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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새로운 신학’은 가능할까?(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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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책 『천상에 참여하다』한스 부어스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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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겨울 어느 날, 새벽 6시라는 이른 시간 베를린 대학교의 대형 강의실은 600명이 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길고 춥기로 유명한 베를린 겨울의 냉랭한 공기마저 데울 듯 지적 열정으로 달궈진 학생들 앞에 서 있던 40대 후반의 교수는 교회사에 길이 남을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바로 베를린 대학교의 인기 교수이자 프로이센의 대표 지성인 아돌프 폰 하르나크(Adolf von Harnack, 1851-1930)였다. 이후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강의에서 하르나크는 교리의 발전은 복음의 헬라화과정이며, 나사렛 예수의 설교에서 복음의 원천을 탐구함으로써 비교리적 기독교로 되돌아가기를 주장했다. 19-20세기 전환기에 이뤄졌던 기념비적 강의는 이전 세대의 신학적 업적을 정리하고, 이후 신학의 발전을 가늠하게 할 역사적 분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신학은 하르나크의 관점에서 보자면 몹시 기이한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심지어 교리의 발전사를 기독교의 헬라화라고 부르던 저명한 독일 신학자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초기 교회가 이룩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종합을 현대 기독교가 회복해야 할 위대한 전통’(Great Tradition)으로 간주하는 시도마저 유럽 곳곳에서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20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젊은 가톨릭 신학자들은 팍팍한 합리주의와 경직된 전통주의 신학에 대한 대안으로 초자연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되찾으려 했고, 결국은 성서와 교부 문헌을 학문적 엄중함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읽어 내는 새로운 신학’(nouvelle théologie)을 일으켰다. 이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장기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근대의 주지주의와 과학주의에 길들어 버린 현대인의 마음에 신비를 향한 동경과 감각을 되찾아 주는 신학적 울림이 깊고도 멀리 퍼졌다. 결국, ‘새로운 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중요한 신학적 추동력이 되었고, 이후에도 가톨릭의 계속된 개혁에 크게 이바지해 왔다.


새로운 신학을 이끌던 초기 프랑스어권 신학자 대부분은 20세기 후반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은 탈근대 시대에 혼란을 겪고 있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 모두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프랑스어라는 언어적 장벽과 (사람마다 교회마다 정도 차는 있겠지만) 개신교에 널리 퍼진 가톨릭 신학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우리말로 나온 저작 중에는 아직 새로운 신학에 대한 제대로 된 개괄적 소개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미국 나쇼타 하우스(Nashota House)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스 부어스마(Hans Boersma, 1961- )천상에 참여하다(Heavenly Participation, 원서 2011)는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에 혼란함과 씁쓸함을 느끼는 모두에게 큰 울림과 공감을 끌어낼 매력으로 채워진 작품이다.


 

왜 지금 새로운 신학인가?

 

부어스마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서 자라 개혁파 교회 목회자로 수년간 활동했던 신학자다. 캐나다로 이주한 그는 약 20년간 트리니티 웨스턴 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sity, 1999-2005)와 리젠트 칼리지(Regent College, 2005-2019)에서 가르치면서, 한편으로 개혁파 신학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에 노력을 쏟았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신학으로 대변되는 성례전적 존재론’(sacramental ontology)을 재발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국내에도 이미 출간된 십자가, 폭력인가 환대인가(Violence, Hospitality, and the Cross, 원서 2004)가 전자의 대표적 예라면, 이번에 번역된 천상에 참여하다는 후자의 관심사가 잘 반영된 저서다.


