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 서평

『특강 전도서』북리뷰(이광형)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링크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본문

글 ​이광형

『특강 전도서』권지성 지음



5b9e51bc17fca94ba6ad8522b719c3d2_1618967320_25.jpg

                                                                                   허무, 죽음. 기쁨에 관한 모놀로그




1. 전도서는 어렵다.

 

약, 4년 전쯤 전도서 클래스를 청강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전도서 전체를 원문으로 읽게 되었는데, 그 수업은 전도서 본문을 꼼꼼히 읽고, 주석하는 수업이었다. 그 수업에서 전도서를 읽으며 느꼈던 첫 감정은 “전도서가 이렇게 어려운 책이었는가?”였다. 무엇보다 전도서의 문장들이 참 어려웠다. 번역을 하고서도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전도서를 읽을 때, 다양한 한국어 역본을 꼭 비교하면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전도서 3장 11절을 보자.

 

개역성경: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새번역: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공동번역개정: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을 주셨지만..

번역이 이렇게까지 다르다는 것은 전도서의 원문으로부터의 해석에 상당한 여지가 있다는 뜻이 된다. 사실 개역성경을 대부분 알고 있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이 문장 속에서 어떤 교리적(교의적) 체계를 찾아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번역본들을 펴 보면, 곧바로 의미를 쉽게 결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특정한 교리적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쉬운 작업이 아님을 알게 된다. 번역본마다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원문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특강 전도서』 같은 책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왜 『특강 전도서』를 ‘이런 방식’으로 썼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2. 저자와 책의 위치

 

이 책의 저자인 권지성 박사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저자를 알게 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의 전작, 『특강 욥기』를 꽤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특강 욥기』보다 더 학술적(전문적)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주석에 가까운 전도서 해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저자는 지면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전도서 본문을 주석하고, 히브리어 문장의 본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다. 그것은 『특강 전도서』가 (당연하게도) 혼자만의 자의적 해석이 아니며, 전도서와 관련된 성서학자들과의 학문적 대화가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때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학자들과의 대화다. 우리는 만나 보지 못한 학자들과 글을 통해 대화한다.

 

한편, 이 책은 전문 주석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저자가 중간중간 전도서의 여러 메시지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적용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저자는 각 장 끝에 ‘적용’ 부분을 둠으로써 전도서에서 희미하게 드러내는 주전 3세기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맥락과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사실 책 한 권에 주석과 해석 모두를 담아내기란 쉽지 않다. 주석은 본문의 본래 의미를 드러내는 전문적 작업이지만 현재와의 대화가 약할 수 밖에 없고, 묵상이나 설교집은 오늘날에 적용하는 데는 강할지 몰라도 본문의 본래 세계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각 장 말미에 적용 부분을 둠으로써 주석과 해석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적용 부분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저자가 국내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적용은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최근 십여 년(혹은 백여 년) 사이에 벌어진 국내(외)의 사회적 문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특강 전도서』는 요즘 SNS에서 많이 주워 듣는 용어인 ‘공공신학’을 성서학과도 접목시킨 하나의 실례가 아닐까 싶다.

 

 

3. 책의 구성

 

이 책은 먼저 앞부분에서 전도서에 대한 개론적 설명을 전개하는데, 이 부분이 참 중요하다. 많은 독자는 전도서를 잘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전도서에 대해 먼저 제시하는 해석학적 렌즈를 잘 착용하고 본문에 임할 필요가 있다. 앞부분에서는 먼저 전도서 전체의 문학적 구조를 제시하며, 매 장을 시작할 때에도 각 단락의 문학적 구조를 제시한다. 이 문학적 구조를 세심하게 살피기를 권한다. 동시에 저자는 매 장을 시작할 때마다 각 단락의 큰 그림을 그려 주는데, 이 부분도 반드시 잘 읽고 지나가야 한다. 또한 성경을 옆에 두고 저자가 제시한 전도서의 단락들을 먼저 읽는 것 역시 필수다. 전도서의 내용이 머릿속에 없는 상태에서 『특강 전도서』를 읽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강 전도서』에서는 본문 해설 부분에서 히브리어를 계속해서 다루고, 또 다양한 한국어 역본과 영어 역본을 계속해서 비교하는데, 이 작업은 읽는 사람에 따라 어려울 수도,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전도서이기에 이런 해설은 참으로 중요하다. 전도서의 히브리어 문장 자체에 모호한 면이 많고, 본문 비평의 결과를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나 해석이 나올 여지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특강 전도서』를 읽으며 성경 본문을 수없이 번갈아 가며, 또 골몰히 생각하면서 읽었다. 독자들 역시 이 책을 빠르게 읽기보다 먼저 전도서 구절들을 읽고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그런 다음 이 책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특강 전도서』의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4. 전도서에 대한 호기심과 읽기 어려움

