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 서평

기독교 믿음은 이치에 맞는가(서문)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링크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본문

앨빈 플랜팅가 <지식과 믿음> 서문

55ab95897959196e8e5fc4ff80a5308e_1568702531_28.jpg


보증된 기독교 믿음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나는 지금도 그 책에 썼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 책이 너무 길고 전문가나 이해할 만한 내용들이라는 얘기를 듣곤 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나는 그 말에 수긍했고 그것을 고치고 싶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책  『지식과 믿음』이다. 나는 『보증된 기독교 믿음』의 분량을 줄이고 독자에게 친절한 책이 되도록 했다. 강조점을 포함해 몇 가지 변화가 있지만, 나는 보증된 기독교 믿음을 거의 대부분 따르면서 몇 곳에서 내용을 추가하거나 너무 자세한 내용은 과감하게 덜어 냈다.

 

이 책이 주로 다룬 주제는 기독교 믿음이 합리적인가, 혹은 이치에 맞는가, 혹은 정당화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물론 이 문제는 기독교가 시작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아주 오랜 세월 중요한 물음이었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는 훨씬 더 뜨거운 문제가 되었다. 이 물음은 소위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등장하면서 훨씬 더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이 무리의 중심인물은 무신론의 네 기사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 크리스토퍼 히친스다. 그들은 종교적 믿음을 깔아뭉개는 데 목표를 둔 것으로 보인다.

 

철학만 놓고 말하자면 새로운 무신론자가 옛 무신론자(가령 버트런드 러셀, C. D. 브로드, J. L. 맥키)보다 분명 뒤떨어지지만, 일으킨 소음만큼은 훨씬 큰 것 같다. 혹자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내용보다 문체에 치중한다고 말할지 모르나, 문체도 별반 나을 게 없다. 이들이 선호하는 문체는 진지한 학술서의 문체라기보다 팸플릿과 격렬한 비난에 쓰는 문체 같다. 이들은 나쁜 날씨와 충치를 제외한 모든 안 좋은 일이 종교 탓이라고 비난한다. 이들의 문체는 독설, 신랄한 비판, 욕설, 조롱, 모욕, “적나라한 경멸을 강조한다. 하지만 설득력 있는 논증이 없다.

 

그럴지라도 이들이 던진 질문 가운데는 대답이 필요한 것이 일부 있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는 널리 종교적인 믿음,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 믿음이 비합리적이고, 사리에 맞게 주장하기가 불가능하며, 교육을 제대로 받고 생각이 바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가령 도킨스는 종교의 비합리성은 뇌 속에 박힌 어떤 특별한 비합리성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다라고 말한다. 대니얼 데닛은 신이라는 기능허구를 만들어 내는 기묘한 장치라고 말한다. 데닛은 신앙이 이성과 별도로 지식의 근원이거나 지식의 근원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장려하지 않는다.

 

만일 여러분이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는 이런 신앙 이해가 사람들끼리 서로 당황하고 체면이 깎이는 일을 피하려고 사회가 사용하는 모호한 정의보다 어쨌든 낫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철학자보다 훨씬 깊이 이 문제를 파고들었거나(여태까지 아무도 이를 뒷받침할 좋은 변증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여러분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불만을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체 기독교 믿음이 정확히 어떤 점에서 비합리적이며 지성인이 보기에 엉터리라는 것인가? 기독교 믿음이 비합리적이라는 이 주장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간파하기가 쉽지 않으며, 해서 나는 이 주장의 의미를 더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이 주장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파악하고 난 다음 (1) 종교적 믿음이 비합리적이라는 이런 비판 혹은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 (2)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정녕 기독교 신앙의 총체를 믿는 믿음 전체가 철저히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으며 정당화될 뿐 아니라, 사실은 지식이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라는 것, (3) 기독교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런 반론이 어떤 설득력을 가지려면 기독교 믿음이 거짓이라는 가설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해 보겠다. 내가 옳다면, “글쎄, 난 기독교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몰라. 그런 걸 누가 알겠어? 하지만 기독교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다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거나, 이치에 맞지 않다거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 가질 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틀린 셈이다.

 

55ab95897959196e8e5fc4ff80a5308e_1568701239_92.jpg


본론에 앞서 다룰 쟁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기이하게도 기독교 믿음 같은 것이 사실은 없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같은 것도 사실은 없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혹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같은 문장이 경험으로 확증할수 없으므로 공허하며 알맹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훨씬 위에 계신 분이므로, 또는 하나님이 궁극의 실재이시며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이 궁극의 실재에 적용되지 않으므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어떤 믿음들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1장에서 가장 먼저 다룰 질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같은 것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 믿음 같은 것이 있는가? 이런 것들이 없다면, 기독교 믿음이 합리적인가 혹은 타당한가 하는 질문은 당연히 다룰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우선 칸트에게 영감을 얻은 이런 생각을 고찰해 보고, (책 제목을 보고) 짐작하겠지만, 기독교 믿음 같은 것이 실제로 있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그들이 믿는 듯 보이는 것들을 믿고 있다면, 2장에서는 기독교 믿음이 슬프게도 어떤 면에서는 결함이 있다는 주장곧 비합리적이라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거나, 어린아이나 믿을만한 것이라거나, 이 시대 사람들(우리 시대의 훌륭한 학식을 가진 사람들)이 믿을 만한 게 못 된다거나, 지성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어쨌든 결함이 있다는 주장을 바로 잡으려고 애쓸 것이다.아울러 나는 이런 유형의 반론이 실제로 기독교 믿음에 보증(warrant)이 없다는 주장, 즉 지식을 단순한 참된 믿음과 구분해 주는 속성이나 분량이 없다는 주장이라는 것을 논증해 보겠다.

