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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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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와 이단』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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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젊은 지구 창조론과 진화적 창조론 중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B.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봅니다.

A. 아니요, 그래도 하나 정해 봐요. 일단 지구가 몇 년 정도 된 것 같아요?

B. 흠… 몇 억 년, 몇십억 년 그쯤 아닌가요.

A. 네, ‘이단’이십니다. (?)


 

『바보와 이단』을 받아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억지로(?) 묻고 다닌 내용 일부다. 그렇다. 옳고 그름 이전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창조의 방법이나 지구의 나이 같은 것들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제로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이 씨름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씨름은 『창조 기사 논쟁』과 같은 책에서처럼 신학자들의 것일 수 있고, 이 책에서처럼 과학자들의 것일 수도 있다. 둘 다일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창조와 진화 문제는 신학과 과학의 대치 상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 친구가 한 베스트셀러가 기대 이하였다는 평을 남겼다. 나는 그 이유를 물었고 친구는 책의 내용이 진화론을 전제로 하고 있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공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과연 그래야만 할까? 그리스도인들은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이 책은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을 ‘바보’라고 무시하고,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진화적 창조론자들을 ‘이단’으로 폄훼해 왔다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기원 담론에만 국한된 내용은 아니기에 기독교 신앙과 학문 안에서 여러 불일치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 만하다. 




창세기 첫 몇 장을 다른 방식으로 읽을 뿐이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는 성경의 권위와 성경이 진리임을 믿는다. 

우리는 그저 창세기 첫 몇 장을 다른 방식으로 읽을 뿐이다.”(114쪽)


두 명의 과학자는 골로새 포럼의 초대를 받아 대화를 시작한다. 그중 젊은 지구 창조론자 ‘토드 우드’는 진화론의 증거가 진화를 사실로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그 증거들은 창조 사건의 전말에 대한 호기심을 키울 뿐이며 결국에는 “젊은 지구를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그는 기독교와 진화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데,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말씀의 오류 가능성이 제기되고 결국, “신학의 전체 구조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진화론적 창조론자 ‘대럴 포크’는 “창세기 1-11장의 사실적 정확성은 나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는 그 메시지에 담긴 “영원한 진리”에 더욱 관심이 있다. 젊은 지구의 과학적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토드의 접근 방식은 존중하나 진화론의 증거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그가 필요한 근거를 찾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대럴이 볼 때 토드와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작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불신자와 신자 모두에게 해로운 것이다. 

 

 


그들 사이엔 오해가 있다


“토드, 지금 그 지점에서 자네는 진짜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102쪽) 


대럴은 “토드가 진화론을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의 입장은 신중하면서도 학구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토드의 변론, 곧 그의 배경과 진화 과학 분야에서의 다양한 경험에 대해 듣고는, 그가 “진화론을 아주 잘 이해할 뿐 아니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토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게 된다. 토드는 진화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한편 토드는 대럴과 같은 “그리스도인 진화론자들의 큰 동기가 세상에서의 우리의 입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럴은 진화의 압도적 증거로 인해 그 과정이 하나님의 창조를 정확히 말해 준다고 믿는다. 이는 “나머지 과학 세계와 어울리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결국 토드는 “그에게 진화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알게 되면서 그를 이해하게 된다. 대럴이 진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내 편, 네 편이 없는 것같이


“어떤 면에서 우리는 같은 편이라고 느꼈지만, 그 자리의 대화에는 성령의 임재가 

매우 충만했기에 아예 내 편, 네 편이 없는 것 같았다.”(111쪽) 


물론 이 책은 불일치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골로새 포럼의 ‘랍 배럿’은 “내게 흥미로운 근본 질문은 대럴과 토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불일치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화는 서로의 주장에 반박하고 그 주장의 위험성을 비판하며 시작되지만,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상대를 향한 친절과 존중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무엇보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안다. 


나는 교회에서 젊은 지구론을 배우며 자랐지만, 이후에 전환점을 만나더라도 그때그때 주어진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 큰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며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들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표현하는 안정감 같은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면서 그간 어떤 고충이 있었을지 짐작해 보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안전지대를 뛰쳐나온 용감한 개척자”인 토드와 대럴을 더욱 응원하게 된다. 


그들은 “적으로 간주하던 누군가에게 기꺼이 자신을 열어 보였”으며, “상처 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토드는 대화의 자리로 계속 나오게 되는 이유를 “여기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대럴은 “이 사랑은…토드와 나를 하나로 묶어 준다. 우리를 향해 뻗으신 그 팔에 둘 다 안길 때, 그 차이는 희미해진다”고 말한다. 그렇게 “공통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면서” 이들 가운데 일어난 무언가, 그것은 대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대럴과 토드가 함께한 여정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222쪽)


이처럼 토론에 참여한 토드와 대럴의 휴머니즘 드라마도 함께 소개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이었다. “심각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가까워지는 그들을 보며 끝에는 내적 친밀감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그래서 창조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의 결론은 도출되지 못했고 이야깃거리는 태산같이 남아 있다. 


논쟁이라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랍이 서문에서 말하듯 “우리의 확증 편향이 늘어 가고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줄어들 때, 우리는 이런 존재 방식이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어진 재료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하고 해석하려는 다수의 노력이 우리의 이해를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말씀과 공동체를 증대시키는 방식으로도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신실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어쩌면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의 호흡, 화합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그런 경험으로의 한 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젊은 지구 창조론과 진화적 창조론을 비교적 쉽게 접하고 싶은 이들, 책에서 묻는 여러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창조 신앙을 점검하고 싶은 이들은 물론, 양극화라는 말도 진부하리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양극화되어 “온통 새로운 담이 쌓이는 중”인 한국 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 이들을 이 책이 여는 대화의 장에 초대하고 싶다.



김나영/ 과학과신학의대화 간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신학보다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다. ‘게헨나영 되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IVP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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