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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움이 불편한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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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 『나를 위한 처방, 너그러움』 아운디 콜버 | 정효진 옮김 
글_오인표 (IVP 간사_마케터)

 
가끔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능하다고 늘 볼멘소리를 하셨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 건사하는 일에 왜 그토록 무능했던가. 우리 가족에게 정녕 훌륭한 가장이 되어 줄 수 없었던 것인가. 그 생각 끝에는 늘 원망이 따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도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게 되었다. 나는 내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니 급급했다. 마치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다. 내가 꾸린 가정, 내가 건사해야 하는 자식들에게 무능하지 않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참 열심히 일한다”라는 말이 아버지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라 생각했다.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일로 나를 내몰았다. 집에 돌아가면 언제나 불은 꺼져 있고 아내와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다. 지친 몸으로 소파에서 잠들어 버리곤 했다. 나는 내 아버지처럼 가족들 앞에 무능하지 않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런 의지를 해체해 버리는 말이 싫다. ‘너그러움’이라는 말이 나에게 그렇다.

『나를 위한 처방, 너그러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랬다. 나처럼 누군가를 지키려는 명목하에 무능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이에게 ‘너그러움’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넓게 보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에게 ‘너그러움’이라는 말은 얼마나 불편할까? 세상에 자기 이름을 알리고, 많은 부를 축적하는 일에 ‘너그러움’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를 더 몰아세워야, 나에게 더 박해져야 남들 보다 앞설 수 있다. 그러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너그러움’은 그저 나태한 누군가의 봄날 꽃 노래 같지 않을까.

저자는 ‘너그러워’지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너그러움은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너그러움과 결이 다르다. 성공하는 방식으로서의 심리학적 혜안이 아닌, 하나님이 부르신 온전한 모습으로서의 ‘너그러움’을 가져야 한다. ‘너그러움’을 통해 하나님이 부르신 모습을 회복한다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먹이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 나를 만드는 일이다. ‘너그러움’을 회복할 때, 내가 사랑하는 이들도 나를 통해 너그러움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단연코 이 책은 심리학적 성공의 혜안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당신이 너그러움을 회복할 때 누군가 당신에게서 너그러움을 누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초대다.

저자 아운디 콜버는 삶의 질곡으로 자신에게조차 너그러울 수 없었던 시간을 진솔히 고백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독자에게 그 너그러움을 회복할 것을 독려한다. 그녀가 책 끝자락에 써 놓은 독자를 향한 당부를 수 십 번 다시 읽었다.

“독자여, 나는 당신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사랑받는 자로, 친절과 연민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자로 바라보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이 얼마간 자신이 하나님이 부르신 존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내면의 목소리 때문에 고투하고 있음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하나님은 다시 그리고 또다시 우리를 자애롭게 만나러 오신다. 

그리고 그분이 오신 것이 바로 우리 때문임을 상기해 주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하는 이유를 책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너그러운 존재로 창조하시고, 너그러이 품으셨기 때문이다. 둘째, 너그러움을 경험한 우리를 통해 우리 곁의 이들이 너그러움을 경험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만 하시는 분으로 오해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 또한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그러움을 경험했다면, 그 너그러움은 반드시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렇게 너그러워지고자 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는 될 수 없으며, 믿음 없이는 베풀 수 없는 것이 이 책이 말하는 ‘너그러움’이다.

어느 날, 큰아들 녀석이 정오가 되도록 지친 채 자고 있는 나를 깨우며 말했다. “아빠, 제발 놀아 주면 안 돼?”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아빠와 놀아 달라는 아이의 말에 ‘제발’이 섞여 있다니. 나는 나를 몰아붙이며 무엇을 희생시키고 있는지 깨달았다. 무능한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정작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놀아 주는 것에 무능했던 아버지를 아이의 ‘제발’ 섞인 큰 눈망울에서 발견했다.

너그러워지는 것, 그것은 나 하나의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사치스러운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품고자 한다면, 먼저 나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 나를 너그러움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 믿음으로 나에게 너그러울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너그러움 속에서 각자의 너그러움을 누릴 수 있다. 내 아버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 현실의 내몰린 삶에서 아버지께 어떤 위로도, 너그러움의 터도 되어 드리지 못했다는 죄스러운 마음과 함께.
 
IVP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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