 

많은 이가 전도서를 솔로몬 노년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자들이 한 번이라도 신학교에서 구약 원전 강독 수업을 경험해 본 상태에서 전도서를 원문으로 읽는다면, 곧바로 이런 느낌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이질적이다.

 한국어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전도서의 낱말들은 다른 구약성서와 다른 점이 많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구약의 다른 책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전도서에만 등장하는 히브리어 낱말이 꽤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코헬렛’(קהלת)을 번역한 ‘전도자’라는 말이다. 코헬렛은 전도서 밖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또 하나는 전도서 1:3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이트론’( יתרון)을 번역한 ‘유익’이라는 말이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수고가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문장에 사용되는 어구다. 이트론 역시 전도서에서만 10번 나오는 독특한 낱말이다. 그 외에도 페르시아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이는 낱말들, 아람어 같은 낱말들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이 책의 저작 시기가 솔로몬의 시기와는 관련이 없음을 직감하게 된다.

 


4.1. 전도서는 언제 쓰여졌나?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것은 저자가 책의 시작부터 전도서의 저작 시기를 기원전 3세기로 못 박아 놓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성서학자들은 책의 최종 편집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하기를 조심스러워 하는 경향이 많은데, 먼저는 연대를 확증하기가 쉽지 않으며, 둘째는 특정 시기를 못 박으면 다양한 반대 공격의 여지를 남겨 놓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책의 저작 시기를 과감하고 분명하게 결정할 때 주는 장점도 분명히 있다. 바로 그 책을 특정 역사적 시기의 렌즈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오래전 알베르츠(R. Albertz)의 대작 『이스라엘 종교사』를 읽었을 때 비슷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알베르츠는 본문의 연대를 자신의 날카로운 통찰로 확정하고 그 프레임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해 나간다. 물론 때때로 그의 역사적·사회적 재구성이 과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감성이 본문 전체를 통전적으로 꿰뚫어 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다양한 해석학적 렌즈를 갖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저작 시기를 못 박고 시작하는 적극성은 때때로 모호한 본문을 특정 역사의 빛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해 준다.

 


4.2. 전도서의 화자, 편집자

 

전도서에는 편집자(혹은 최종 저자)의 말처럼 보이는 3인칭 본문이 있고, 화자가 직접 ‘나’라고 말하는 1인칭 본문이 있다. 그리고 책의 끝부분에 또 다시 에필로그처럼 덧붙인 말들이 있다. 즉, 전도자가 직접 말하는 본문과 그 전도자의 말을 모아 놓은 편집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책의 끝부분인 12:9부터 전도자를 3인칭으로 다시 언급하는데, 이 부분은 코헬렛(전도자)이 1-12장까지 말했던 진술들을 제3자가 평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12:12-14에는 추가된 부분이 또 나타나는데, 이것이 앞의 편집자와는 또 다른 제2의 편집자의 말인지 아니면 코헬렛 본인의 말인지 단정짓기 힘들다. 특히 이 에필로그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이 부분을 권지성 박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따라가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어쨌든 『특강 전도서』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 저자들을 구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알게 되면 전도서가 더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며, 전도서의 결말에도 다양한 여지를 둘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5. 특강 전도서가 주는 이트론


