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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음식을 먹기 위한(고전 3:2) 성경공부 교재로서의 단권 주석(김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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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선용

『IVP 성경비평주석 신약』존 M.G. 바클레이, 리처드 보컴, 스캇 맥나이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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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수많은 성서학자의 노력이 교회 현장의 성경공부에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는 상황을 볼 때마다, 특히 요즘처럼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소금처럼 되어버린 한국교회를 볼 때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왈칵 다가온다.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받아들이는 개신교 전통의 관점에서는 한국교회의 실패와 퇴행을 결국 성서 읽기에 실패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서학과 교회 현장의 성서 읽기 사이에 이토록 큰 간격이 생긴 이유는 간단하다. 전문적인 학술 주석은 수세기 동안 켜켜이 쌓인 갑론을박을 정리하고,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본문을 치밀하게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어, 오랜 시간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아예 독해조차 어렵고,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쓰인 입문서들 역시 다소간 진입 장벽이 있어 여간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권 주석은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획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서양에서 훌륭한 단권 주석이 몇 권 출간되었는데, 그중에서 이 주석은 학문성 및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다. 원서는 미국의 어드만스(Eerdmans) 출판사에서 2003년 출간한 Eerdmans Commentary on the Bible이고 『IVP 성경비평주석 신약』은 원서의 신약 부분을 번역한 책이다. 세상에 나온 지 이미 17년이 넘은 책이어서, 2021년 현재 이 책의 집필진 상당수가 이미 별세했거나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이런 면을 보면 학계의 최신 동향을 반영하지 못한 책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평생에 걸친 연구를 통해 신약 각 권의 권위자로 자리매김한 거장들의 원숙한 견해의 알짬이 담긴 ‘고전’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방대한 책을 짧은 서평에 자세히 다룰 수 없으므로 복음서와 바울서신 주석 중 일부, 그리고 요한계시록 주석을 선별해서 논하려고 한다. 네 복음서 주석 중 앤서니 살다리니(Anthony Saldarini)의 마태복음 주석과 데이비드 발치(David Balch)의 누가복음 주석이 돋보인다. 살다리니는 마태복음을 사회학적 렌즈로 분석한 연구서(Matthews Christian-Jewish Community, 1994)를 출간해 마태복음 연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학자로서 특히 고대 유대 문헌에 능통했다. 이른 죽음으로 많은 이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는데, 그의 명료한 마태복음 해설이 이 단권 주석을 통해 남겨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살다리니는 기원후 1세기에 존재했던 다양한 유대 공동체와 유대교 혁신 운동들을 배경으로 마태복음을 읽어나간다. 다시 말해 유대교와 완전히 분리된 실체로서의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유대교 내의 한 그룹으로 존재했던 마태공동체가 마태복음을 산출한 모태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가장 유대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면서도 유대교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마태복음을 보다 적절하게 해석하는 바탕이 된다. 살다리니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유대교’를 배격한 것이 아니라, 교사이자 지도자인 한 사람[즉 마태복음의 저자]이 다른 [유대] 지도자들의 영향력과 그들의 가르침을 약화시키려 했던 것으로 볼 때 가장 잘 이해된다.”(119쪽) 중세와 근현대사에서 유대인이 겪은 참혹한 비극을 생각할 때, 철저하고 신중한 일차 자료 읽기에 근거한 살다리니의 마태복음 해석은 복음서를 더욱 잘 이해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성서의 오독을 자양분으로 삼는 비윤리적 행위를 방지하는 의미에서 성서 읽기의 윤리 의식 함양에도 도움을 준다. 산상수훈은 물론이거니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상대로 한 예수의 논쟁 역시 살다리니가 제시하는 유대적 맥락에 적절히 놓고 보면 초점이 맞고 앞뒤가 맞는 이야기로 잘 이해된다.


그는 기독교가 “낡고 오래된” 유대교를 대체했다는 소위 대체론(supercessionism)이 틀렸다는 점을 계속해서 명확하게 짚어준다. 그리스어 원문을 세심하게 읽고 내놓는 설명이라서 개역개정판이나 새번역으로만 읽을 때 놓칠 수 있는 흥미로운 점들을 콕콕 집어내 재미를 주기도 한다. 개역개정은 마태복음 8장 24절 도입부를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로, 새번역은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라고 번역하지만, 원문은 “바다에 커다란 σεισμός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σεισμός’는 대부분 ‘지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굳이 풀어 쓰면 “바다에 큰 지진으로 인해 물결이 크게 출렁였다.” 정도가 되겠다.


