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고고학”의 모험(차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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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보람
책 『천상에 참여하다』한스 부어스마 지음
“단 한 번의 도약, 죽음의 도약으로 끝을 내려는 피로감, 아무것도 더 이상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이 피로감이 온갖 신을 꾸며 내고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꾸며 낸 것이다.…그들은 자신이 처해 있던 불행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별들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탄식했다. “다른 존재와 행복 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천상의 길이라도 있다면!” 이런 소망에서 그들은 그들이 도망갈 샛길과 피의 잔이란 것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언어를 폐기하는 예언자요 혁명가인 차라투스트라는 천상의 삶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배후세계론자들”(Hinterwelter)―“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고 경멸했다. 그에게 천상을 향한 갈망은 죽음을 향한 충동과 다름없었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리스도교에 안겨 준 선물은 지극히 소중하다. 그는 마치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언어에서 온갖 불결하고 나약한 상상력을 사정없이 몰아냈다.
그러나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조소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는 일에는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고대 교부들과 중세 성인들의 신학에서 지상의 근원이자 목적으로 여겨졌던 천상은 포스트-니체 시대의 신학적 상상력에서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하늘을 깊이 응시하는 일과 대지에 굳건히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은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 결과 신앙인들이 천상의 삶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때는 바로 지상의 삶이 끝나는 곳—병원의 장례식장―안에 있을 때였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괴로움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점차 지상과 천상의 관계를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로 설정하여, 천상을 강조할수록 지상을 무시하게 된다고 오해했다. “신체와 대지”를 철저히 경배하는 지상적 삶을 설파하는 니체의 종교 비판과 의심의 해석학을 거친 어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인간학, 윤리학, 또는 미학으로 환원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고전 신학의 신론을 수명이 다한 해묵은 유신론이라 비판하고 ‘신 이후의 신’을 말하기도 했다.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에서 이런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이 같은 흐름을 따르는 후기/탈근대 신학의 전망 안에서 천상에 대한 신학적 상상력은 부록이나 조연에 그치게 되었다.1)
이와 달리, 한스 부어스마가 『천상에 참여하다: 성례전적 존재론 되찾기』에서 제시하는 또 다른 흐름의 현대 신학은 사도 바울에서 시작하여, 디오니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가 기초를 놓고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종합했던 그리스도교의 “원천”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고대와 중세의 “위대한 전통”(the Great Tradition)의 신학을 “회복”하려는 이 신학에서는 근대성이 단절시킨 지상과 천상의 관계가 성례전적 혹은 성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어스마에 따르면, 성 바울이 설계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기초를 놓은 고전 신학의 핵심에는 지상의 현실은 오직 천상적 실재에 성사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존재와 목적을 부여받는다는 “성례전적 존재론”이 놓여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가 플라톤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이른바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이 이룩한 사상적 결실이다. 지상의 현실과 삶은 초월자가 창조 세계를 향해 은총으로 베푸는 존재와 목적, 의미와 가치에 성사적으로 참여한다. 진선미라는 초월적 속성을 존재 안에 본래적으로 지니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하나님은 유한자의 기원이자 목적이다. 무로부터의 창조, 향유와 사용, 에펙타시스(epektasis), 지복직관(visio beatifica) 등과 같은 고전 신학의 언어와 문법에 따르면, 지상의 삶은 궁극적 실재요 근원이요 목적인 천상의 삶을 향한 영원한 순례다. 지상적 삶이 천상적 삶에 궁극적 근거와 최종적 목적을 두고 있다는 인식은 오랜 기간 많은 이가 오해한 것처럼 지상적 삶의 중요성을 희석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느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천상적 중요성을 지상의 삶에 부여하는 것이다.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보는 일은 거칠고 낮은 이곳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상의 현실에 초월적 가치와 신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행위다.2)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한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에서 천사들과 성도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천상, 단테가 『신곡』의 마지막에서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직관하는 지복을 누리는 천상, 이 천상은 지상과 대립하는 현실이 아니라 지상적 삶의 기원이자 종말이다. 신앙인들이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며 성찬의 전례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천상의 잔치를 더욱 갈망”한다(성공회 성찬기도). 본 글은 이처럼 고색창연한 지향을 담은 부어스마의 신학적 기획을 현대 신학의 지형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포스트-홀로코스트 시대의 독일 개신교 신학과 프랑스 가톨릭 신학
부어스마가 어깨에 올라탄 거인들이 모두 프랑스 가톨릭 신학자라는 사실은 현대 신학의 지형도를 그릴 때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한국의 많은 독자에게 친숙한 독일 개신교 신학자들의 이름이 이 책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20세기 현대 신학의 지형을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두 사상사적 흐름을 보여 주는 일이다.