 

3장에서는 기독교 믿음에 대한 보증의 본질을 깊이 고찰해 보겠다. 여기서 질문은 보증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왜 기독교 혹은 유신론 믿음이 보증을 갖고 있지 않다거나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런 믿음이 참으로 보증을 가지고 있음을 제시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비록 나는 그런 믿음이 보증을 가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믿지만 말이다), 다만 보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일 믿음이 참이라면 십중팔구는 보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 할 뿐이다.나는 물론 유신론 믿음이 참이라고 믿지만, 그럼에도 이 믿음이 참이라는 논증은 하지 않겠다. 사실은, 철학적 논증 못지않게 유신론 믿음을 아주 훌륭하게 지지하는 논증이 어느 정도 있다. 그럼에도 이 논증들은 진지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유신론 믿음을 받아들일 때 갖는 확신을 충분히 지지해 줄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더구나 나는 이 논증들이 이를 근거로 삼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지식을 부여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관련해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4, 5, 6장에서 나는 성숙한 기독교 믿음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음을 논증할 것이다. 기독교 믿음이 참이라면 칼뱅이 말하는 성령의 내적 증언이나 아퀴나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초청의 내적 자극 같은 것이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고, 이런 과정 덕분에 기독교 믿음이 보증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믿음이 참이면, 이 믿음은 보증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나는 이런 것들이 참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논증을 통해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 믿음이 보증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 믿음을 거부하거나 포기하거나 덜 강하게 갖게 하는 반론과 파기자의 상대가 될 수 있다. 7장에서는 맥키가 유신론과 기독교 믿음에 반대할 만한 이유로 제시한 것들을 들어보고, 보증과 종교적 체험의 관계도 함께 다룰 것이다. 이어서 8, 9, 10장에서는 기독교 믿음의 파기자가 될 가능성이나 잠재력을 가진 것을 살펴보겠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특정 유형의 성경 연구인데, 예를 들어 악명 높은 예수 세미나가 대표하는 유형이 그런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성경 연구자들은 번번이 기독교 믿음과 양립할 수 없는 이론과 결론을 들고 등장한다. 나는 이런 학자들이 학문성을 추구한다는 의도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매여 있음을 8장에서 논증해 보겠다. 이어서 결국 이들의 이론들이 (어쨌든 그런 이론들로는) 기독교 믿음의 파기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논증해 보겠다.

 

기독교 믿음의 파기자로 제안되는 또 다른 것은 다원주의로, 기독교 외에 많은 종교가 있으며 대다수 종교가 이런저런 점에서 기독교 믿음과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를 인정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렇다면 이런 인정이 다원주의를 나에게 기독교 믿음의 파기자가 되게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음을 9장에서 논증해 보겠다(이는 마치 나와 다른 정치적 신념과 철학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내가 인정할지라도 이것이 곧바로 내 정치적 신념과 철학적 신념의 파기자들에게 나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님과 같다).

 

55ab95897959196e8e5fc4ff80a5308e_1568701834_64.png
앨빈 플랜팅가(1932~)


마지막이자 어쩌면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일지도 모를 것이 있는데, 곧 이 세상에 있는 악, 모든 죄, 고난, 고통, 불안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그 믿음을 저버릴 만한 그리고 어쩌면 가장 확실한 이유를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어쩌면 기독교 믿음의 파기자로 제안된 것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죄, 고통, 악은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안고 있는 골칫거리다. 물론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가령 구약성경의 욥기도 이 문제를 아주 일찍부터, 아주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 아주 강력하게 말한다. 나는 10장에서 악이 신자에게 골칫거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성공적인 파기자는 전혀 아님을 논증한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대부분 내가 보증된 기독교 믿음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보증된 기독교 믿음이 최대치의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 즉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책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는 물론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 어쩌면 대다수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상황이다. 나는 아주 타당한 이 불만을 이 책 131쪽에서 다루려고 시도해 보았다. 이로 인해 내용에 제법 변화가 있었지만, 몇 군데 소소한 변화를 제외하면 내가 여기서 말하는 내용과 보증된 기독교 믿음에서 말한 내용은 일치한다. 이 책이 어떤 주제를 다룬 내용에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는 독자는 그 주제를 더 충실히 다룬 보증된 기독교 믿음를 참조하기 바란다.

 


*가독성을 위해 서문을 편집 및 중략하였습니다.


IVP 2019-09-17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