데이비드 발치의 누가복음 주석 역시 고대 지중해 세계에 대한 주석가의 방대한 지식이 복음서 이해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잘 보여준다. 독자들은 발치의 주석을 읽으며 그리스-로마 시대의 다양한 역사 기록 관행과 고대인의 세계관, 지중해인들의 문화 관습을 통해 누가복음 속 이야기 전개 자체는 물론 특정 구절들을 보다 또렷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전문 학술 주석이 주는 이점을 조금이라도 음미하는 맛보기이자, 더 깊은 공부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레이그 에번스(Craig Evans)의 마가복음 주석은 종종 과도하게 복음서 기록의 역사성을 강조하려는 시도가 보여서 아쉽다. 마틴 스콧(J. Martin C. Scott)의 요한복음 주석은 소피아 기독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면이 있지만, 복음서의 내러티브적 측면을 잘 살려 해설하고, 남성 제자들보다 뛰어난 여성 제자들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를 놓치지 않아서 상세히 읽을 가치가 있다.


로마서를 주석한 존 류먼(John Reuman)은 루터파 출신의 탁월한 신약학자로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화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병으로 타계하는 바람에 미완으로 출간된 그의 『앵커바이블 빌립보서』를 잠깐 훑어봐도 알 수 있듯이 그야말로 ‘박식’이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학자였다. 늘 그렇듯 이 짧은 로마서 주석에서도 류먼은 종교개혁자를 비롯해 현대의 주요 학자들과 성실히 대화하며 로마서를 명료하게 해설한다. 루터파를 대표하는 류먼은 현대의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학파의 주장과 “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쟁(칭의의 기반이 ‘그리스도를 믿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보여주신 신실함’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해석을 지지하고, 루터교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새 관점(루터파가 전통적으로 ‘율법의 행위’를 인간의 자력 구원 노력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해 새 관점 학파는 ‘율법의 행위’를 ‘안식일이나 할례처럼 유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율법 준수’를 가리킨다고 본다.)의 통찰을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오직 믿음으로”라는 원리에 큰 방점을 찍으면서 말이다.(620쪽)


비벌리 가벤타(Beverley Gaventa)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현대 바울 연구의 주요 흐름 중 하나인 묵시적 해석(apocalyptic reading)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예를 제공한다. 또한 가벤타가 집필 중인 로마서 주석의 내용을 짐작하고 추측하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존 바클레이(John M. G. Barclay)의 고린도후 주석은 독자들의 본문 이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 단권 주석에 실린 바울서신 주석들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 그는 총 13장으로 이루어진 고린도후서를 세 편의 편지가 합성된 것으로 보면서, 8-9장을 최초의 편지, 10-13장을 두 번째 편지, 그리고 1-8장을 가장 나중에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를 택하고, 이에 따라 고린도후서의 배경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 뒤 바울의 말을 매끄럽게 설명한다. ‘헌금’이라는 미묘한 주제를 두고 벌어지는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인 사이의 신경전, 그리고 미묘한 줄타기와 수사학적 기법을 사용하는 바울의 모습, 그리고 그 가운데 나타나는 날것 그대로의 바울의 감정을 고스란히 살려내는 바클레이의 솜씨가 일품이다. 바울이 남긴 편지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손꼽히는 고린도후서를 복잡한 학계의 논의에 파묻히지 않고 명쾌하게 설명한 좋은 주석이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조금 있어서 아쉽다.


로렌 스투켄브루크(Loren Stuckenbruck)의 요한계시록 주석도 탁월하다. 스투켄브루크는 묵시 문헌 연구에서 손꼽히는 학자이다. “로마 제국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비판”하는 글로 계시록을 이해하는 것은 크레이그 쾨스터(Craig Koester)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큰 차이가 없으나, 아우니(Aune)에 비해 요한계시록의 서신적 특성을 강조하며 계시록 내용 전체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전해진 편지에 들어 있는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새겨들을 만하다. 특히 고대인의 천사 이해에 남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저자가 요한계시록 1장 13-18절을 고기독(high Christology)로 해석하는 학자들을 반박하며 “천사 기독론”(천사 같지만 천사보다 우월한 그리스도)을 제시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기는’” 기독론과 제자도의 긴밀한 결합에 대한 저자의 강조도 계시록을 읽는 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수많은 논쟁을 촉발시킨 “천년왕국”에 대해서 유대 묵시 문학에 정통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20:1-3과 4-6절의 시나리오는 두 개의 유대 묵시 전승을 본뜬 것이다. (1) 악한 권력이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임시 거처 개념… (2) 최후의 심판 전에 있을 메시아 통치기에 대한 기대다. 요한은 이 두 전승을 결합하여, 종말의 심판을 두 단계 혹은 두 부활로 나누게 된다. 즉 순교한 의인의 보상을 강조하는 단계(“첫째 부활”)와 악인의 심판을 강조하는 또 다른 단계(“둘째 사망”)다. … 일차적으로 요한은 일어날 사건의 순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의인과 악인의 궁극적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신실한 자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시고 사탄과 동맹한 이들을 소멸시키실 것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려고 한다.(1089쪽)