독일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의 대표자인 아돌프 폰 하르낙은 고대 교리의 발전 과정을 ‘복음의 헬라화 과정’, 즉 예수 복음의 단순한 본질에 헬라 철학의 껍질이 덧입혀져 복음의 본질이 은폐되고 왜곡된 과정이라고 비판했다. 하르낙의 관점에서 보자면, 교부들이 이룩한 세심하고도 대담한 그리스도교와 플라톤주의의 비판적 종합은 단순하고 엄중한 복음의 윤리적 본질을 철학으로 왜곡했던 시도와 다름없다. 루이스 에이어스, 로완 윌리엄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새라 코클리, 로버트 루이스 윌켄 등 여러 분야의 저명한 신학자들은 이미 이것이 ‘잘못된 이분법’에 근거한 것이며, 고대 교회의 교리적 발전은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가 아니라 ‘헬레니즘의 그리스도교화’로 이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초월적이며 영원한 사랑을 말하고자 했던 교부들이 창조적으로 신학화한 작업이라고 옳게 주장한다. 부어스마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독일 개신교 신학은 교리사에 대한 하르낙의 관점에 기초해 발전했다. 히브리 성서와 그리스 철학을 대립적 이분 관계로 설정하는 입장은 위르겐 몰트만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등이 전개한 전후(戰後) 신학의 중요한 전제다. 포스트-홀로코스트 신학의 “고난받는 하나님” 개념은 고전 신학의 영원히 불변하는 하나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며 등장했다. 여기에는 성서와 철학,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 내재와 초월의 단순한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다. 고전 신학의 하나님 개념은 그리스 철학자가 사유한, 역사에 무감하게 초연하고 세계를 냉정하게 초월하는 아파테이아(apatheia)의 신이며, 반면에 히브리 예언자가 선포한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역사에 내재하고 세계와 연대하는 파토스(pathos)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후로 현대 조직신학의 대표적 신정론이 되었고, 개인과 집단의 고난과 비극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신학자들과 설교자들과 활동가들에게 가장 유명한 신학적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군 참호에서 솟아난 “새로운 신학”(Nouvelle Théologie)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 참호에서 피어난 “고난받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 부어스마가 이 책에서 거론하는 프랑스 가톨릭 신학자들, “새로운 신학”을 태동시키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기초를 놓은 드 뤼박의 동료들은 세계의 악과 비극을 설명하기 위해 정통을 수정하여 “고난받는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정통”을 내세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적 신 죽음 선언을 받아들이면서 고전 신학의 유신론을 냉정하고 무감한 신론이라 비판하고 전쟁에서 세계와 함께 죽은 신 이후의 신을 새롭게 말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현대 신학의 거대한 흐름과 달리, 교부의 사상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원천을 회복하고자 했던 앙리 드 뤼박과 장 다니엘루의 신학에서 신은 결코 다치거나 죽은 적이 없다. 이렇듯, 부어스마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프랑스 가톨릭 신학은 독일 개신교 신학과 출발점과 방향성이 사뭇 다르며, 고난받는 하나님의 신학이 포스트-홀로코스트 신학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부어스마의 이 책은 포스트-홀로코스트 신학과 후기/탈근대 현대 신학의 가장 첨예한 분기점을 파고든다.
교부 사상의 “원천”을 재발견하려는 이 책의 신학적 기획은 철저하게 20세기 프랑스 가톨릭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 이 중요한 분야에 대해서, 필자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부어스마의 이 책만큼 자세하면서도 폭넓게 우리말로 소개한 책이 개신교와 가톨릭 서적을 통틀어도 매우 드물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한국 신학계에 특별하게 기여하고 있다.