사실 새로운 신학은 그 유명세나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한국뿐만 아니라 영어 사용권 신학에서도 여전히 친숙하지 않은 주제라 할 수 있다. 일례로 새로운 신학의 대표 사상가인 앙리 드 뤼박의 중요 저작 중 일부는 그의 생전에 영어로 번역되었지만, 상당수의 대표작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영어 사용권 독자에게 소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파 신학을 넘어 교부학으로 연구 주제를 넓혀 가던 부어스마가 2009년에 새로운 신학과 성례전적 존재론(Nouvelle Théologie & Sacramental Ontology)이라는 연구서를 집필하자, 이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 학계의 호의적 평가가 곧 뒤따랐다. 이듬해 그는 연구서에서 보여 줬던 정밀하고 방대한 학술적 논의를 일반 독자특별히 복음주의자를 위해 압축하고 이를 현실적 주제와도 접목한 천상에 참여하다를 출간했다.


두껍지 않지만 속은 꽉 찬 이 책은 드 뤼박 외에도 장 다니엘루, 앙리 부이야르, 마리도미니크 셔뉘, 이브 콩가르 등 새로운 신학의 대표 신학자들의 기여를 시대적 맥락과 함께 선별하여 소개한다. 또한, 이들이 되찾으려던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이 왜 오늘날 주목해야 할 위대한 신학적 유산인지도 예리한 필치와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설명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특별한 가치는 저자가 현대 가톨릭 신학자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는 데 만족하지 않고, 성례전적 존재론과 결부된 여러 주제를 놓고 종교개혁자와 칼 바르트, C. S. 루이스, 케빈 밴후저, 제임스 K. A. 스미스 등 친숙한 개신교 사상가와도 비판적 대화를 전개한다는 데 있다. 이로써 서로 다른 종교 전통에서 오는 낯섦과 경계를 넘어서는 상호 배움과 성숙의 기회가 이 한 권의 책에서 매우 충실히 마련되고 있다.


 

성례전적 존재론, 이에 대한 가톨릭, 자유주의, 복음주의의 협공

 

19세기 이후 개신교에서 자유주의와 복음주의가 근대성의 도전에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였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이성이나 경험을 전통의 권위보다 앞세우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유사한 방식으로 전유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부어스마는 둘 사이의 특이한 공통점을 하나 덧붙인다. (신칸트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와 (성서중심주의를 내세우는) 복음주의 모두가 기독교 사상에서 오랫동안 핵심적 위치를 차지했던 플라톤주의를 극도로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가톨릭 신학에서 플라톤주의를 한결같이 숭상했다고 섣불리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근대성을 심각한 위협이라 느꼈던 19세기 말 가톨릭교회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주지주의화·교리주의화하면서 신토마스주의(혹은 신스콜라주의)를 주도적 신학으로 공식화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20세기로 넘어오며 프랑스어권 젊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학과 일상에서 신비의 위치를 되찾고자 플라톤주의를 동반자로 삼던 교부 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새로운 방법과 형태를 가진 신학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근원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중반 활동하던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복음주의를 배경으로 성장한 부어스마마저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이 이루어졌던 위대한 전통으로 되돌아가기’(ressourcement)를 오늘날 촉구하고 있는가? 왜 이들은 기독교와 현대 문명이 봉착한 위기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플라톤주의가 신학에서 추방된 역사를 주목하는가? 부어스마의 논지를 살려서 간략히 답하자면, 기독교인은 지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늘에 참여하기를 갈망하고, 천상적 삶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함으로써 현실을 차별화되게 살아 내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지 머릿속 이상으로 그치지 않고 시공간 속에서 현실화하는 근본 이유는, 하늘과 땅을 잇고 신적 본질과 인간적 본질을 연합한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태초에 우주가 존재하였고,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써 온 창조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화하였다. 이 놀라운 신비를 달리 표현할 언어와 논리가 영글지 않았을 때 초기 교부들은 자신들의 성서 주석을 기반으로 플라톤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였고, “주변의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선하심과 아름다움”(p. 14)을 보게 하는 실재 이해를 끌어냈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이상을 꿈꾸고 현실화할 수 있었던 것은 고대 교회에서 기독교와 플라톤주의가 조화를 추구하면서 성례전적 존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성례전적 존재론에서는 창조 세계가 그 근원이자 준거점이신 하나님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 존재하며 그분 안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참여적 혹은 성례전적 존재론에서는 사도행전 17:28과 같은 본문에 의거해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한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실재에 대한 그런 전망에서는 골로새서 1:17을 근거로 모든 피조물의 진선미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Logos) 안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연결은 참여적 혹은 실재적 연결이다. (pp. 48-49)

