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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공동체, 은총의 삼위일체 하나님(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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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혁(역자)

책 『예배,공동체,삼위일체 하나님』제임스 토런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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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임스 토런스(James B. Torrance, 1923-2003)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Worship, Community and the Triune God of Grace)의 한국어판이다. 지난 세기 영어 사용권을 대표했던 조직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제임스 토런스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대학교와 애버딘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수많은 후배 신학자와 목회자를 가르쳤다. 그는 지역 교회 목회자로 공동체를 충실히 섬기면서, 스코틀랜드 교회 협의회(Scottish Church Society)와 영국 교회 협의회(British Council of Churches), 세계 개혁교회 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등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롯한 여러 국제 정치 문제에 양심의 목소리를 낸 지성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여러 공적 역할과 활동들 외에도, 그는 현대 신학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저명한 토런스 가문의 일원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1)


만약 독자들에게 제임스 토런스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지금껏 우리말로 그의 주요 작품이나 신학을 소개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친형이었던 토머스 토런스(Thomas F. Torrance, 1913-2007)와 비교할 때, 제임스 토런스는 대중적으로 덜 알려졌고 그의 저술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문 신학자이자 교육자, 목회자, 교회 활동가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특히 그가 신학적 원숙기에 선보인 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의 사상과 경험의 정수가 압축되어 담겼을 뿐만 아니라, 토런스 가문 신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삼위일체론의 언어와 논리 위에 예배 신학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탁월한 시도로 평가받는다.



제임스 토런스와 예배 신학

 

뼛속까지 스코틀랜드인이란 말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임스 토런스는 자신의 스코틀랜드 배경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실제 많은 스코틀랜드인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독일과 스위스, 잉글랜드로 옮겨 다니며 신학을 공부했고 이후에도 세계 곳곳으로 강의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다. 그는 학생이자 학자로서 국제 활동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낯선 문명에서 기독교 신앙을 형성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선교사였던 부모님 덕분에 중국 청두시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다 토런스 가족은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린 제임스 토런스가 중국에서의 옛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지는 못했지만, 10년 터울 형 토머스 토런스는 그들의 중국 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교사 부모님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하나님의 존재는 나의 부모님이나 내 주위 세계의 존재만큼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나는 매일 성경을 세 장씩, 주일에는 다섯 장씩 읽었다. 이렇게 하면 매년 성경 전체를 다 읽을 수 있었다. 시편과 신약의 몇몇 책(예를 들면 로마서)을 외우셨던 아버지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많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도록 하셨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이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는 가족의 기도를 인도하셨고, 우리에게 복음적인 찬송을 가르치셨다. 아버지를 통해 접했던 기도와 찬송은 우리의 영적 이해를 살찌우고 신앙을 자라게 했다.2)

 

토런스 형제는 종종 이러한 가족 분위기가 자신들의 신앙뿐 아니라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배운 기독교 신앙은 오랜 장로교 전통을 가진 스코틀랜드 특유의 분위기에서 구체적인 신학적 형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토머스와 제임스 토런스가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이후 두 형제가 교수직도 수행했던 에든버러 대학교는 연구 중심의 신학자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일할 목회자와 선교사 후보자까지 함께 교육했다. 그러다 보니 당시에 학교 자체가 독특하게도 예배 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3그리고 18세기 이래 큰 영향을 끼쳤던 독일의 엄격하고 학문적인 신학과는 달리, 스코틀랜드 대학교는 신학자들에게 학문적 독창성보다는 후학들을 지도하는 교육자로서 책임을 강조했고 교회를 위해 전통을 재해석하도록 요구했다.4매킨토시 입에서 나왔다고 알려진 신학은 독일에서 발명되고, 미국에서 타락하고, 스코틀랜드에서 교정된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올 법하지만, 그 속에서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의 자긍심과 신학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읽어 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라나고 활동한 토런스 형제이기에 그들은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학문적 논리와 체계를 세우는 일에 주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형제가 전개한 조직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적 예배와 기도 그리고 찬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제임스 토런스에게 삼위일체론은 단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회의 신앙과 예배의 문법5) 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실제 그는 삼위일체의 언어와 논리에 따라 예배 신학을 구성했고, 그 결과 신론과 그리스도론, 인간론, 은총론, 구원론, 교회론 등 핵심 교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인의 삶과 긴밀히 결합하는 포괄적 틀이 마련되었다. 또한 그의 예배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교부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신학적 모델을 어떻게 바라보고 수용할지를 지혜롭고 균형 있게 판단하게 하는 관점도 제시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물로서 예배

 