먼저, “원천으로 돌아가기”(ressourcement)는, 이 책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이브 콩가르가 지적한 대로, 샤를 페기(Charles Péguy)가 고안한 용어다. “덜 완전한 전통에서 더 완전한 전통으로 향하는 운동, 얄팍한 전통으로부터 깊은 전통을 향한 호출, 심오한 원천에 대한 탐구, 문자 그대로 원천으로 돌아가기.” 앙리 드 뤼박, 장 다니엘루, 이브 콩가르, 마리-도미니크 셔뉘, 앙리 부이야르 등 주로 프랑스 예수회 혹은 도미니코회에서 활동했던 이 신학자들은 프랑스 혁명, 정교분리정책, 세계대전의 질곡을 지나서 전통의 폐기나 극복이 아니라 전통을 원천으로부터 새롭게 회복하려는 신학을 추구했다. 로완 윌리엄스가 “창조적 고고학”3)이라고도 부른 이러한 방법론을 채택한 이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생생한 방식으로 연구했고,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의 신비신학을 탐구했으며, 중세의 성서해석학을 되살려 냈고, 성찬례의 넓고 깊은 신비를 헤아렸다(모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특별히 이들의 신학은 자연과 은총/초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당시 지배적이던 신스콜라주의자들의 외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근대성에 경도된 가톨릭 근대주의자들의 지나친 내재주의에 빠지지 않은 드 뤼박의 신학에서 특별한 모멘텀을 얻었다(pp. 105-110)4).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이후까지 가톨릭 신학을 지배했던 신스콜라주의를 이끈 프랑스 신학자 레지날드 가리구-라그랑주는 자신의 제자 세대가 펼치는 이 신학이, 교부의 사상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학”을 세운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여러 부침을 겪은 후에 “새로운 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신학적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공의회 이후의 postconcilar 신학을 주도하는 흐름이기도 하다.
“새로운 신학”의 영향력은 가톨릭 신학에 한정되지 않았다. 근대성이 신학에 미친 영향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면서 교회의 원천과 신학의 고전을 재발견하고 그 급진적 의미를 회복하고자 하는 신학적 흐름을 지칭하는 “회복의 신학들”(theologies of retrieval)이 현대 신학의 주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새로운 신학”의 신학적 기획을 계승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는 주로 케임브리지의 앵글로-가톨릭 신학자들이 전개한 영국의 급진정통신학(Radical Orthodoxy)을 꼽을 수 있다. 이후에 다양한 형태의 원천을 회복하는 신학이 전개되었으며, 이 책에서 전개되는 부어스마의 신학도 그중 하나인 “복음주의의 원천 회복의 신학”으로 거론된다.5) 이러한 방식으로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후기/탈근대 신학은 형이상학적 신의 죽음 혹은 “존재-신학”의 종말을 말하며 유효 기간이 경과한 고전 신학의 유신론 이후의 신학을 주장하는 급진적 형태의 후기/탈근대 신학과 함께 현대 신학의 두 가지 큰 방향성을 대표한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 신학적 계보학
이 책에서 반복해서 주장하는 대로 창조 세계가 오직 하나님께 참여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면, 세계의 기원이요 목적으로 ‘초월’하는 하나님은 세계의 존재를 근원에서 떠받침으로 ‘세계’에 내재한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통해 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 수용한 교부들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과 급진적 내재성은 언제나 역설적 동시성으로 존재한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반비례 관계 혹은 “대비적 관계”, 즉 하나님이 세계를 초월할수록 덜 내재하며, 반대로 내재할수록 덜 초월하는 관계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근대성이 신학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이다. 이것은 마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자인 창조 세계와 동일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부어스마는 이 책의 1부 3, 4, 5장 곳곳에서 이와 같은 근대성의 오류를 지적한다. 근대 신학은, 세계는 근원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참여적·성사적 존재론에서 벗어나서, 세계와 하나님이 별개로 동일한 존재 범주에 속한다는 “존재의 일의성”을 주장한다. 세계의 존재가 하나님께 본래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유한자의 공통된 본질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자가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유명론으로, 그리고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는 오직 하나님의 자의적 의지에 의존한다는 주의주의로 귀결된다. 여기서는 은총과 자연, 천상과 지상, 신앙과 이성의 본래적 연결이 단절되어, 은총과 분리된 독립적 영역으로서 “탈성례화” 혹은 “탈주술화”된 자연, “순수 자연”(natura pura)이 등장하는 불행한 사상사적 전개가 이어지고 이것이 종교개혁 신학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어스마는 이와 같은 근대성의 신학을 둔스 스코투스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본다는 점에서 ‘근대성의 신학적 계보학’의 표준적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근대성에 영향을 받아 위대한 전통의 신학적 통찰에서 멀어진 교회는 개신교만이 아니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이미 근대성이 천상과 지상의 테피스트리를 풀고 있었으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를 단지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공동체의 집단적 의식의 주관성 차원으로 환원한 것이 종교개혁 성찬례 신학의 한 흐름이라면, 드 뤼박의 분석에 따르면 가톨릭 신학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성사(빵과 포도주)와 실재(그리스도의 몸)를 협소하게 동일시하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몸이 지니는 교회론적 지평을 상실해 왔다. 오늘날 자주 들리는 성찬례적 교회론은 이러한 반성을 거쳐 현대에 들어 등장한 신학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역시 “새로운 신학”에 기대어 가톨릭 신학에 대한 비판도 제기한다. 위대한 전통의 원천을 회복하며 근대성을 극복하고 성사적·참여적 존재론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는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에게 주어져 있으며, 이와 같은 공통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두 교회는 자연히 교회 일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존재론과 그리스도론: 교회일치의 전망
교회 일치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심적인 주제이면서도, 현대 신학 지형도에서 부어스마의 신학적 기획이 점하는 위치를 파악할 때 고려해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존재론적 경향과 그리스도론적 경향이다. 각 경향은 예수회 신학자 에리히 프르치바라가 생동감 있게 조명했으며, “새로운 신학”의 기저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의 유비’와 개혁교회 신학자 칼 바르트가 이를 비판하면서 주장했던 ‘신앙의 유비’로 대표된다. 이 점에서 각 경향은 아퀴나스적 경향과 바르트적 경향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르치바라의 제자였으면서 바르트의 동료이기도 했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가 양자를 종합하고자 시도한 그리스도론적 존재의 유비는 20세기 에큐메니컬 신학의 중요한 업적이다.