5.1. 헤벨: 헛되고 헛되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조명하게 되는 것은 바로 헛됨, ‘헤벨’이 아닐까 싶다. 전도서를 유명하게 만든 구절이 바로 ‘헛됨’이다. 그런데 이 헛됨의 히브리어인 헤벨은 결코 어느 하나의 단일한 의미로 번역할 수 없는 넓은 의미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헤벨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중요하다. 저자는 책의 1장에서 다양한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헤벨의 의미를 추적한다. 헤벨의 기본 의미 영역은 ‘수증기, ‘호흡’이다. 헤벨은 마치 우리의 시야 속에 분명히 있는 수증기처럼 존재하지만 금세 언제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춘다. 그런 점에서 헤벨은 안개로도 번역된다. 즉 전도자가 헛되다고, 헤벨이라고 말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물리적 현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의미장으로부터 헤벨은 공허, 헛됨, 일시적임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저자는 헤벨의 의미로 인해 전도서가 염세주의에 관한 책으로 오해되는 것을 경계한다. 저자는 전도서에서 삶이 헤벨임을 강조하는 이유를 헛된 삶의 허상들과 세상의 부조리들을 드러내어 참된 행복과 만족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제시하기 위함이라고 책의 서두에서 역설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는 말은 종교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기존의 신명기적 혹은 잠언의 전통에서 한걸음 떨어지되, 어떤 방식으로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지 배우게 된다.

 

 

5.2. 죽음, 심판, 여호와 경외

 

전도서는 지혜서 장르에 속한다. 전도자 코헬렛은 그가 가진 지혜를 사용하여 헤벨이 아닌 이트론(유익)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러나 지혜자든 어리석은 자든, 의인이든 악인이든 결국 한 길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지혜로움이라는 빛도 덮어 버린다. 저자는 전도서에서 운명, 우연,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계속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전도서의 지혜는 잠언의 지혜와 결이 매우 다르다.

 

전도서는 또한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전도서를 읽으면서 전도서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전도서를 우리가 가진 전통적 신앙관에 대입하여 내세적 천국, 하나님 나라 등의 개념과 무의식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보면서 피안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전도서가 말하는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 개념은 ‘여기서 안되면 천국 가면 되지’가 아니다. 사실 구약성서는 내세로 승부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땅의 삶으로 승부하려고 한다.

 

혹자는 전도서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메시지로 결말을 맺기에 결국 전도서는 잠언과 비슷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권지성 박사는 잠언의 지혜와 전도서의 지혜 개념이 다르듯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메시지 역시 다른 맥락에 있음을 역설한다. 잠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복을 받고 잘되리라 약속하지만, 그것은 전도서의 이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코헬렛이 보았던 현실 세계는 경외자에 대한 상급이 전혀 실현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인과응보의 원리가 역전되어 발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코헬렛의 경외 사상은 잠언의 그것과는 다르며, 저자는 코헬렛이 말하는 경외의 정서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심’과 관련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도서의 하나님 경외’를 공포심’이라는 키워드로 끄집어낸 것은 저자 고유의 탁월한 통찰력이 아닐까 싶다. 코헬렛이 말하는 경외는 하나님의 계획을 감히 인간이 변경할 수 없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의 결정 아래에서의 두려움이다.

 

 

5.3. 전도서와 로마서

 

이 책의 결론부까지 읽고, 한숨을 돌리려는데, 나가는 말이 나왔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덮을 수 있겠지 하며 페이지를 넘기다가 ‘무야호!’를 외쳤다. 책의 끝에서 저자가 전도서를 신약과, 그것도 로마서와 탁월하게 연결했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다른 구약성서와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다. 저자는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전도서의 빛으로 비추어 주는데, 책의 끝에서 진한 감동이 다가왔다. 우리는 전도서를 통해 로마서에서 바울의 대담성을 확인한다.

 

 

6. 나가며: 이 책을 쓰기 위해 수고했던 그 모든 수고가 우리에게 무슨 <이트론>이 되는가?

