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박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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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혜은
책 『밤에 드리는 기도』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나 같은 ‘낮사람’에게 밤기도 책의 서평을 부탁하는 이메일을 받고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밤에는 그저 잠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밤 10시만 되면 졸려서 전화 통화도 못하는 사람, 살면서 단 한 번도 밤을 새 본 적이 없는 사람, 찰스 디킨스의 『밤 산책』이라는 책의 제목에만 매혹되는 사람, MT에 참여해도 밤 12시를 넘기지 않고 홀로 잠자리에 드는 사람. 그럼에도 그동안 내가 써왔던 글이 ‘복음주의 누아르’로 읽히기라도 했던 걸까.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 일하라”는 찬송가 가사에 충실하게 낮에 일하고 밤에 곤히 자는 나 같은 사람도, 글에 투영된 삶은 온통 검은색이었던 걸까. 그 요청은 정확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지금까지 내 삶은 온통 밤이었고, 앞으로도 밤은 끝없이 이어질 것임을 깨닫고 말았으니까.
삶이 밤이다
성공회 사제인 티시 해리슨 워런은 “2017년에 영혼의 어두운 밤”(38쪽)이 찾아왔을 때, 특정한 밤기도로 슬픔과 두려움의 강을 건넜다. 아버지가 한밤중에 갑자기 돌아가시고, 두 번의 유산을 겪어야 했던 2017년, 그를 “살아남게 해 준 것은 밤기도”(29쪽)였다. 밤기도라 해서 밤에 드리는 일련의 기도문을 상상했는데, 워런이 사랑한 밤기도는 의외로 네 문장의 짧은 기도였다.
사랑하는 주님, 이 밤에 일하는 이, 파수하는 이, 우는 이의 곁을 지켜 주시고, 잠자는 이를 위해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소서. 주 그리스도여, 병든 이를 돌보소서. 피곤한 이에게 쉼을 주시고, 죽어 가는 이에게 복을 주시고, 고난을 겪는 이를 위로하시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뻐하는 이를 보호하소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41쪽)
워런만큼 극적인 슬픔이 한꺼번에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저 기도의 구구절절이 내 삶의 모든 영역을 꿰뚫고 있어 전율이 일었다. 갑자기 닥친 영혼의 밤이 아니라, 가랑비 젖듯 내 삶 곳곳에 스며든 밤에 점령된 삶.
난 어느 정도는 “밤에 일하는 이”다. 밤새 노동하는 건 아니지만 남들이 퇴근할 시간에 한창 일하고 남들이 쉬는 날에는 무조건 근무를 해야 한다. 내 근무 시간을 들으면 지인들은 심히 안타까워하는데, 남들보다 사회에 늦게 나온 내게 선택지가 많지는 않다. 워런은 “밤에 일하는 이”에 대해 미국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 중 하나인 이민자를 들어 설명한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의 이민자가 되는 것은 종종 “많은 미국인들이 피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이 일하지 않을 시간에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밤에 일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종종 가난하고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118~119쪽)
언젠가 어둠이 짙게 내린 겨울밤을 가로지르며 퇴근하는데, 문득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감옥에 있는 건 아니지만 사방이 막혀 있는 느낌. 그러자 쉰 살에 감옥 한구석에서 라만차의 괴짜 영웅을 상상하며 『돈키호테』를 구상한 세르반테스가 생각났고, 집에 와서 『돈키호테』를 꺼내 한참을 쳐다봤다(읽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런 갇힌 것 같은 밤에 이 밤기도의 앞 구절을 떠올리며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워런이 덧붙여 준 묵상을 따라, 기능공이셨던 예수님을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죽어 가고 가난한 사람이 고통당하고 거대하고 폭력적인 제국에서 불의가 들끓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육신이 되셔서 가구를 만드셨다”(129쪽).
그런가 하면 코로나19 시국에서는 어느 정도 “병든 이”가 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공기관에서 일하기 때문에 백신 접종이 의무였는데, 인력이 늘 부족한 상황이다 보니 옆 동료와 백신 접종 일정을 조율하며 얼굴을 붉혀야 했고, 서로 백신을 맞고 해롱댈 때는 불편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미국인의 3분의 1은 몸이 아무리 엉망이든 상관없이, 어떤 이유에서건 결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55퍼센트가 병가를 내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몸을 사리기에는 우리는 그저 너무 바쁘다. 인간의 취약함은 귀찮고 불편한 것으로 드러난다.…우리는 우리 몸의 한계를 기꺼이 무시하려는 집단적 태도에 근거한 인사 체제와 기업 문화를 만들어 냈다.…우리의 한계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면, 한계를 거부하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비인간적이다. (158쪽)
어디 미국인만 아파도 결근하지 않고, 병가 내는 데 죄책감을 느끼겠는가. 나, 한국인이다. 2019년 OECD 평균 근로시간인 1,726시간보다도 연간 241시간을 더 일하는 한.국.노.동.자. 백신 접종 일자 때문에 연차 쓰는 데 얼굴 붉히고, 죄책감 느끼면서, 백신 맞아 취약해진 내 동료가 귀찮고 불편해지는 내 인간성 앞에 심히 초라해지는 코로나 시국, 노동자가 겪는 또 다른 특수한 밤이다.
“하나님께 병든 이를 돌보아 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인간이 축소되는 이 특정한 종류의 경험 안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부드러움과 심지어 풍성함을 가져오시기를 기도”(167쪽)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때다. 다음 주에 백신 2차 접종 후 취약한 상태로 출근할 내 동료와 우리의 일터에 그분의 부드러움과 풍성함이 임하기를.