부어스마는 존재의 유비를 굳건히 지지한다. 피조물은 존재의 차원에서 창조주로부터 기원하며 그분께 참여하므로 유사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무한한 존재론적 차이, “더 큰 비유사성”을 지닌다는 존재의 유비에 대해서 저자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는 “새로운 신학”의 신학적 핵심일 뿐만 아니라, 은총을 향한 자연의 지향성과 자연을 향한 은총의 무상성을 동시에 긍정하고자 했더 드 뤼박의 자연과 은총의 신학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3장). 이런 점에서는 부어스마는 분명히 아퀴나스의 존재론적 기반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부어스마는 존재론에 대한 강조가 그리스도론의 자리를 밀어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p. 42 각주 3). 그는 존재의 유비에 기초하면서도 동시에 (신앙의 유비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결코 설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론적 강조점을 잃지 않는다. 이는 이 책의 구성에서도 드러나는데, 부어스마는 1장에서 존재론적 기반을 설명하고 곧바로 이어지는 2장에서는 그리스도론적 기반을 강조한다. 여러 개신교 신학에서 강조하듯이, 그리스도는 언약 신학의 측면에서 “언약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존재론적 측면에서 “창조된 모든 실존을 위한 영원한 닻”이시다. 부어스마의 그리스도론은 이렇게 존재론적 차원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최대주의”다(p. 71). 그는 시종일관 지상적 ‘현실’이 천상적 ‘실재’에 성사적으로 참여하는 ‘신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존재의 차원에서) 가능하며 (계시의 차원에서) 알려진다고 거듭 강조한다(pp. 194-195). “영원하신 말씀(Logos)—창조 질서를 무한히 초월하시는—이 창조 질서와 인간 역사의 토대와 안정성을 제공”(p. 88)하며 “모든 피조물의 진선미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Logos) 안에 기초해 있다”(p. 49). 후기의 제목인 “그리스도 중심적 참여”가 가리키듯이, 이 책에서 존재론의 지평은 언제나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다시 말해, 부어스마는 존재의 유비에 기초한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의 신학으로부터 “기독론적 닻”을 내린다.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에서는 영원하신 말씀(Logos)이 창조 질서의 선함과 준궁극적일 뿐인 그 성격 모두를 보장하는 닻을 제공한다고 이해한다. 말씀(Logos)은 피조물이 참여하는 성례전적 실재이자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례전적 실재다”(pp. 279-280). 부어스마는 이렇게 가톨릭 전통의 존재의 유비에 충실하면서도 그리스도론적 중심을 유지함으로써 이 책이 “교회 일치에 관한 전망”(pp. 194-195)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종교개혁교회와 가톨릭교회 모두가 근대성의 정신에 의해 위대한 전통의 신학에서 일정 정도 멀어졌다고 지적하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에서 교회 일치의 전망을 제시한다. 아울러, 존재론과 그리스도론을 동시에 부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측면에서 교회 일치의 전망을 제시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교회 일치에 관한 담론은 때때로 매우 현실적인 결정을 요구한다. 이 책은 출간 10년 만에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었다. 그 사이에 부어스마는 “위대한 전통”의 신학을 거듭 연구하다가, 네덜란드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자에서 ‘템스강을 건너’ 성공회 앵글로-가톨릭 전통의 성직자-신학자로 변화를 감행했다.6) 혹자는 부어스마의 예를 보면서, 과거 앵글로-가톨릭 신학자로서 교부학과 교리의 발전을 연구하다가 결국 ‘테베레강을 건너’ 가톨릭 추기경이 되고 얼마 전 시성되기까지 한 존 헨리 뉴먼을 떠올릴 수도 있다(pp. 159-160). 신학자가 전통을 떠나고 옮기고자 결정하는 일이 (아주 드물지는 않더라도) 결코 흔하다거나 장려할 일은 아니지만, 부어스마가 이 책 10장에서 말하는 대로 신학을 공부하는 일은 단순히 각종 신학적 지식과 개념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일이 아니라 전통에 기대어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이다. 『천상에 참여하다』가 초대하는 신학적 관점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독자들은 어쩌면 기초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며 현기증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교부 사상, 근대성, 근대성에 대한 신학의 응답, 성서 해석, 교회와 성찬례의 관계, 진리의 인식, 전통과 성서의 관계 등에 대한 굵직한 주제들과 관련해서 독자의 지평은 확장되거나 융합되는 지경을 넘어서 전복되고 재구성되는 전환을 요구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든, 이 책의 주장과 제안은 많은 독자, 특별히 종교개혁의 전통에 기초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사유하고 살아가는 다양한 독자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신학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창조적 고고학”의 모험은 감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주