전문 신학자로서 제임스 토런스의 활동이 다채롭고 왕성했던 만큼, 그가 남긴 성취와 기여도 다양하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교리주의와 율법주의 경향을 보이는 칼뱅주의에서 은총과 복음의 신학자로서 칼뱅의 복원, 학계와 대중의 관심 밖에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재발견, 교부·중세 신학과의 대화를 통해 개신교 신학의 공교회적 유산 회복 등, 이들만 거론하더라도 그의 학문적 관심사가 매우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6)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뒤를 이어 신학을 철저하게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관점에서 재서술하려 했다. 그는 바르트 신학 속에 풍성히 잠재된 예배 신학의 가능성을 자신의 글과 강연에서 더욱 명료하고 아름답게 현실화했다. 이로써 바르트 이후 현대까지 이어진 삼위일체 신학의 다양한 발전 형태 중에서도, 그는 예배와 성례와 기도라는 공동체적 실천을 삼위일체론과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모델을 제시했다.

삼위일체론이 신앙의 문법이 된다는 의미는 일상에서 우리가 자신을 사고와 행위의 주체로 삼던 것과는 정반대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계와 자아를 이해하고 이야기하게 됨을 뜻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낯선 은총은 우리가 눈앞의 세계를 조작하고 지배하면서 활용한 언어와 논리의 독단적 지위를 상대화한다. 대신 삼위일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문법이 되면 율법이 아니라 복음, 율법적 회개가 아니라 복음적 회개, 순종의 명령법에 선행하는 은총의 직설법,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의 우선성7) 으로 생각이 전환되고 이에 따른 행동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의 기대에 역행하며 도발적으로 찾아오는 은총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자기를 자유롭게 개방하고, 이에 맞춰 몸과 마음의 습관을 익혀가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바로 공동체적 예배다


그렇다면 신앙과 예배의 문법이 되는 삼위일체론의 내용은 무엇일까. 교회의 긴 역사 속에서 발전해 온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은 무궁무진하지만, 제임스 토런스는 예배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핵심 명제 세 가지를 추려 낸다. 사실 이 셋은 우리를 위한하나님의 단일한 은총 사건이지만, 시간적 선후에 따라 사고하는 데에 익숙한 우리를 위해제임스 토런스는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설명한다.


 

(1) 삼위일체의 내적(ad intra) 관계와 우리의 참여: 성부와 성자는 교제를 나누고,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가 누리는 교제에 참여한다.

(2) 삼위일체의 외적(ad extra) 활동과 우리의 참여: 세상을 향해 성부는 성자를 파송하고,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성부가 성자를 보내는 파송에 참여한다.

(3) 삼위일체로 참여하기 위한 은총: 예배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물로, 성령을 통한 이중적 참여(성부와 성자의 교제/성부로부터 성자의 파송)가 이루어진다.

 

제임스 토런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우리가 예배를 통해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고자, (1)(2) 그리고 (3)의 내용을 포괄하는 긴 문장을 곳곳에서 반복한다.8) 이러한 제임스 토런스 신학의 삼위일체적 패턴을 숙지하면, 논리나 번역 투가 낯설더라도 저자의 의도를 분별하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번역은 곧 반역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는 만큼, 이미 완료된 번역의 완성도에 대해 더 변명하기보다는, 이쯤에서 책의 핵심에 자리한 신학적 난제가 무엇인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와 선교(파송)에 참여하며, 왜 하필 그 결정적 계기가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나 하나님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적 예배인가라는 문제다.



그리스도의 인간성 속에서 드려지는 참 예배

 

제임스 토런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고 무엇을 하는가를 알려면 인간이나 신앙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부터 탐구해야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영원부터 서로 분리되지 않으시고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교제하는 존재(Being-in-communion)시다. 놀랍게도 사랑의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인간을 들어 올리셔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게 하신다. 은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교제와 세상을 향한 활동에 조건 없이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자기중심성과 타자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난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과 친교하고 동료 인간과도 교제를 나누는 자신의 참존재(true being-in-communion)를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참사람 됨을 발견하는 중요한 맥락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교제로 초청하시는 은총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예배다.

 