책이 밤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마침내 펼치기까지 한 가지 질문에 오래 매달렸다. 아무리 삶이 온통 밤처럼 취약하다고 해서 밤기도에 몰두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굳이 책까지 읽어 가며 기도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위로할 많은 것들이 준비된 밤의 세계에서 하나를 정해 적당히 위로받으면 되지 않을까. 이 또한 하나님 선물 아닌가? 왜 굳이 밤기도 책을 집어 들고 읽어야 하나? 그것도 IVP의 기도 책이라니, 너무나 ‘복음주의스러운 정답’을 제시할 것 같았다.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길티 플레저에 빠지지 않고, 그 취약 상태를 직시하여 피하지 않는 것에 관한 책을 펴는 것? 그것도 기도에 관한? 과연, 백전백패다. 나부터도 퇴근 후에 씻고 침대에 누우면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팀 게시판에 들어가 곧 개막할 시즌 구상과 새로 교체된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로 뽑힌 신인 선수의 기량을 논하는 글을 읽으며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싶지, 기도에 관한 책을 펼치고 싶지는 않았다. 밤+기도+책 쓰리콤보의 고난이다.그런 내면의 갈등 와중에도, 나는 늦은 밤 퇴근길 내내 이 책의 제목을 묵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언젠가 닥치게 될 더 큰 어두움에 대비해 내 보루가 되어 줄 책, 내 밤의 삶에 닻이 되어 줄 것 같은 책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러다가 진짜 밤이 찾아왔다. 가랑비가 아니라 소나기 같은 밤이. 어느 날 밤 산책 겸 퇴근하는 나를 마중 나온 아버지의 왼쪽 다리가 이상했다. 걸음걸이가 불균형했다. 며칠에 걸쳐 아버지를 설득해 겨우 병원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가 병원을 오가며 검사를 받으시는 동안에는 밤마다 넷플릭스를 정주행하고, 인터넷 게시판을 항해하며 밤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소나기 같은 밤에는 온통 소나기에 흠씬 두들겨 맞아 정신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정신없이 네이버 건강지식을 검색하다가 가족들과 “기도하자”라는 멘트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도하자고 말하고 각자 헤어졌지만 막상 홀로 방에 앉아있으니 망연해졌다. 무슨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몰랐다. 내겐 언어가 없었다. 소나기에 흠뻑 맞아 정신이 집을 나갔으므로.
이때, 제목만 묵상하던 그 책이 비로소 날 붙잡아 앉혔다. 드라마 <인간실격> 속 대필작가 이부정(전도연 분)의 불행이나, <검은 태양> 속 한지혁(남궁민 분)의 믿을 사람 한 명 없는 요원의 고독이 밤의 삶의 일부를 드러낼지언정, 삶의 어두운 지점을 건너갈 실제를 제시할 힘은 없었다. 결국, 직면이다. 워런은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통과하며 걷기 위해,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는 어둠을 직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기 싫어하는 슬픔, 상실감, 외로움 같은 것을 느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쓴 잔을 마셔야 한다. 지름길은 없다. 무료입장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위로로 가는 낯선 길이다. 우리 영혼의 무게를 견디기에 충분할 만큼 본질적인 위로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15쪽)
“사랑하는 주님,…주 그리스도여, 병든 이를 돌보소서.…고난을 겪는 이를 위로하시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의 밤을 견뎌 낼 수 없다는 진실과 더불어, 밤의 삶을 비추는 매체는 ‘책’뿐이라는 진실까지 사무치게 깨닫는다. 밤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런 삶도 세계의 한 자리를 차지할 의미가 있고 위로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낮은 목소리는 오로지 책 속에만 있다. 그리고 그 책은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서 길어 올린 정답에 가까운 이야기를 올바르게 알려 주는 것이어야 했다. 우리가 겪는 밤은 결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와 ‘갤질’과 ‘트잉여’ 생활로 메꿔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는 존재라는 변함없는 사실에 대한 반응으로 믿음의 오랜 기예와 기도의 실천으로 들어간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이 아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이 기도의 원천이다. 그분은 기도의 선도자이며 우리가 그분을 부를 수 있기도 전에 우리를 부르고 계셨던 분이다. 그리고 밤이 아무리 어두워져도 그분은 부르기를 멈추지 않으실 것이다. 어둠이 아니라 빛이 상수다. (270-271쪽)
믿음의 오랜 기예와 기도의 실천으로 들어갈 타이밍이다. 내가 매일 밤 이 책의 제목을 묵상했던 건, 이미 아버지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전부터 날 부르던 기도의 선도자 때문이었고, 그 부름은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내 묵상과 기도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가장 어두운 곳을 통과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빛의 세계라면,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을 것이다. 기도로 이끄시는 분이 상수인 세계는 그 어둠의 과정조차 빛이 사방에 있을 것이므로. 밤이 길어질 것만 같다.
주
서평 제목은『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1997년 11회 단재상 수상소감 중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을 딱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입니다.”
박혜은
한양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숭실대에서 ‘권정생의 세 장편동화에 나타난 성서적 주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죠이선교회에서 오랫동안 간사로 일했고, 남들보다 좀 늦게 사회에 나와 책과 관련한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 현재는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에서 운영팀 매니저로 일하며 책과 사람을 잇는 일을 하고 있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2021년 10월 14일)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