 

고대에서 중세 전기까지 지속했던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 즉 위대한 전통은 성례전적 존재론이 뿌리내리고 자라기에 비옥한 토양이었다. 하지만 중세 성기 이래 근대화와 함께 탈성례화 과정이 서서히 진행되다, 결국 과학적 지식이 인류의 세계 이해의 주도적 모델이 되면서 세계 속의 신비를 보던 마음의 습관은 잊혀 갔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제동을 걸고 세계를 보는 대안적 지혜를 찾던 부어스마는 새로운 신학에서 위대한 전통으로 되돌아가게 도와줄 풍성한 자원을 발견한다. 다만 오늘의 상황에서 고대 기독교를 모델로 삼자고 주장하려면 먼저 플라톤주의에 대한 오해를 교정할 필요가 있다.


첫째, 부어스마는 플라톤주의의 이상화된 내세 개념이 현실 세계와 절대적 대립 관계에 있다거나 개별자의 다양성을 억압한다는 얄팍하고 대중적인 비판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눈과 귀를 씻기려 한다. 이를 위해, 그는 하늘과 땅의 거리를 추상화하는 이원론에 빠지지 않고 천상적 참여는 지상의 삶이 천상적 차원을 지님”(p. 22), 달리 말하면 땅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고 활동하시는 장소임을 보여 줄 신학적 논의를 풍성히 차려 놓는다.


둘째,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에 반기를 든 사람은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명언을 남긴 테르툴리아누스 이래 교회사에 계속해서 등장했다. 하지만 소위 이교도철학인 플라톤주의를 마주하면서 위대한 전통을 형성하려던 교부들에게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비판의 근거이자 종합의 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론이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성례전적종합이 이루어지기 어렵거니와, 더욱 고차적인 개념으로서 조화를 이뤄 줄 기독론적 닻이 없다면 플라톤주의와 성서적 신념은 표층 논리 차원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플라톤주의-기독론적 종합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어느 정도 불식시켰다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위대한 전통이 그토록 위대했다면 어떻게 그 전통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쇠퇴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고대 혹은 중세 성기에나 가능했던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이 탈근대적 상황에서 어떻게 재현될 수 있는가? 사실 이 두 질문은 천상에 참여하다의 전체 개요를 구성하는 두 주제이기도 하다.


 

성례전적 존재론의 형성, 쇠퇴, 그리고 재발견

 