1) 흥미로운 점은, 부어스마가 복음주의권 신학의 쇄신을 시도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반(反)천상적 수사”(p. 277)—“천국은 단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가 널리 퍼져 있다고 진단한다는 것이다. 한때 복음주의권 선교단체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교과서처럼 읽던 『그리스도인의 비전』(서울: IVP, 1987)이나 즐겨 읽던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서울: IVP, 2000)를 그 예로 제시하는 부분(p. 61 각주 24; p. 277 각주 5)은 여러 복음주의권 독자를 과거와 비판적으로 조우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N. T. 라이트의 신약성서신학이 천상적 실재에 대한 초점을 흐리게 만든다고 반복해서 지적하는가 하면, 이에 반해 C. S. 루이스는 천상적 삶의 중요성에 대한 보다 온전한 통찰을 보여 준다고 거듭 말하는 부분도 두 저자의 신학에 친숙한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2) 에펙타시스와 지복직관은 한스 부어스마가 『천상에 참여하다』 이후로 주로 탐구한 교부 및 중세 신학의 주제다. Hans Boersma, Embodiment and Virtue in Gregory of Nyssa: An Anagogical Approac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Hans Boersma, Seeing God: The Beatific Vision in Christian Tradition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2018). 『천상에 참여하다』에서 제시하는 고전 신학의 언어와 문법을 이해하도록 돕는 훌륭한 글로는 다음을 꼽을 수 있다. 로완 윌리엄스, “언어, 실재, 욕망: 그리스도인 형성 과정의 본성”, “‘좋으실 게 없다’?: 창조에 관하여”, “실체가 없는 악”, 『다시 읽는 아우구스티누스: 유한자의 조건과 무한자의 부르심』, 이민희·김지호 옮김(고양: 도서출판100, 2021); 앤드루 라우스, “니케아의 정통신학”, 『서양 신비사상의 기원』, 백성옥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11); 로버트 루이스 윌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배덕만 옮김(서울: 복 있는 사람, 2014).
3) 로완 윌리엄스, 『과거의 의미: 역사적 교회에 관한 신학적 탐구』(서울: 비아, 2019), pp. 199-216.
4) 참조. 로저 올슨,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김의식 옮김(서울: IVP, 2021), pp. 255-262, 731-732.
5) Michael Allen, Scott R. Swain, “Introduction: Renewal through Retrieval”, Reformed Catholicity: The Promise of Retrieval for Theolog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5), pp. 1-15. 원천을 회복하는 신학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려면 다음을 보라. John Webster, “Theologies of Retrieval”, The Oxford Handbook of Systematic Theolog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p. 583-599. 보다 넓고 깊은 탐구를 위해서는 Darren Sarisky, Theologies of Retrieval: An Exploration and Appraisal (London: Bloomsbury T&T Clark, 2017)을 보라.
6)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어스마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상징적 일치를 이루는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가 아니라, 여성과 동성애자의 성직서품 등을 둘러싼 갈
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성공회에서 독립한 소위 북미 성공회(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에서 올해 부제 서품을 받았다. 이 교단에 속한 신학자로는 한국 복음주의권 독자들에게 친숙한 제임스
패커가 있다. 부어스마가 현재 가르치는 나쇼타 하우스 신학대학원에서는 미국 성공회와 북미 성공회 성직 후보 과정 학생 모두를 가르친다.
차보람
대학에서 물리학과 철학을,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사제이며,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