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욥기(정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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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재경
책 『특강 욥기』권지성 지음
지금껏 우리는 욥기를 좋은 구절 중심으로 읽거나 고통에 대한 신앙인의 인내를 가르치는 격언집으로 사용했다. 해서 누군가 욥기를 읽고 있다면 어려운 일을 겪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나 축복 같은 상투적 말로 위로를 건네곤 했다. <특강 욥기>는 욥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다시’ 하도록 한다. 저자는 욥기의 핵심 주제를 고통에 한정하지 않고 정의, 아름다움까지 확장한다. 기존에 너무 쉽게 결론지은 욥기 해석들은 이 책을 통해 재고된다. 이 책은 의인이 왜 시험을 받는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에 관한 강렬한 대조, 하나님의 완전한 자유로우심과 하나님 중심의 우주적 세계관, 질문하고 항의하는 의인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기존의 이해에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욥과 친구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각 주장에 있는 부분적 진실을 인정하면서도 더 큰 관점에서 비판을 가한다는 것에 있다. 즉 이 책은 정답을 듣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와 다른 본문에 당혹감을 느끼며 욥기의 치열한 논쟁 속으로 더 깊이 참여하게 만든다.
고통에 대한 망언들
세상에는 여러 사건들이 있고 이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존재한다. 모든 해석은 신중히 이루어져야하고 특히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 그래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그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비극이든 희극이든 교회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해왔던 것은 아닐까.
욥의 세 친구는 교회 현실과 유사하다. 세 친구와 엘리후는 인과응보의 세계관으로 욥의 고통을 단정 짓는다. 욥기 4장부터 37장까지의 논쟁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틀릴 수 있고, 하나님의 정의 및 통치가 자신들의 이해 밖에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정 신학 체계 속에서 욥을 위로하고 때로는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욥의 친구들의 신학은 욥의 상황/현실과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기에 “탁상공론”으로 평가된다. 친구들의 어떤 해석으로는 욥이 경험하고 있는 숨어 계신 하나님, 그분이 통치하는 세상에 고통이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해소되지 않는다.
<특강 욥기>에서 욥은 우리가 아는 경건함을 넘어선다. 그는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고, 법정에서 싸우자며 하나님께 소리 지르며 하나님의 통치는 불의하다고 고발한다. 욥은 분명 의인이라 불린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또한 그는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여지없이 흔들리고 두려움에 떨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항의, 고함은 성경에서 제거되지 않고 우리에게 전달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이런 욥들의 소리를 제거하는 쪽으로 흐른 것 같다. 그래서 욥들의 소리는 침묵에 빠졌고 욥의 친구들의 소리만이 교회 공간에 울린다.
정의는 무너졌는가
욥은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를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가다. 욥에게 세상의 정의는 무너졌고 악인과 의인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욥은 또 “지혜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물으며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고백한다. 동시에 욥은 억압받는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무척이나 그리워한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흙 가운데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그는 이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확신하기에 더 괴롭다. 마지막 변론에서 그는 정욕, 거짓, 탐욕, 간통, 부당한 처우, 가난한 자들을 향한 무정, 거짓 숭배, 증오, 나그네에 대한 냉대 등에서 자신이 무죄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욥은 자신을 왕으로 묘사하는 오만한 태도를 드러내며 자신의 영광과 구원에만 관심을 보이면서 가족의 죽음이나 고통에는 침묵한다.
욥의 친구들과 욥의 논쟁에서 욥의 친구들은 질서, 구조, 객관성을 쫓다가 하나님의 예외성, 불가해성을 놓쳤고 욥은 그 속에서 무질서를 보고 자신의 회복만을 갈망한다. 고통이라는 삶의 변주는 결국 두 종류의 사람 모두를 자기 관점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만들었다.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질서의 붕괴이거나 탁상공론으로 지켜지는 자기 확신이다.
신의 아름다움이란 신비
욥기의 결말에는 엘리후와 하나님이 등장한다. 자신을 예언자처럼 소개하는 엘리후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이 더 나은 욥을 만든다는 교훈을 준다. 그는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하지만 욥이 당한 고통과 그가 보는 창조세계는 그런 교육적 목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논쟁이 끝난 상황에서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등장하시고, 평행선 같던 논쟁을 종결시킨다.
하나님의 나타남과 동시에 정의와 고통에 관한 논쟁이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논쟁은 계속 이어진다. 하나님은 욥의 무지와 무능을 속속들이 드러내시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이에 있는 간극 속으로 욥을 던지신다.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의 “계획”을 어둡게 한다고 꾸짖으시면서 피조 세계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친절한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이자 통치자로서 욥에게 질문하면서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계에 대한 명확한 설계도를 갖고 있는 존재, 누구에게도 구속당하지 않는 완벽한 자유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신다.
“욥은 정의에 대한 항변을 중단하고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묵도하며 그에 대한 경외함 속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여호와의 비전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것인지, 이제 결정할 때다(328쪽).”
폭풍이 지나가고
어찌됐든 욥의 삶을 뒤흔든 폭풍은 지나갔다. 여호와의 연설을 들은 욥은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고백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오류를 지적하시고 번제로 관계 회복을 명하신다. 이후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갑절의 소유라는 복으로 바꾸셨고 친척과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사라진 욥의 아내에 대한 답변을 보지 못했고 욥이 겪고 있던 피부질환의 회복은 거론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정말 축복된 결말일까?
폭풍이 지나가고 욥은 다시 그전의 욥으로 돌아갔을까? 욥기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 현실에서도 남아서 또 다른 욥들에 의해서 질문되고 있다. 욥기는 우리에게 확연하게 설명되거나 이해되는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는다. 욥기는 우리의 평안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낯설게 그려낸다.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의 자유는 제시되고 인간의 이해 너머의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는 선언된다. 이제 우리에겐 질문이 던져진다, 그러면 이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정재경
보수적인 신앙에서 자라다가 다양한 독서모임을 통해 다시 신앙과 세상을 보게 된 목회자후보생이다. 현재는 독서와 신앙의 조화를 꿈꾸며 고민과 씨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