천상에 참여하다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기독교와 플라톤주의의 종합으로 형성된 성례전적 존재론의 기원과 역사를 1세기(신약성서 시대) 이후 고대, 중세, 종교개혁 시대를 가로지르며 설명한다. 후반부는 기독교 신학과 실천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성만찬, 전통, 성서 해석, 진리, 신학의 개념을 성례전적 존재론을 통해 복음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공교회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우선 부어스마는 태피스트리(tapestry)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기독교와 플라톤주의가 씨줄과 날줄을 엮어 만든 위대한 전통이 등장하고 발전하다 결국 쇠퇴하는 과정을 지성사적으로 조망한다. 특별히 그는 플라톤과 비교할 때 자연에 관심을 더 기울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중세 성기에 유럽에서 유행하며 성례전적 존재론이 약화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이후 플라톤주의 형이상학 자체를 해체한 유명론이 중세 말기에 퍼져 나가며 성례전적 존재론이 주변화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분석한다. 심지어 그는 종교개혁이 찢어진 태피스트리를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 개신교는 탈성례화라는 비극적 유산을 안고서 지금까지 왔다고 주장한다. 이는 종교개혁을 중세 말기의 타락상을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극복한 위대한 사건으로 보는 개신교의 일반적 입장과는 몹시 다른 역사 읽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현 상황에서 복음의 생동력과 적절성을 되찾으려 탈근대(postmodern) 사상을 전유하려는 최근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노력 역시, 위대한 전통의 상실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간과한 채 동시대의 문화적 경향에 피상적으로 반응하려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부어스마는 어떻게 끊어진 실을 다시 연결하여 기독교와 플라톤주의의 태피스트리를 짜느냐는 문제로 논의를 옮긴다. 이를 위해 천상에 참여하다후반부는 성만찬, 전통, 성서 해석, 진리, 신학을 재구조화하려는 시도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그는 개신교에 만연한 기념설과 가톨릭의 공식화된 화체설을 넘어서는 성례전적 식사로서의 성만찬이해를 제시함으로써, 위대한 전통에서 형성되었던 성례전적 존재론을 회복하려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전통에 대한 무지와 경직화된 이해를 넘어서는 성례전적 시간으로서의 전통을 추구하고, 문자주의의 위험과 과도한 알레고리화를 피해 가는 성례전적 실천으로서의 성서 해석의 가능성을 질문하며, 신앙주의와 주지주의의 대립을 초월하는 성례전적 실체로서의 진리를 찾아가고, 관상과 행동의 조화를 지향하는 성례전적 훈련으로서의 신학을 제시한다. 이러한 다층적 논의는 하늘과 땅을 통합하는 유일한 존재인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충만함이 현존하는 몸인 교회에 대한 값진 성찰로 종합되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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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위엄에 참여하기

 

세계에 대한 탈성례화가 가속화되던 시대에 활동한 영국의 시인이자 예수회 사제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44-1889)세상은 하나님의 위엄으로 충만하다”(The world is charged with the grandeur of God)라는 아름다운 시구를 남겼다. 우리가 보든 못 보든, 혹은 인정하든 안 하든 세상에 하나님의 위엄이 가득하다는 사실 자체는 취소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늘과 땅, 신비와 자연, 기도와 노동을 분리해서 보는 데 익숙해진 우리의 습관을 교정해 주고, 변화하는 창조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소진되지 않는 위엄을 보고 이에 참여하게 하는 성례전적 존재론을 품은 신학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개신교에도 훌륭한 자원이 많은데 왜 굳이 부어스마가 가톨릭의 새로운 신학의 도움을 받으려 했는지에 의문을 표하는 독자도 있으리라 예상한다. 또한, 기독교의 정체성과 실천을 구성하는 다섯 핵심 개념(성만찬, 전통, 성서 해석, 진리, 신학)을 하필이면 오직 성서가 아니라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을 통해 재구성했다는 사실도 일부 복음주의자에게는 도전으로 다가올 것이다. 심지어 고대와 중세에는 성례전적 존재론이 중요했다 하더라도, 이를 오늘날 회복한다고 하여 후기세속화 사회에서 교회가 겪고 있는 전례 없는 혼란과 문제를 극적으로 해결하게 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부어스마의 글을 읽을 때 뒤따를 수도 있는 이 어색함, 거부감, 의심은 백신 접종에 뒤따르는 일종의 면역 반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반응을 거쳐 천상에 참여하다에서 제시하는 현대의 위기 상황 진단과 그에 대응하는 처방에 공감하기 시작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면역 반응으로 겪었던 증상을 충분히 압도하리라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위대한 전통이 빚어낸 성례전적 존재론은 종교개혁의 비극적 분열보다 앞선다”(p. 281)는 것을 현대 그리스도인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묵직한 도전을 던진다. 이런 시각에서 평가하자면 플라톤주의-기독교적 종합은 단지 잃어버린 옛 유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종교개혁이 남겨 둔 미완의 과업을 완수하게 도와줄 핵심 자원으로 돌아가려는 급진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제안을 아름답고도 우아한 신학의 세계와 함께 소개받는다는 것은 천상에 참여하다이전에 어떤 책에서도 쉽사리 맛보지 못한 특별하고도 만족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부교수

IVP 2021-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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