그런데 이때 제임스 토런스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참여하는 교제가 성부와 영원한성자 사이의 교제가 아니라, 성부와 성육신한성자가 나누는 교제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을 가지셨다는 사실, 이것은 우리의 구원뿐만 아니라 예배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신학자마다 그리스도론을 다룰 때 특별히 더 의지하는 신약성경의 책이 있게 마련이다. 제임스 토런스는 요한이나 바울의 그리스도론에서도 많은 통찰을 끌어오지만, 예배 신학의 핵심 주제를 구성할 때는 단연 히브리서를 많이 인용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떠돌던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에 현혹된 사람들을 위해 구약의 제의적 상징주의를 활용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더는 다른 제물이 필요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하고 완전한 희생 제물이자, 성부께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우리를 대표하여 예배를 드리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다. 제임스 토런스가 평가하기에,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구원론적 관점에서 전자(그리스도의 희생)는 강조했지만 후자(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의미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 그 결과 신학과 실천에서 예배, 공동체 그리고 은총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빈약해졌다.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신 성자는 우리를 위해성육신하시고 자신의 인간성 속에서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대리하신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분의 인간성 안에서 우리의 인간성도 함께 죽고, 새롭게 태어나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변화한다. 물론 완전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으로서는 갚을 수 없는 죗값을 자기 죽음으로 대신 갚으셨다(형벌 대속론). 하지만 신약성경은 성육신 사건을 죄와 용서의 구원론적 구도 속에서 설명하면서도,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유를 이를 넘어서는 더 큰 의미의 맥락에 위치시킨다. 즉 자신의 인간성 안에서 그리스도는 성부 앞에서우리를 대변하고 중보하시며, 동시에 우리에게인류를 향한 성부의 본래 목적을 계시하고 실현하신다. 이로써 피조물이자 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마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성부의 사랑을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서 죄와 연약함으로 비틀거리고 실수하겠지만, 나사렛 예수가 사셨던 사랑과 순종과 예배의 삶에도 은총으로 참여하였기에 새로운 존재로 살 가능성을 이미 선물 받았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향해내려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향해올라가는 이중의 동력을 가진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는 감사와 회개와 순종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만약 이때 우리가 자신의 믿음이나 힘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예배와 기도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 혹은 공로주의 행위로 변질한다. 예배와 기도, 믿음, 순종 등은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반응이지만, 이 모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맥락에서 먼저 이해되어야 하고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라는 성서적 개념에 비추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기에 삶 속에서 예배와 기도, 신앙 등의 다양한 활동이 현상적으로 관찰된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은 제한되고 욕망은 뒤틀려서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고 구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혹 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연약하여 이를 올바로 행하지 못한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는 성부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유일한 예배를 자신의 인간성 속에서 단번에바치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자신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드리신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조건 없이 감싸고 지탱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피조물이자 죄인임에도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예배에서, 즉 말씀과 성례의 사역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과 순종과 감사로 응답하도록 부르신다.우리는 하나님께 인간적이고 나약하며 무가치하고 깨어진 응답을 한다. 그런 중에도 성령은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들어 올리신다.9)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삼위일체론(1)과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교리(2)를 통해 드러내 보여 주는 기독교 신앙과 예배의 핵심 문법이다. 이러한 관점을 확장하여 제임스 토런스는 세례와 성찬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해야 할지(3), 전통 신학과 예배에 도전하는 현대 페미니즘의 목소리에 비판적이면서도 공감하며 반응할 길이 있는지(4)를 함께 고민하는 이론과 실천의 장을 마련한다. 이후 이 매력적인 책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묘사할 때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에 관한 명료하고 유용한 설명을 담은 후기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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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

 

지난 몇 십 년간 신학계와 교회에서 삼위일체론과 예전에 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전자는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후자는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주로 다루어졌다. 사실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부흥을 이끈 바르트와 라너, 로스키(Lossky) 등은 교리와 실천의 분리가 근대성이 기독교에 남긴 비극적 결과물 중 하나임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들은 둘 사이의 골을 삼위일체론의 언어와 논리로 넘어서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의 논의가 정교하고 광범위하다 보니, 난해한 삼위일체론이 교회를 위한 실천적 지혜가 된다는 사실을 전문적 신학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끝 무렵에 선보인 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만큼 삼위일체론과 예배를 명료하면서 균형감 있게 연결해 주는 작품을 이전에는 찾기 어려웠다고 해도 그리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실제 이 책을 읽고서 여러 신학자와 목회자가 깊은 신학적 성찰과 목회적 통찰에 호의적으로 반응했고, 영어 사용권의 많은 신학교에서 이 책이 교재로 사용되고 있으며, 근래에 토런스 형제의 예배 신학에 관한 연구도 해외에서 여럿 출판되었다. 그렇기에 이 책이 늦게나마,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우리말로 출판된 것은 몹시 환영할 만한 일이다.

