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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신약성경』 서문 (톰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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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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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생애에서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바로 번역이었다. 오순절 날 하나님의 강한바람이 거대한 원양선이 항해하듯 예수님의 제자들을 휩쓸고 지나가며 그들을 충만케 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들고 땅끝까지 갈 수 있었다. 그때 그들은 각자 다른 언어로 말했다. 그리하여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결국, 사람들이 찾아올 때까지 근엄한 자세로 편히 앉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오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예수 메시지의 핵심에 속한다.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곧바로 사람들은 번역을 했다. 오순절 날처럼, 번역은 가끔 성령의 직접적 행동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부분은 그 메시지를 다른 언어로 열심히 바꾼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예수님은 대개 당시의 최신 히브리 방언인 아람어로 말씀하셨지만, 복음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영어가 그러하듯, 그리스어는 당시 모든 사람의 제2외국어였다. 따라서 이 메시지는 한 언어의 원어민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이 되어야 했기에, 번역이 중요했다. 일단 번역이 시작되자, 그 과정은 계속 이어졌다.

  

성경 전체가 영어로 완역되기까지 1,500년이 걸렸다.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나자이는 특히 내 평생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인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536년 사망)의 수고 덕분이었다이런 발상은 급물살을 탔다. 16세기에 여러 번역본이 등장했으며, 17세기 초반 흠정역(King James Version, ‘공인 번역본’)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20세기에도 새로운 영역본 몇이 생겨났다. 거의 단어 대 단어 식으로 짝을 맞추는 아주 엄밀한 번역이 있는가 하면, 좀더 자유롭고 덜 딱딱하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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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틴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죄로 1536년 10월 6일 화형당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 새 번역본은 정말 번역인가, 아니면 의역인가? 우리에게 왜 또 다른 번역본이 필요한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 나라 신약성경>은 의역이 아니라 번역이다. 나는 원본을 최대한 고수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모든 번역이 그렇고, 또 밀접한 친족어인 현대유럽어 안에서조차 그렇듯, 단순히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할 수 없는 곳이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런 번역은 한편으로는 정확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부정확하다. ‘안전한선택지는 없다. 모든 번역에는 위험이 따르지만, 그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이다. 

 

이는 특히 해당 언어가 전문적 의미에서 사어일 때는 더 그렇다. 오늘날 1세기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따라서 우리는 원어민에게 전화를 걸어 특정 어구의 뜻을 물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전화한 그사람이 신약성경 저자가 한 단어나 어구, 문장에 담은 모든 의미를 이해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결국 신약은 이스라엘의 유서 깊은 성서에 깊게 뿌리내린 이야기를 전해 준다. 신약에 나오는 주요 전문 용어가 일반 비기독교 그리스어의 통상적 용법보다 히브리어 대응어와 훨씬 더 비슷한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어가 손쉽게 영어로 번역되는 경우가 곧잘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예가 있다. 하나는 간단한 단어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핵심 단어들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어는 종종 간단한 단어를 사용하여 두 문장을 연결한다. 영어는 종종 구두점을 사용하여 그렇게 한다(‘하지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세미콜론으로 좀더 우아하게 동일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간단한 단어 가르’(gar)를 무척 많이 사용하여 두 문장을 연결하는데, 영어 번역본은 이 단어를 때문에라는 뜻의 ‘for’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for’라는 단어를 그런 식으로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바울처럼 이 단어를 계속 반복한다면,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게 들릴 것이다. 사람들은 대화에서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신약의 상당 부분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라기보다는 대화에 훨씬 더 가깝다. 그래서 나는 여러 상황에 따라 이 단어를 다르게 번역했다. 로마서 8:13-14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여러분은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받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for)입니다”(NRSV 번역). 나는 ‘for’ 대신 구어체 영어 ‘you see’(알다시피)를 쓰기로 결정했다. “알다시피, 하나님의 영에 인도받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때로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면서 두 요소를 연결하기도 했다.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당신을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8:1-2). 만약 내가 바울이 되어 강의한다면, “왜 그럴까요?때문입니다를 사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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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한’ 선택지는 없다모든 번역에는 위험이 따르지만그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이다." 


