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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즉흥 연주의 절묘한 하모니(백지윤) - 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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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지윤

책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함께 읽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할 두 책,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과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얼마 전 같은 시기에 출간된 번역서 두 권의 역자 증정본이 이번엔 배 대신 DHL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다.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과 BST 시리즈 『예레미야애가』 이렇게 두 권이다. 번역을 몇 권씩 한꺼번에 하지는 않는데, 출판사의 출간 일정에 따라 간혹 이렇게 겹쳐 나와서 열일하는 번역가처럼 보일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최근 작업한 책들은 각기 다른 저자들에게서 나왔음에도 책들 자체로 세트를 구성하듯 내용이 연결된다. 작업하면서 개인적으로 심화된 이해와 묵상으로 이어지니 좋다. 혹시 편집부의 큰 그림이었던 걸까. 여하튼, 일하면서도 은혜와 도전을 받을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그리고 일감인데도 은혜가 된다니, 도대체 얼마나 꼭 읽어야 할 좋은 책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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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자본의 지배에 맞선 기독교 신앙의 비전 / 기독교는 정말 세상을 살 만하게 하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예레미야애가』가 요즘 마무리 작업 중인 티시 워런의 책(가제는 “밤에 드리는 기도”)과 콤비처럼 잘 어울린다면(두 권 모두 기본적으로 신정론 문제를 다룬다), 여기에 뒤지지 않는 막강 세트가 또 있다. 바로 내 마음속 닮고 싶은 (그러나 분명 넘사벽일) 그녀로 등극한 캐스린 태너의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역시 비교적 최근 번역서가 출간된 미로슬라브 볼프와 매슈 크로스문의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이다. 태너와 볼프 모두 예일에서 가르치는 분들이기도 한다(얼마나 친하신지는 모르겠다). 영 다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두 책이 왜 상하권으로 맺어져야 한다는 건지,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일단 짧게 말하면, 볼프와 크로스문의 책이 말하자면 신학의 미래를 추상적으로 논한 ‘띠오리’라면, 태너의 책은 그 띠오리에 대한 충실한 ‘임바디먼트’다. 볼프와 크로스문이 신학자들은 신학을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태너는 이미 그런 식으로 신학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볼프와 크로스문은 하나님의 집이 된 사람과 세상이라는 상상력 넘치는 새 창조의 비전을 기독교가 세상에 주어야 할 좋은 삶의 혹은 번영의 비전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독교의 비전이 포괄하는 전 인류와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규범적 보편타당성을 담보하면서도 개인과 사회의 개별성 혹은 진정성을 존중할 수 있는(해야 하는) 방식으로서 즉흥 연주 모델을 사용한다. 우리 존재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원형 혹은 원곡 연주를 기반으로 하되 자신들의 시대와 공동체의 문화적 고유성에 비추어 그 연주를 새롭게 해석하여 들려주는 것이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이 했던 일이자, 이 시대의 기독교 신학자들 역시 여전히 이어 가야 할 임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런 임무를 잘 수행한 예를 들면서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C. S. 루이스, 위르겐 몰트만 등과 함께 캐스린 태너의 이름을 그 목록에 올린다.

 

그러니까 나는 낯선 태너의 이름을 볼프 책을 번역하면서 처음 접하고선 바로 이어서 그녀의 책을 작업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왜 볼프가 감히 그녀의 이름을 이런 어마무시한 목록에 끼워 넣었는지 책을 작업하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에 실린 한 페이지가 넘는 고세훈 교수님의 추천사를 읽어 보니, 나와 비슷하게 느끼셨나 보다.

 

놀랍게도 태너는 조직신학자다. 가장 추상적인 기독교 교리를 (보통은) 현실과 가장 동떨어진 순수 철학적 방식으로 다루는 신학 분과의 전문가가 현대 사회, 그것도 경제에 관해 이토록 제대로 그 이론과 현상을 꿰고 있는 것도 모자라 철저하게 복음적인(고세훈 교수님은 복음에 투철하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태너에게 딱 제격인 묘사다) 시각으로 그것을 뚫고 분해해 버리다니. 그러고선 복음의 진리에 기초하여 세상을, 더 정확하게는 우리의 경제생활을 보고 이해하는 대안, 생명이 움트게 하는 완전히 새로운 틀, 그로 인한 ‘파격적 변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005년에 나온 이전작 Economy of Grace를 포함하면) 자그마치 10년이 넘는 시간을 자신에게는 새로웠을 분야를 읽고 공부하며 연구에 투자한 결과다. 그 투지와 성실함 자체로도 신학자들, 또한(특히) 목회자들에겐 신선한 도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속 세계 금융 위기는 수백만의 일상을 탈탈 털어 갔고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의 삶의 지형을 크든 작든 바꾸어 놓았는데, 정작 그 원인과 본질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가계부 쓰는 일도 몇 달씩 미루는 나로서는 CDO니 트랑슈니 하는 경제 용어들이 너무 낯설어 번역하는 내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 라디오에서 쉽게 듣는 무신용자 자동차 할부 구매 광고가 다르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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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물을 것이다. 자본주의, 금융, 이런 거대한 구조의 문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구체적 대안이나 해결 방안이 뭔가. 결국 베버의 ‘종교적 믿음의 실제 효력에 관심을 갖는 인문학적 방법론’을 상당 부분 공유하는 태너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떤 의미에서 교과서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 즉 ‘종교적 개념’이다. 다만, 그 개념을 아주 제대로 알려 준다는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단단한 현실에 비추어 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투철하다는 의미에서 여느 따분한 원론적인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그처럼 잘 알려 준 종교적 개념을 우리의 믿음으로 살아 내는 것, 볼프식으로 말하자면 태너의 탁월한 즉흥 연주를 통해 매개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원곡 연주를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의 해석으로 즉흥 연주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기독교의 규범적 비전은 현실의 파격적 변혁을 불러올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온 창조 세계를 아우르는 새 창조의 비전이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의 비전으로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결국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수립하고 형성하는 기독교의 믿음, 그 종교적 개념으로 돌아온다. 곧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를 제대로 아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볼프-태너 책을 세트로 읽어 보라고 감히 권하고 싶다.




백지윤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미술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서 기독교 문화학을 공부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면서, 다차원적이고 통합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 종말론적 긴장, 창조와 재창조, 인간의 의미 그리고 이 모든 주제에 대해 문화와 예술이 갖는 관계 등에 관심을 가지고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손에 잡히는 바울』『알라』『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 시편』『이것이 복음이다』『모든 사람을 위한 신약의 기도』『오늘이라는 예배』『BST 스가랴』『일과 성령』(이상 IVP) 등이 있다.


IVP 202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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