학문적 주제 외에도 이전에 몰랐던 정보를 아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금까지 필자는 마가복음 3장 20절(“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표준새번역)을 “엄청나게 바빴다”라는 의미로 읽었는데, 에번스는 이 언급을 “집이 굉장히 붐볐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바르게 본다. 왜냐하면 사람들로 북적여서 “설 수 있는 공간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중해의 관습에 따라) 비스듬히 누워 식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며 공간의 비좁음과 사람들의 몰림에 대한 강조의 표현이라고 본다.(249쪽)


처음 학문적 주석을 접한 사람은 학자들이 유대 문헌과 그리스-로마 문헌에서 인용하는 수많은 ‘병행본문’을 보고 당황할 수 있다. 먼저 성서와 유사한 내용이 담긴 문서들을 학자들이 인용하며 설명하는 이유를 잘 모르고, 성서를 ‘세속적’ 문서로 설명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서학의 본질을 알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가능한 한 성서 각 문헌이 작성될 당시의 문화적·역사적 맥락 안에서 읽어야 ‘원래의 뜻’을 파악하는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성서를 사랑하면 할수록 고대 유대교와 그리스-로마 문화를 더 알고 싶어져야 한다. 그래야 성서 구절 하나하나가 우리 귀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신자들이 주석을 보고 싶어 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소위 난해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 주석은 이러한 요구를 속시원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지면 제한이 있는 단권 주석이 가지는 한계이다. 또한 이 책은 성서 구절을 대부분 개역개정에서 인용하기 때문에 그리스어 원문에 기초한 주석가의 해설이 선명하게 와닿지 않는 경우가 있어 아쉽다. 예를 들어 바알세불 논쟁에서 ‘강한 자’(τοῦ ἰσχυροῦ)라는 모티프가 근간이 되는데, 에스는 마가복음 1장 7절에서 세례요한이 ‘오실’ 예수에 대해 “더 강한 자”(ὁ ἰσχυρότερός)라고 말했던 구절을 가리키며 이 이야기를 설명한다. 이 책에서는 개역개정의 “더 능력 많으신 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써서 저자가 강조하는 연결점이 좀 약해졌다.(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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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학술 주석과 교회 성경공부 사이에 놓인 아득히 먼 공간을 조금이나마 축소시킬 수 있는 힘




이 책은 전문 학술 주석과 교회 성경공부 사이에 놓인 아득히 먼 공간을 조금이나마 축소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교회의 성경공부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누군가는 지나친 이상이라고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만들려면, 반드시 이러한 방향으로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이 좋은 책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많다는 것은 장점이긴 하지만, 그만큼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말도 된다. 전문 연구자가 아닌 이상 이 책의 혜택을 오롯이 누리기 위해서는 도우미 혹은 안내자가 필요하다. 학계에 널리 알려진 주제나 문제를 친절하게 풀어 쓰지 않고 이미 알고 있으리라 전제하고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각 저자 고유의 관점이 다른 주요 연구 흐름과 발맞춰 흐르는 지점과 갈라지는 지점을 짚을 수 있어야 저자가 말하는 바를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신약학을 전공한 분이 많다. 부디 이분들 중에 좋은 안내자가 나와서 이 책의 진가를 밝혀주고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진짜 성경공부’의 기쁨을 나누는 일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김선용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성서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신약 정경과 외경, 초대교회사를 공부했고, 초기 기독교 문헌을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 수사학, 종교적 배경에서 연구하고 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객원교수로 일했으며, 현재는 연구와 번역에 집중하고 있다.

 

 



*이 글은 <기독교사상> 2021년 2월호 책마당에 실린 글입니다. 필자와 <기독교사상>의 허가를 받아 재게재합니다. 다른 곳으로의 무단 인용이나 게재를 금합니다.

 


IVP 202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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