이제 더 중요한 핵심 단어를 예로 들어 보자. 신약의 중요한 몇몇 단어는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화물을 실은 배와 같아서, 모든 수하물을 담을 수 있는 현대어가 없다. 가령 영어 단어 ’(righteousness)는 오랫동안 전문 신학 용어였고,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dikaiosyne)의 번역어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상당수 영어 사용자에게 이 단어는 자기의를 뜻한다. ‘교회 냄새를 풍기는건방진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에게 대안은 없다. 우리는 정의’, ‘언약적 신실함’, ‘올바른 신분 혹은 관계를 한꺼번에 모두 집어넣어, 이 화물을 안전하게 싣고 출항하여 세계를 누비며 다닐 수 있는 한 단어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디카이오쉬네가 본문에 따라 각각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풍미들을 이끌어 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크리스토스’(Christos)에 대해서도 똑같이 했다. 대부분의 번역본은 그냥 그리스도라고 쓰지만, 대다수 현대 영어 사용자는 이 단어를 그냥 인명으로 여긴다(마치 예수는 예수의 기독교식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그의 인 것처럼). 온갖 이유로,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메시아’(이는 그 단어의 문자적 의미다)는 물론이고 가끔 으로도 옮기는 실험을 감행했다. 이런 실험에는 위험이 뒤따른다. 하지만 동시에 영광스런 기회도 제공한다.

 

이것은 기회다(이는 왜 또 하나의 번역본이 필요하냐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신약 번역은 사실 각 세대마다 이루어져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 자체와 결부된 특별하고 고유하고 짜릿한 특징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곧 그날 그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코 어제의 양식, 곧 이전 세대의 해석과 번역을 먹고살 수 없다. 분명히 우리는 믿음 안에서 우리보다 앞서간 이들에게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들 자신이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필요가 있다고. 상속받은 영적 자산이 우리의 출발에 도움이 되겠지만, 혼자 힘으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고, 철저히 사고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며 숙고하며 시험해 보아야 한다. 새로운 번역은 꼼꼼하면서도 충실해야 함은 물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 새로운 번역은 바로 그러한 더 큰 과제를 위한 핵심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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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도구를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장과 단락 그리고 책 전체를 한자리에서 독파하는 게 좋다. 신약을 구성하는 책들은 한 번에 열 절 단위로 읽도록 쓰이지 않았다. 만일 교향곡을 그런 식으로 듣거나, 한 주에 한 번 한 쪽씩 소설책을 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 이 번역본이 사람들로 하여금 큰 덩어리의 흐름과 결 그리고 그 에너지와 힘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도록, 또 그 일을 수월하게 해 주기 바란다.

 

둘째, 그러나 짧은 분량을 붙들고 앉아 치열하게 연구하여 각 문장과 어구와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밝히려는 노력은 언제나 가치 있다. 이를 위해 (그리스어를 알고 있더라도, 그리스어를 모른다면 더더구나) 언제나 당신 앞에 적어도 두 가지 영어 번역본을 펼쳐 두어야 한다. 어떤 번역본도 그리스어에 담긴 모든 의미를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도 분명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다음 세대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도록 돕는, 곧 신약이 당시 세계에서 말한 바와 우리 세계에 긴박하게 말하려는 바를 간접적이 아니라 직접 이해하도록 돕는 두세 가지 번역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기 바란다.

 

이러한 절박감 때문에 나는 덜 딱딱하고 덜 학문적이면서도 더 역동적인 문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약은 대부분, 당대의 높은 기준으로는 위대한 문학 작품이 아니다. 마가복음은 파격적 소책자에 훨씬 더 가깝다. 바울의 편지들은 시적 재능이 돋보이긴 하지만, 종종 북적대는 강의실에서 강의가 끝난 후 벌어지는 열띤 토론을 반영하는 것 같다. 흠정역이나 표준개정판(Revised Standard Versions) 전통에서 만나는 훨씬 딱딱하고 사뭇 위엄 있는 영어 산문을 흉내 내기보다, 그러한 열띤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해 보였다. 물론 그 번역본들도 나름대로 훌륭하다.

 

이는 온갖 종류의 결정에, 예컨대 예수님의 토론과 논쟁을 재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현대 영어에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들이 보고 들은 바를 요한에게 전하여라’ ”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설에서처럼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걸 요한에게 전하여라.’ ”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전체 이야기를 듣고 느끼는 방식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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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신약성경> 영국판(왼쪽/위쪽)과 미국판 
 


