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시대와 마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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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 『성경적 비판 이론』(크리스토퍼 왓킨 | 신재구 옮김)
글_ 배태진(유튜브 〈배블리오테카〉 운영자)
성경적 비판 이론? 이 책은 제목 앞에서 일단 주춤하게 된다. ‘비판 이론’이라면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사회적 억압과 해방, 권력의 문제를 파헤쳤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자연스럽게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형용사 ‘성경적’이 붙으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크리스토퍼 왓킨은 이 낯선 조합을 도대체 어떻게 풀어낼 생각일까?
이 책은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주제를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룬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급진적인 이야기를 성경적 관점으로 열정적이고도 차분하게 전달해 낸다. 기독교는 그동안 비판 이론이라는 주제를 대체로 경계하거나 멀리해 왔다. 하지만 이 책은 기존의 흐름과 달리, 비판 이론과 성경에 기반한 신앙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하면서 그 둘 사이에서 뜻밖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전에 없던 논의를 아주 낯설고 난해하게 풀어 가는 이야기일 거라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책은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이 맺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열매 중 하나에 가깝다. 책의 추천인 목록에서 전통과 보수의 냄새를 맡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영안, 신국원, 이정규가 그렇고, 팀 켈러와 마이클 호튼, 수탄토와 밴후저라는 이름 또한 그러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이름을 듣고 ‘벌써 대충 답 나오네’ 한다면 그것 역시 성급한 판단이다. 이 책은 전통과 보수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전통과 보수를 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책이 담고 있는 논의는 보수와 진보라는 틀 너머에서, 기독교 신앙의 한복판을 다시 정통으로 겨눈다. 책을 읽어 가며 만나게 될 것은 어느 특정한 진영이 차려 놓은 뻔한 식탁이 아니라, 신학 고유의 신선하고 선명한 통찰이 주는 기쁨, 즉 그리스도교 사유의 순정한 만찬이다.
성경을 통해 세상을 읽는 현대판 『신국론』
왓킨의 핵심 아이디어는 간결하다. 그는 성경을 통해 세상을 적극적으로 읽으려 한다. 이는 성경이 세상의 문제 앞에서 쭈뼛거리며 변명하듯 물러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세상보다 더 크고 근원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겪는 혼란과 갈등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동시에 그 근원을 밝히며, 마침내는 그것이 치유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까지 품게 한다.
이에 대한 왓킨의 접근은 단지 교리적이거나 관념적인 논의에 머물지 않는다. 왓킨이 펼치는 성경적 접근법은 정치, 문화, 환경, 인간의 존엄성 같은 실제 삶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며,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개입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유한 담대함, 즉 ‘성경적 용기’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이토록 용감한 논의를 바라보면서 이 책을 현대판 『신국론』이라 부르는 것은 지나친 과장일까? 그 대답은 시간에 맡겨야겠지만, 왓킨이 신학과 사회 이론 사이에 의미 있는 긴장과 상호 작용의 디딤돌을 놓았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의 운명을 목격하며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관계를 근본부터 질문했던 것처럼, 왓킨은 오늘의 시대를 성경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다시 세운다. 이를 통해 그는 신학과 사회 이론 사이의 익숙한 충돌이나 어설픈 타협 대신, 두 영역을 새롭게 비추어 보게 하는 견고한 성경적 틀을 제시했다.
그 중심에는 저자의 ‘대각선화’(diagonal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대각선화는 그 개념 자체보다는 그것을 다루는 방식의 탁월함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개념일 것이다. 이는 세속적 개념들이 가진 모순적인 두 측면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것인데, 자칫 잘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호함에 그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견고한 신학적 바탕과 더불어 사회 과학과의 긴밀한 대화라는 두 조건이 필수적일 텐데, 왓킨은 바로 이 까다로운 지점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학제 간 논의를 통해 대각선화라는 개념을 하나의 실현 가능한 성취로서 끌어올린다.
성경적 비판 이론, 그 땅 위에 서다
다시 처음의 낯선 제목 앞에 서 본다. 성경적 비판 이론을 갖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왓킨의 작업은 우리 시대를 성경 앞에 다시 세우고 비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이후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갈 단단한 땅까지 마련하고자 한다. 저자가 던진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일, 성경의 관점이 우리의 정치와 문화, 환경과 삶의 문제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개입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 바로 그때 이 책은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틀을 성경 앞에서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이들, 성경적 관점으로 세상을 읽고자 애쓰는 목회자와 신학자들, 혹은 ‘신학책 좀 읽어 본’ 독자 여러분께 이 책을 권한다.
끝으로, 책을 덮고 나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대와 성실히 마주하며 맺을 수 있는 열매는 곧, 성경적 사유가 가져다주는 명징한 용기의 회복이라는 것을.
배태진
책을 사랑하는 고전어 교사이자 목사 그리고 세 아들의 아빠. 유튜브 채널 〈배블리오테카〉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