세계에서는 신에 대한 봉사를 명목으로 왕실과 제의 담당자들이 다른 이들을 다스렸고, 이 신화는 제국의 사회질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민으로서 억압을 받으면서도, 바빌로니아에 동화同化 유혹을 받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정경화한 형태의 성경 내러티브는 창조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강조하게 되었다.
창조 이후의 이야기는 계속되는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선택 이야기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 모세와 출애굽, 사사기, 왕정과 예언자, 유배와 귀환의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범죄하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사에 적응하시면서도 자신의 약속을 이끌며 실현해 가시는지를 보여 준다. 위임받은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관은 내러티브 안에서 기능하며 창조 세계를 조화롭게 가꾸고 억압받는 모든 것에 민감하기를 요청한다. 예수와 교회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 안에 머무를 때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멋들어진 창조 세계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를 설명한 이후 미들턴과 왈쉬는 세계와 실재에 관한 논의를 다시 전개한다. 저자들은 세계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로 묶여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설명은 세계를 기계(근대)로 바라보든 모조품의 혼합체(포스트모던)로 바라보든 결국 세계를 인간 중심적으로 착취하는 결과를 낳는 세계관과는 다르다. 오히려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강조하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제대로 포괄한다.
미들턴과 왈쉬는 존 밀뱅크가 <신학과 사회 이론>에서 말하는 "폭력의 존재론"을 끌어와, 성경의 세계관이 세계를 혼돈으로 바라보는 서구 사상의 존재론과는 대비된다고 주장한다(294~295쪽). 성경의 세계관에서는 차이와 다양성이 폭력을 유발하기보다는 조화를 이루며, 창조 세계는 본래 선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세계관을 통해 윤리적 함의를 도출하려 한다면 인식론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실재가 구성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실재는 어떤 윤리적 위상을 가질 수 있는가? 저자들은 이 문제를 다루려면 다른 책을 새로 써야 하리라고 하면서도 이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며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앞서 언급했듯, 실재에 관한 세 입장(소박실재론, 비판적 실재론, 급진적 구성주의)에서 저자들의 입장은 비판적 실재론에 가깝다. 하지만 저자들은 실재론이라는 표현을 쓰기를 주저한다. 비록 '비판적'으로 접근하더라도 이 표현은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언약적 인식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우리는 (중략) 오만한 인식론을 정당화하는 근대의 '소여의 신화'를 믿기보다는, 세계가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의 선물로서 주어졌다고 고백한다"고 말한다(323~324쪽).
세계는 주어졌지만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허울뿐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거류민이지만 청지기 의식을 갖고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들에 반응한다. 그렇게 세계 속에서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참여한다.
열린 내러티브에 참여하는 모험
신앙은 단지 성경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나타내거나 줄거리를 정리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으로, 또한 공동체로 이 이야기에 참여한다.
이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성경의 큰 내러티브는 가슴 벅차게 읽힐지 몰라도, 본문의 세부 이야기 가운데는 받아들이기 불편한 내용이 많다. 필리스 트리블은 <테러 본문 Texts of Terror>(한국어판 제목 <성서에 나타난 여성의 희생>)에서 하갈의 추방(창 16, 21장), 다말의 성폭행(삼하 13장), 무명의 첩의 죽음(삿 19장), 입다 딸의 희생(삿 11장)을 예로 들어, 이 내용들은 그냥 폭력 이야기일 뿐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에 흡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해방의 이야기에 담긴 잔인한 폭력의 이야기. 미들턴과 왈쉬는 브루그만을 인용해, 이러한 분문들이 성경 내부에서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를 승리주의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347쪽). 정경 내에도 다원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트리블은 내러티브 플롯에 긴장과 갈등을 야기하는 요소들이 독자의 참여를 촉구한다고 주장한다(351쪽).
성경의 내러티브를 일종의 드라마로 보는 톰 라이트의 이해처럼, 미들턴과 왈쉬는 성경을 열린 결말의 극본으로 놓고 상연하기를 제안한다. 성경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은, 미완성 극본을 두고 극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감수하면서 즉흥 연기를 수행하는 배우와 같다. 극본에 껄끄러운 요소가 있더라도, 배우는 극본 작가의 취지를 최대한 이해하려 한다. 극본이라는 전통을 계승하면서 자신만의 즉흥 연기를 수행하는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는 일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할 때라야 가능하다. 이것이 오늘날 진리를 말하는 방식이다.
<여전히 우리는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 _포스트모던 시대 그리스도인의 비전
성경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
책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잠시 생각해 보면, 저자들이 책 곳곳에서 제기한 근대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평을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두 방식에 대한 비평으로도 이해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특정한 신학적 표현에 얽매여 경계 긋기에 치중하는 태도나 형성의 모판을 부정한 채 주체적으로 서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태도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주 나타났던 일이다. 미들턴과 왈쉬는 두 가지 태도 사이에서, 우리의 존재를 창조·타락·구속의 이야기 안에 두고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따라 행동해 보기를 권한다.
결국 진리를 말하고자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독교에 위협이 되는지 따지기보다, 진리를 말한다는 자신이 실제로 성경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지 살펴야 한다.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자신의 이야기로 불러내신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깨어진 모습을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가 그분을 따라 창조 세계에 관심을 두기 바라신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깨어진 모습은 무엇이며 원래 모습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부족주의, 젠더 갈등 등 어느 것 하나 답 내리기 쉬운 일이 없다. 포스트모던 사상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넘어, 사회학·인류학·역사학·정치학·문화이론 등의 분야에서 제기되는 여러 분석은 우리가 주어진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도록 돕늗 자원이다. 전통은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실천 가운데 나아간다. 그저 반복되는 전통도, 쉬이 부정되는 전통도 없다.
<여전히 진리>는 우리에게 성경의 이야기에 '내주'하고 세상에 관심을 두기를 촉구하며 마무리되긴 하지만, 전통을 계승하는 자리인 공동체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지는 않는다. 실천 공동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공동체의 실천이 공동체 바깥 영역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등을 다루지 않는다. 이는 의식·몸·실천·형성·언어·상상 등을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다루어 온 철학 전통, 가톨릭, 정교회, 수도원 전통, 개혁파, 재세례파 등 여러 모양으로 계승되는 기독교 전통이 현실과 어떻게 조우하는지를 다루는 여러 논의(이를테면 공공신학 등)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제임스 스미스의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은,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바라보며 공교회의 예전적 전통을 계승하는 개혁파 신학자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 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리>는 여전히 유용성을 갖는다. 점점 세분화되고 복잡해지는 논의에 자칫 길을 잃기 쉬울 때에도 결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고전 13:12)이라는, 확신과 겸손을 겸비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실천하는 하나의 유형일 것이다.
설요한
대학교 학부에서 행정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IVP 편집부 간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운영위원이다.
주
1)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교과서 읽기'(<뉴스앤조이>), '기독교 세계관, 포스트모던 시대 대안으로 적합한가'(<뉴스앤조이>), '과연 이야기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복음과상황>)
*이 서평은 뉴스앤조이(2020년 5월 22일)에 실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