원래 이 번역은 신약에 관한 일련의 안내서혹은 대중 주석서에 곁들여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시리즈(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을 비롯한 톰 라이트 에브리원 주석”), ‘성경 주석을 한 번도 정식으로 읽어 본 적은 없지만 혼자 힘으로 본문을 파고드는 데 도움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만일 내가 늘 , RSV는 이렇게 말하고 NIV는 저렇게 말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달리 말한다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는 매번 그런 식으로 언급할 필요 없이 본문에 대해 해설하고 싶었다. 여태껏 나온 모든 번역판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계속 등장하는 여러 해석 포인트에 대한 나 자신의 특정한 관점을 취했다. 논란이 되는 여러 신약 본문에 대한 나의 이해가 이 신약 번역에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모든 신약 번역본은 처음 수백 년을 거치며 살아남은 그야말로 수천 개의 사본으로부터 그리스어 신약성경 판본들을 만들어 낸 다른 사람의 작업에 의존한다. 이따금씩 나는 어떤 본문을 따를지 까다로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책에서는 고대의 다른 권위 있는 사본은 이렇게 말한다는 식의 설명을 끼워 넣어 독자들을 산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설명을 원하는 사람은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때로는 한 절 전체가 성경 필사본에 덧붙여지기도 했다. 마태복음을 옮겨 적으면서 마가복음에 있는 동일 본문을 붙여 넣거나, 그 반대로 하는 필사자들에 의해 종종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예컨대 마태복음 6:15이 마가복음 11장의 몇몇 필사본에 영향을 미쳐 추가 구절(26)이 탄생했다. 현대 편집자들은 이런 추가구절을 배제한다. 가장 훌륭한 최초의 필사본에는 그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절수 표시를 가끔 건너뛸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절 구분은 이러한 양질의 필사본들이 발견되기 몇 백 년 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난외주가 포함된 번역본들이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줄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두 가지 부가 결말이 존재한다. 이런 부가 결말은 가장 훌륭한 필사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원본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두루마리에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마가가 16:8에서 끝낼 계획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그런데 얼마 후 두 필사자가 결말을 보태 이야기를 좀더 잘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고, 이 두 결말이 필사본 전승에 흘러들어 왔다. 두 결말 중에 (이중 대괄호로 처리된) 짧은 결말에는 절 표시가 없다. 두 번째 결말은 마가복음 16:9-20로 알려져 있다.

 

둘째, 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시종일관 성 중립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조심스레 말하지만, 때로는 이 작업이 상당히 어려웠다. 종종 그 남자나 그 여자대신 그들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일부 사람들이 문법에 어긋난 볼품없는 형태라고 여길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언어가 변화의 시기를 거칠 때 나타나는 전형적 사례다. 어쩔 수 없다. 사실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신선한 번역이 필요한 이유도 언어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면서 내가 바라고 기도하는 바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신약성경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현실 적합성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교회 전체와 교인 개개인이 신앙 면에서 새로워지고 내일의 세계에 하나님의 선교를 진척시키는 활력을 얻는다면, 나로서는 기쁘기 그지없을 것이다. 나는 교회와 학문세계 양쪽에서 신약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내 생애 최고의 시기를 보내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다. 이제 이 번역본을 통해 그간의 작업이 좀더 폭넓은 청중들에게 다가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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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런던 SPCK에서 일하는 내 친구들과 출판인들, 특히 에브리원 시리즈를 맨 처음 의뢰했고 지금까지 줄곧 격려해 준 사이먼 킹스턴(Simon Kingston)과 조애너 모리아티(Joanna Moriarty)에게 더없이 감사한다. 또 이 번역본을 미국에서 발간해 준 샌프란시스코의 하퍼원(HarperOne) 출판사에, 특히 미키 모들린(Mickey Maudlin)과 마크 토버(Mark Tauber)에게 무척 감사한다. 업무상 맺어지는 모든 인간관계가 이렇게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출간을 앞둔 최종 단계에서 언어의 정확한 뉘앙스를 감지하는 섬세한 눈과 신학자의 심장, 그리고 문법학자의 즐거움을 지닌 채 본문 전체를 검토해 준 리폰 칼리지 커데스던의 마이클 레이키(Michael Lakey) 박사에게 특별하고도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그는 나를 몇 가지 어처구니없는 실책에서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훌륭한 수정안을 친절하게 제시해 주었다. 이 책에 남아 있는 실책은 나 자신의 것이고, 그 가운데 일부는 내가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다. 

 

끝으로, 명확하고 경쾌한 영어로 글을 쓰려는 나의 끊임없는 노력과 관련하여, 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짧고 예리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곳에 장황하고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빈번히 제동을 걸어 주었다. 감사와 사랑을 담아 그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톰 라이트



IVP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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