번역하는 내내 개인적으로는 책 내용이 좋아 보람을 느낀 한편, 제임스 토런스라는 한 인물의 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해서 즐거웠다. 신학사의 흐름을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넓은 시야, 서로 다른 입장이 충돌할 때 무엇이 근원적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판단력, 복잡한 신학을 명료하게 압축하고 시각화해 내는 능력에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10) 또한 제자들의 증언으로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교육자이자 목회자로서 그의 성숙한 인격과 온화한 성품, 복음에 대한 헌신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도 이 한 권의 책에서 풍성하게 접할 수 있었다. 부디 독자들도 이 책을 읽으며 이러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를 읽고 독자들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예배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이 책을 거울삼아 참 예배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예배가 늘 새롭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낯섦을 잘 짜인 프로그램이나 매뉴얼로 길들이려 하며,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예배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강대상 위 사람들이 주목받고 예배가 안식이 아니라 탈진을 유발하는 노동이 되며, 교인들 사이의 교제를 강조한다면서 오히려 공동체 안팎의 누군가를 배제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총을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정당한 대가 없이 재능을 기부하도록 무례하게 요구하며, 신자를 붙잡고자 교회성장주의를 복음으로 삼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처럼 우리는 복음에 따라 바른 신앙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제임스 토런스의 표현에 따르면) 은총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경건과 열심에 의지하는 유니태리언적예배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11)


예배 회복이라는 표어가 무의미한 외침이나 선동이 되지 않으려면, 이 책이 제안하듯 예배에서 은총의 문법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아무리 팬데믹 상황과 과학 기술의 발전이 예배의 모습을 바꿀지라도, 예배에서 어떻게’(how)가 아니라 누구’(who)라는 근원적 질문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임스 토런스의 진심 어린 조언을 꼭 기억하면 좋겠다



1) 대표 인물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제임스 토런스의 형인 토머스 토런스는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의학을 가르쳤고, 칼뱅과 바르트 등의 대작을 편집하고 소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생 데이비드 토런스(David Torrance)도 스코틀랜드 교회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다. 그의 조카 이언 토런스(Iain R. Torrance)는 신약과 교부학 전문가로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앨런 토런스(Alan Torrance)와 손자 앤드루 토런스(Andrew Torrance)도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2) 토머스 토런스의 회고를 다음 책에서 재인용했다. Alister McGrath, T. F. Torrance: An Intellectual Biography (Edinburgh: T & T Clark, 1999), p. 13.

3) 당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갈등이 에든버러 대학교 내의 뉴 칼리지(New College)와 신학부(Divinity Faculty)의 분위기에 끼친 영향과 뉴 칼리지에서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토런스 형제의 신학 수업에 관해서는 다음 연구서를 참고하라. Kevin J. Navarro, Trinitarian Doxology: T. F. and J. B. Torrance’s Theology of Worship as Participation by the Spirit in the Son’s Communion with the Father (Eugene: Pickwick, 2020), pp.3-4.

4) 스코틀랜드 대학교의 신학적 분위기를 재구성할 때 다음을 참고했다. Alasdair Heron, “James Torrance: An Appreciation”, Christ in Our Place: The Humanity of God in Christ for the Reconciliation of the World, Essays Presented to Professor James Torrance, ed. Trevor Hart and Daniel Thimell (Eugene: Pickwick, 1989), pp. 5-6.

5) 제임스 B. 토런스, 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 김진혁 옮김 (서울: IVP, 2022), p. 138.

6) 제임스 토런스가 교육자, 목회자, 교회 활동가, 강연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보니 오랜 시간을 들여 집필해야 하는 단행본이나 연구서를 많이 출판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주로 학술지나 공저한 책에 논문 형태로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수많은 미출간 원고의 제목을 보면 그의 학문적 관심사가 출간된 글로 한정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조직신학자로서 사상의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주로 교회의 현실적 필요에 신학적으로 응답하려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제임스 토런스의 저술 목록은 다음 웹 페이지를 참고하라. <https://tftorrance.org/taxonomy/term/127>

7) Heron, “James Torrance”, Christ in Our Place, p. 4.

8) 일례로 서문의 도입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교회의 예배와 선교는 성부와 성육신한 성자 사이의 교제와 성부가 성자를 세상으로 보내신 파송에 우리가 성령을 통해 참여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the worship and mission of the church are the gift of participating through the Holy Spirit in the incarnate Son’s communion with the Father and the Son’s mission from the Father to the world). 토런스, 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 p. 13(원서 p. 9).

9) 토런스, 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 p.123.

10) 애버딘 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임스 토런스는 강의 중에 복잡한 신학 내용을 이미지나 표를 그려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이 책의 1장과 4장에 나오는 표를 보면 제자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1) 이 책이 영미권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긴 이유 중 하나는 제임스 토런스가 주조한 유니테리언적 예배라는 개념 때문이다. 책의 1장에서 제임스 토런스는 예배 형태를 유니테리언 모델과 삼위일체적 모델로 범주화한다. 교리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인성만을 강조하던 유니테리언적입장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을 향한 개인의 결단과 헌신을 강조하는 실존주의복음주의와는 매우 다른 그리스도론적 전제를 가졌다. 하지만 예배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은총의 문법에서 이탈하여 우리의 경건, 믿음, 선택,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간중심주의 예배 모델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교리적 차이가 있음에도 실천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 철학,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IVP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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