 

이 책은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과도하게 연구하듯 읽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지나치게 열심을 내지도 말고, 너무 가볍게 읽지도 말아야 한다는 전도서의 문장들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너무 열심히 읽은 것 같으니 아직도 이 세계의 ‘헤벨’을 모르는 듯하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이트론이 있다면, 그 전에 읽었던 다른 지혜서, 전도서 관련 책들을 다시 한번 들추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주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도서를 더 알고 싶어졌다. 전도서는 다른 성경들과 결이 다르다. 보수 신학에서 좋아하는 구속사적 읽기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까? 과연 구속사로 전도서를 꿰뚫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헛되어 바람을 잡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5b9e51bc17fca94ba6ad8522b719c3d2_1618966900_34.jpg


 

* 전도서 및 『특강 전도서』를 더 궁금하게 만들어 줄 팁

 

1) 코헬렛, 왕의 트라베스티

 

트라베스티(travesty)는 왕으로 가장하여 행세하며 벌이는 일종의 역할극을 말합니다. 전도자(코헬렛)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전도서를 읽어 보면, 이 전도자 코헬렛이 누구인지는 모호합니다.

 

코헬렛은 전도서 1:12부터 갑자기 왕의 복장을 하고 상념에 잠기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 배역을 연기하면서 과연 왕이라는 자리를 통해 그의 삶에 권력, 명망 그리고 재산을 이어 갈 수 있을 것인지 골몰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도자 코헬렛은 실제 최종 저자(편집자)가 만들어 낸 페르소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전도서 안에서 코헬렛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도서 일부분에서 그를 솔로몬처럼 생각할 여지가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2) 코헬렛은 여자인가?

 

코헬렛이란 말 자체는 히브리어 여성분사 형태입니다. 그러나 전도서 안에서 코헬렛은 항상 동사를 남성으로 받습니다. 즉 문법적으로는 여성 형태를 띠지만, 동사는 남성으로 받으니 어원적으로 모호함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도서 7:27에서는 유일하게 ‘전도자가 말했다’라고 할 때 동사를 여성형으로 받습니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이러한 혼용은 코헬렛이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겠다는 여지를 남깁니다. 만약 코헬렛이 여성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그 순간 코헬렛은 마치 잠언 8장에 나타난 신적인 지혜 여인으로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히브리어 성경 BHS에서 소마소라를 확인해 보면, 고대의 마소라 서기관들은 전도서에서 ‘코헬렛’이라는 말이 6번 나온다고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BHS의 다음 버전인 BHQ의 소마소라에서는 ‘코헬렛’이 5번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7:27의 여성형을 제외시키고 싶었던 것일까요?

 

3) 코헬렛은 직위였을까?

 

전도서 12:8에는 코헬렛의 형태에 정관사가 붙은 형태로 나옵니다. 정관사가 붙은 형태까지 치면, 실제로 전도서에서 코헬렛이라는 용어는 7번 나오는 셈입니다. 히브리어는 고유명사에 정관사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 코헬렛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의 직위를 의미하는 것이었을 까요? 만약 7:27에서 전도서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동사를 여성형으로 받지 않고, 서기관의 실수로 본다면, 동사에서 여성형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알파벳 헤(h)를 코헬렛의 앞부분으로 붙일 수 있습니다. אמרה קהלת 가 아니라 אמר הקהלת 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었을 때, 7:27의 코헬렛은 12:8과 같이 정관사가 있는 형태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BHQ의 소마소라가 코헬렛이 왜 5번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4) 메길로트의 주인공은 여성들이다

 

우리가 보는 한국어, 영어 성경이 아닌 본래 히브리 성경의 형태는 책 배열의 순서가 다릅니다. 히브리 성경은 메길로트라고 부르는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책들이 있는데, 한국어 성경과는 다르게 히브리 성경의 순서는 룻기-아가-전도서-예레미야애가-에스더입니다.

 

그런데 이 메길로트는 흥미롭게도 모두 여성단수 형태를 주인공으로 갖습니다. 또한 메길로트의 첫 번째 책인 룻기 바로 앞에는 잠언이 있는데, 잠언에는 한 젊은 여인으로서의 지혜가 있습니다. 잠언에서의 여성 지혜는 신적 지혜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들은 전도서의 코헬렛을 더 궁금하게 만듭니다.

 

이 책을 읽으며, 죽음을 목전에 둔 코헬렛이 과연 어떤 사람일지 함께 유추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광형

시온의교회 담임목사 / 구약학 박사과정(Ph.D)



IVP 2021-04-21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