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고 싶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건 진짜예요(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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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현우 목사
책 : 『내향적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회 사용 설명서』 애덤 맥휴 지음
수련회에 가던 날, 중학생인 나는 정말 심란했다. 설교는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들을 자신이 있는데, 찬양 시간에 옆 사람과 ‘짝’을 지어야만 할 수 있는 율동은 죽어도 할 자신이 없었다. 키도 작고 얼굴도 새카맣고 비쩍 마른 내가 여자애들과 율동을? “오, 주님. 저는 절대 못합니다.” 어디 그뿐인가. 꼭 전도사님들은 조명을 어둡게 하고 분위기를 잡으며 말하곤 했다. 돌아다니면서 최소한 세 명에게 오늘 받은 은혜를 나누라고. 내겐 지옥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래서 수련회가 정말 싫었고, 매번 이번 수련회에는 그런 것 좀 안 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지만 내 기억에, 하나님은 한 번도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적이 없다. 마냥 신나서 누나들 손 붙잡고 율동하던 녀석(?)들은 이런 내 마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그 모든 순간들이 일종의 상처였다. 나 같은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교회 분위기가 답답했고, 동시에 나는 도대체 왜 그런 걸 못 하는 걸까 하는 자괴감 때문에 우울했다. 내일모레 마흔인 나이가 되었는데, 25년 전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다. 나는 소위 내향적인 사람이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성향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75쪽). 목사로서 ‘이웃 사랑’에 대한 설교를 우렁차게 할 때는 괜찮은데, 막상 이웃과의 직접적 만남인 ‘2부 활동’(티타임)을 하기 전에는 심호흡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다시 수련회 이야기를 꺼내자면, 수백 명 단위의 연합 수련회에 가면 찬양 리더들은 꼭 학생들을 단상 곁으로 불러서 ‘점프’를 시켰는데, 나는 언제나 멀리서 괴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도무지 나갈 엄두는 나지 않고, 좋다고 뛰쳐나가서 열광적으로 폴짝거리는 친구들을 향해 열등감을 느끼며 말이다. 서평에서 나의 개인적 이야기를 장황히 늘어놓는 이유는, 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책을 넘기다가, “어라? 내가 언제 이 책을 썼더라?” 싶었을 정도다.
외향적 교회 문화 속의 내향적인 사람으로서 힘겨운 수십 년을 버텨 오던 나에게, 저자 애덤 맥휴가 책을 통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는 정상이라고”(30쪽). 내향적인 것은 외향적인 것에 비해 열등한 것이 결코 아니며, 대단히 정상적인, 보통 사람의 기질들 중 하나라고 말이다. 이 같은 선언만으로도 이 책은 그 몫을 충분히 한 셈이다.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64쪽),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만 이웃을 향해 나아갈 힘이 생기는 신중한 그리스도인들. 많은 외향적인 목사들처럼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세련되고 붙임성 있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정말 목사의 자격이 있는지 씁쓸히 자문하게 되는 목사들(27쪽). 걱정할 것 없다. 모두 정상이다. 정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존재들이다(81쪽).
저자의 지적처럼, 많은 교회가 외향성에 편향된 신학과 교회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36쪽). 내향적인 사람이 결코 비정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구조 자체가 그들을 배제하거나 신앙에 뭔가 결여된 부분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이야기) 나눔’은 내향적인 이들에게 긴장을 유발한다(144쪽). 그들은 친밀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도 얼마든지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는 외향적인 사람들과 태생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침묵과 머뭇거림은 ‘분위기를 망치는 죄’가 되고, 심지어 ‘믿음 없음’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가 생각과 자세를 바꿔야 한다면, 내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교회여야 할 것이다. 나는 나와 같은 기질로 인해 교회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진심인 신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참 고맙게도, 저자는 내향적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강점들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제시했다. 그중에서 나는 ‘긍휼’(149쪽)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머물렀다. 내향적인 사람은 북적거리는 자리에서 뭔가 모자란 모습으로 구석에 찌그러지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멋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쩐지, 나는 항상 눈시울이 붉어진다. 저 고통받는 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해서 말이다. 감정의 배설을 잘한다는 게 아니라, 이 고통의 문제가 나에게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란 뜻이다. 그래서 이것이 내향적 그리스도인의 강점이라는 저자의 말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여전히 구석에 찌그러지는 게 편하다. 그건 어쩔 수가 없다.) 그 외에도 내향적인 사람은 ‘통찰’, ‘경청’, ‘창의성’ 등과 같은 강점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외향성으로 편향된 교회들의 자산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한편 저자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오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점을 잘 지적했다. 내향적인 신자들이 그 자체로는 결코 비정상이 아니지만, 동시에 ‘공동체성’을 포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96쪽). 내향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들과 달리 혼자 있는 게 더 편하다. 혼자 책을 읽고,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도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서 고독을 즐기는 분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관계적’인 분임을 뜻하며, 그것은 곧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지향을 드러낸다(141쪽). 모든 이들이 참된 의미에서 하나가 되는 세상이다. 내향적 신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내향적인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그것이 마냥 혼자 있겠다는 권리를 주장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현대적 의미의 ‘개인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위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로만 기독교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오해하는 것이다(140쪽). 하나님과만 각별한 사이가 되고, 이웃과는 그럭저럭 지내도 괜찮은 기독교는 없다. 예수께서 율법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두 마디로 요약하신 것을 기억해 보자. 결국 아무리 내향적 신자라도 ‘불편’을 감수하며 언제나 공동체를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284쪽).
책을 읽던 중, 내향적인 사람인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지난번에 ‘대답’(88쪽)을 왜 바로 안 하냐며 답답해한 거 너무 미안해. 자기는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내향적인 사람이어서 그렇다는 걸 책 읽다 깨달았어.” 사랑스러운 아내가 이번에는 ‘즉시’ 답장을 보내 주었다. “그려 ㅎㅎ”라고.
내가 아내에게 실수했듯, 많은 경우 교회는 내향적인 그리스도인을 기다려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사교적이고 열정적이며 미소가 넘치는 사람, 대화에 막힘이 없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을 신앙의 모범으로(33쪽) 제시하며 내향적인 사람들이 설 땅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차분히 돌아볼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향적인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비롯한 수많은 강점이 있고, 그 강점들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훌륭한 자산이다. 자신만의 보폭으로(99쪽) 느리게 걷지만, 분명 하나님 나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내향적인 신자들의 손을 붙잡는 교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글은 <뉴스앤조이>X IVP 서평단 이벤트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글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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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자유인교회 담임목사.
기독교는 그런 이상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증언하는 일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정중하고 애정어린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